
형, 저 이제 형 그만 좋아할게요. 형도 저 피하지만 말아주세요.
p.m 5시 20분 서동성
서.동.성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 세 글자의 이름보다도 딱딱한 문자 내용에 재현은 저도 모르게 크게 한 번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학교 후배라고 생각했던 녀석과의 관계가 언제 미로보다도 복잡하게 꼬여버렸는지 감이 오지 않아 이 감정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갈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머릿속에는 그와의 기억이 조각나버려 기억이 남긴 문장의 파편이라는 시체만이 어즈러이 떠돌았다.
…
달리는 버스 속 살짝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아직은 제 기운을 온전히 펼치지 못한 열기가 줄다리기를 벌이는 초여름이었다. 재현은 일주일 중 여느 5일처럼 채 잠이 물러가지 않은 몽롱한 머리로 시야 밖으로 빠르게 사라져 가는 익숙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흘러나오는 안내방송 속 익숙한 단어에 번쩍 정신이 들어 벨을 누르고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어서 내리기를 재촉하는 버스 기사의 따가운 눈초리가 뒤통수를 찌르는 것 같았지만, 재현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매일 돌아오는 아침, 채 깨어나지 않은 생명이 활기를 찾아가는 이 시간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재현은 매일 또래 학생들보다는 조금 일찍 집에서 나섰고, 해가 아직 온전히 뜨지 않아 조금은 서늘한 정거장에서부터 학교까지의 그 짧은 오르막길을 홀로 걷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옷을 입은 채 불안한 듯이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 소년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더 가까이 가니 소년의 옷에 붙은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을 받아 초록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그가 1학년임을 알려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작년 3월의 자신과 같아 타고난 천성이 살가웠던 재현은 차마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걸고 말았다.
“안녕! 혹시 ㅇㅇ고등학교 찾고 있니?”
말을 걸고 보니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오지랖을 부린 것은 아니었는지 같은 걱정들이 떠올랐다. 지금이 6월이라는 것이 생각나자 더더욱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자신의 행동이 너무 후회되었다. 재현이 입을 연지도 벌써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도 입을 열지 않는 소년이 마치 어떻게 하면 재현을 민망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의 도움을 거절할까 고민하는 것 같아 재현은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여러 번 쥐어박았다.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소년은 그러다 문득 이 침묵이 너무 길게 지속되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시선을 거두고 살포시 웃어 보이며 대답하였다.
“네! 저 오늘 전학 온 첫날이어서 학교가 어딘지 모르고 헤매고 있었는데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웅웅 당연하지! 난 김재현인데 넌 이름이 뭐예..요?”
“아 저는 서동성이요”
“아아 그렇구나 나는 …”
버스정거장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그 짧은 길을 걷는 동안 재현은 오랜만에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를 잇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몸소 체감하였다. 처음에는 반말로 살갑게 건네던 말도 그가 후배라는 사실과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두 사실이 그의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벌여 어색한 반존대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질문과 짧은 단답형 대답 그리고 그사이에 반복되는 침묵이 5번째로 생기기 전에 재현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필사적으로 한마디 말을 던졌다.
“저는 밴드 음악 좋아하는데 혹시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그러자 그동안 이어지던 단답형 대답은 어디로 갔는지 그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하였다. 자신은 베이스를 친다고. 그 말을 들은 재현이 반가워하며 자신은 학교 밴드부에서 드럼을 치는데 밴드부에 베이스가 없어서 힘들다고 말을 이었다.
“아니 내 친구 중에서 훈이라고 기타 치는 애 있는데 걔가 베이스를 칠 수는 있는데 원래 포지션이 기타다보니까 베이스가 비어서 너무 힘들어”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재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 베이스 친다고 하지 않았나? 잘 쳐? 너 방금 전학 왔으니까 동아리도 없지 않아? 혹시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그러자 그 소년은 쏟아지는 질문이 조금은 버거운 듯이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그저 줄을 튕길 줄만 안다고 말하였다. 급히 베이시스트가 필요하였던 재현은 겸손한 것인지 실력이 부족한 것인지 모를 소년의 말에도 소년이 어느 정도 기본기만 갖추고 있으면 그를 꼭 입부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 간절한 마음에 그에게 바짝 다가가 꼭꼭 이튿날 동아리방에 와서 베이스를 쳐 달라고 하였더니 그는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도 예쁘게 웃어 보이며 꼭 그러겠다고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재현은 저도 모르게 역시 어려서 그런지 귀엽다고 생각하였을지도 몰랐다.
이튿날, 수줍게 동아리 방의 문을 두드린 그 소년의 손가락이 베이스의 줄 위에서 펼친 연주는 도저히 고등학교 1학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손이 줄에서 떨어지자마자 예상치 못했던 실력자를 보게 되어 잠시 놀람을 숨기지 못하던 동아리 부원들에 잠시 지속된 침묵은 곧 그와 그러한 그를 발견한 재현에 대한 칭찬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한 것은 그저 그 소년을 동아리에 와보라고 한 것임에도 자신에게도 쏟아지는 칭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재현은 하루 사이에 부쩍 좋아진 그 소년의 어깨 뒤로 손을 감으며 역시 자신은 안목이 뛰어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그 소년의 귀가 조금은 빨개 보였던 것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동아리방의 열기 때문이라고 그때의 재현은 생각했었다.
동성이라는 새로운 부원이 일으킨 파동도 잠시, 곧 다가오는 정기 공연에 부원들은 악보를 준비하고 악기를 세팅하며 저마다 분주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 한가운데서 물 위에 기름을 띄워놓은 듯 그 모든 분주함과는 조금 동떨어진 채 동성은 어찌할 줄 몰라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재현은 동성을 이 동아리에 처음 소개한 것이 자신이었기에 자신이 책임지고 그가 동아리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묘한 책임감에 그에게 다가가
“오늘은 처음 왔으니 내일부터 연습하러 와. 내가 그때 악보 줄게”
라고 하며 정기 연습시간을 알려주었다. 곧 매년 있는 정기 공연이 다가와 당분간은 조금 바쁠 수 있지만, 공연을 끝마치고 무대 위에 서서 환호하는 관중을 보면 분명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라는 성숙한 선배의 조언 한 마디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는 동성은
“혹시 지금 악보 있어요? 다른 부원들은 전부 연습하는데 저만 연습을 게을리할 수는 없잖아요.”
라 물어왔다. 훈이 가끔 베이스를 가져오면 치는 악보가 방 안 어딘가 있던 것 같아 재현은
“여기 어딘가에는 있는 것 같은데 조금 찾아봐야 해”
라고 답하였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동아리라면 으레 그러듯 여기저기에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방 안에서 재현은 악보를 찾는 데 애를 먹었지만, 이리저리 뒤적이다 보니 종이 뭉텅이 속 숨어있던 악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악보를 동성에게 건네주었더니 그의 눈은 둘이 처음 만난 날 재현이 동성에게 처음으로 밴드 이야기를 꺼내왔던 그때처럼 밝게 빛났다. 동성은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찬찬히 훑어보고 동아리 부원들의 연주소리를 들어보더니 혹시 자신도 같이 연주하여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미 오랜 시간 합을 맞춘 부원들과는 달리 오늘 동아리 입부 신청을 한 동성이 하루 만에 같이 연주하여도 되느냐고 물어오자 몇몇 선배들은 그가 그들의 연주에 잘 스며들 수 있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미 바짝 앞으로 다가온 공연 날짜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연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부장의 말에 동성은 베이스를 들었고, 몇 번의 연습 만에 그가 다른 부원들과 연습하기 시작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베이스 연주는 그들의 소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
다가오는 정기 공연에 하루가 멀다하고 학교를 마치면 동아리방에 달려가 해가 서쪽 하늘 끝으로 사라져 갈 때쯤 나오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재현은 하루의 절반을 드럼을 치며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동아리에 채 적응하지 못한 채 이런 극한 일정을 소화해내는 동성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동성은 그의 연주소리처럼 빠르게 동아리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구보다도 동성에게 신경 쓰던 재현은 기뻐해야 마땅했다. 재현도 머릿속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아래 가슴 한편에서는 조금 다른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재현 그 자신도 외면할 수 없었다.
한 달여간 지속되었던 연습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다가온 정규 공연 당일이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공연에 대한 설렘으로 밤을 꼬막 지새워서였을까? 재현은 그토록 기다려온 날, 늦잠을 자고 말았다. 침묵으로 가득한 방에서 눈을 뜨며 재현은 채 잠이 달아나지 않은 정신으로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원래라면 요란한 알람 소리에 불평하며 눈을 떠야 하였지만, 정적만이 가득한 방 안이 어색하기만 하였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발끝부터 올라오며 재현을 얽매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본 시계 속에 비친 시간은 약속 시각보다 늦지만 않고 도착할 수 있다면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결국, 재현은 약속 시각에서 5분이 지났을 무렵, 교문을 막 지나 동아리방 앞에 겨우 도착하였다. 숨을 헐떡이며 동아리방의 문을 연 그를 반긴 것은 바로 베이스를 잡은 동성과 그 옆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훈이었다. 발끝에서 이유를 모를 불쾌한 기분이 그를 타고 올라갔다. 재현을 본 훈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 둘은 멀어졌지만, 한 쌍의 연인처럼 다정하게 붙어있던 동성과 훈의 모습은 마치 재현의 각막에 새겨진 듯 눈가에 아른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였던 둘이 자신도 모르게 친해져서 그러하였다고, 그저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질투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리려 하였다. 하지만 그 장면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훈을 바라보던 동성의 다정한 눈빛이 아른거렸다. 친한 것으로 따지면 초등학생 때부터 붙어있던 훈이 더 할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동성만이 어른거리는 것은 그저 친구 사이의 질투라 생각하기에는 조금 다른 결의 기분이었음을 재현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명확하게 떨어지는 이유였지만, 그가 외면하고 싶었던 답이 모기처럼 그의 귓가에서 앵앵거렸다.
사실은, 그가 동성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올라왔다. 평생을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남자와 서로 사랑을 나눈다고 배워왔고 그러한 모습만을 봐왔던 재현이었기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부정해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삶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동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는 동성을 피해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재현이 그 결심을 한 날이 공연 날이었고 공연 이후에는 동성과의 유일한 접점인 밴드부실에 전처럼 매일 갈 필요가 없었기에 재현이 그의 결심을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공연 전에도 매일같이 동아리방을 지켰던 재현이었기에 전보다는 확연하게 줄어든 그의 방문에 몇몇 부원들이 의아해하기는 하였지만, 재현은 이제 2학년 2학기가 된 만큼 공부에 집중하느라 자주 못 가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앞으로는 정기 연습도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하였다. 어차피 일 학년에 드럼을 치는 친구 한 명이 더 있으니 앞으로는 그 친구가 드럼을 연주하면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가끔 불연 듯 동성이 생각날 때나 동성에게 언제 밴드부실에 연습하러 올 거냐는 연락이 올 때면 그가 부쩍 그리워져 당장에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어졌지만 그를 만나면 들 생각이 무서워 그를 자꾸만 피하게 되었다. 그런 나날이 지속되던 중 하루는 정말로 재현의 결심이 깨질 뻔하였다. 동성에게서 두 번째 연락이 오고 그 연락을 저번에 온 연락처럼 무시해버린 다음 날 재현의 반에 동성이 직접 찾아왔다. 재현이 훈을 보고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익숙한 모습을 보고 급하게 사라져버렸기에 재현은 당연히 동성이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 날 그에게 온 문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형, 저 이제 형 그만 좋아할게요. 형도 저 피하지만 말아주세요.
p.m 5시 20분 서동성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형, 우리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내일 12시에 ㅇㅇ역 앞에서 만나요.
p.m 5시 25분 서동성
몇 분 뒤 문자 한 통이 더 왔다. 오랫동안 고민하였는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문자 내용은 간단하였다. 재현도 그 문자를 보니 그저 이렇게 그를 피해 다니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한 뒤 답장을 보냈다.
그래
p.m 5시 30분 김재현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재현은 어제 왜 자신이 갑자기 그런 답장을 하였는지 후회되어 한참을 소리 지르다가 아침부터 왜 소리를 지르느냐며 엄마에게 큰 소리를 들었다. 동성을 만나려 가야 하는 데다, 아침부터 엄마에게 혼이 나 기분이 안 좋았던 재현의 기분은 창밖을 확인하면서 한층 더 안 좋아졌다. 길고 긴 여름 동안 오지 않았던 비가 그동안 품고 있던 빗방울들을 하루 동안 다 퍼부어내는 듯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전투적으로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비 오는 날 특유의 온몸이 처질 것 같은 습한 공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재현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한 약속까지 지키지 않는 것은 동성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약속장소에 가자 언제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비에 젖은 동성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반가워서, 그리고 젖은 그가 걱정되어 재현은 그가 스스로와 한 약속은 어기고 그에게 걱정 어린 말투로
“오래 기다렸어? 얼마나 기다렸으면 옷이 젖어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하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선배는 그동안 저를 피해 다녔으면서 지금 와서 저를 걱정해요?”
돌아오는 냉랭한 대답에,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그에 재현은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그동안 한 행동이 얼마나 동성을 상처 입혔는지.
“저, 사실 선배를 처음 봤을 때부터 선배가 마음에 들었어요. 학기 중간에 갑자기 전학 오게 되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선배가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동아리도 들어오라고 먼저 말해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어느 순간 선배가 매우 좋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어요. 근데 선배는 저를 그저 후배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제가 제 속마음을 꺼내면 선배와 멀어져만 갈 것 같아서 숨기고 있었어요. 공연이 끝나고 제가 보낸 문자를 보기만 하고 답장을 안 해주셔도 그저 선배가 바쁘다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근데 얼마 전 동아리 정규 연습 때 안 나오시는 선배를 보고, 앞으로 안 오실 거라고 전하는 훈 선배 말을 듣고 알았어요. 선배가 저를 피하고 있다고 제가 무엇을 잘못해서 피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가 저를 피하니 제 마음은 꺼내어 보이고 싶었어요.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아 주세요. 그럼 저는 제 할 말 다했으니 이제 갈게요.”
말을 하면서도 중간중간에 섞여나오는 울음소리가, 말을 하다 감정이 북받쳐올라 우산조차 놓치고도 온몸으로 비를 맞아가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이, 그리고 말을 마치고 매정하게 뒤 도는 그의 모습이, 뒤를 돌면서도 미련이 남아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이 그 모든 모습이 동성이 자신을 얼마나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그리고 재현이 그런 동성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뺨에 뜨거운 물줄기가 흘렀다. 그래서 재현은 융기를 한 번 내보기로 하였다. 지금 그가 하려는 말이 그동안 상처받은 동성을 더욱 상처받게 하는 행동일지도 몰라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지금 용기를 내지 못하면 그가 더욱 상처받을 것만 같아, 더 이상은 동성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동성아...”
재현을 등진 채 오도카니 서 있는 동성의 손을 잡으며 재현이 말하였다.
“나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어서. 처음 느끼는 감정에 설레기도 잠시 이 기분이 너무 무서워져서 그래서 그저 피하기를 택한 것 같아 미안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
하고 싶은 무수히 많은 말이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이 감정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는 동성을 향한 그의 감정을 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결국 입에서 나오는 것은 미안하다는 외마디소리의 돌림노래밖에 없었다. 그 말이 그를 다시 불러올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만을 반복하기를 몇 분, 재현 앞에 한 사람의 인영이 다가왔다.
“저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를 피하는 선배를 보며 선배한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래서 오늘 매정하게 선배와 제 사이를 끊어버리려 했는데 선배가 거기서 그렇게 울고 있으면 제가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떠나요.”
동성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런 그를 보며 재현은 오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어보기로 하였다.
“..!”
자신의 마음만큼,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에게 미안한 만큼, 그를 꽉 껴안았다. 이기적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도록, 그가 어디도 가지 않도록 꽉 껴안았다. 그런 그를 보며 동성은 다시 한 번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재현을 껴안아주었다.
사랑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이 너무 커 상처 주고 상처받은, 하지만 상처받으면서도 이성보다 앞서 달려가는 심장을 이기지 못한 그 둘의 뒤로 언제 그쳤는지 모르는 비가 선물하고 간 무지개가 환하게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