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James Smith, Call Me When It’s Over
W. HOOD
춘추복을 입으면 덥고, 하복을 입으면 시린 계절이 왔다. 회승은 저번 주와는 명백히 다른 아침 공기에 눈을 떴다. 열린 창문으로 미묘하게 가라앉은 계절감이 느껴졌다. 이젠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아침에 목이 아프다. 회승은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킁, 크흠. 잠긴 목을 풀고, 발끝에서 손끝까지 기지개를 쭉 켜면 이제야 슬슬 잠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몸을 쭉쭉 늘이고 나서도 여전히 반쯤 감겨있는 눈으로, 열려있는 방 창문을 꼭꼭 닫아두고. 회승은 화장실로 향했다.
어째서인지 몸이 더 굼뜨게 느껴지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회승은 젖은 머리를 마저 털어냈다. 그 후 식탁 앞에 앉아 뜨끈한 밥 한 숟가락. 가끔은 늦잠을 자고도 싶었으나, 든든한 속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한참 자라날 성장기였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계란말이 한 입. 집밥과 집 반찬이 유독 맛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 한 숟가락. 회승은 시간에 맞추어 울리는 배꼽시계를 달랬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조용한 아파트 복도가 약간의 냉기를 품고 있다. 회승은 손에 든 가디건을 입고 가방을 멨다. 바닥 타일에 운동화가 기분 좋게 달라붙었다. 1층까지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회승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발로 리듬을 탔다. 노래를 아주 작게 흥얼흥얼. 이쯤 되면 나올 때가 됐는데. 회승은 핸드폰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확인하기가 무섭게 삐리릭, 멀리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도 도착했다. 회승은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기다렸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이 등굣길을 걷는, 같은 교복의 그 사람. 열림 버튼을 누르고 마음속으로 7을 조금 빠르게 세면,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살짝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그 사람.
회승은 가볍게 닫힘 버튼에서 손을 뗐다. 옆으로 메는 가방끈을 붙잡고 숨을 고른 후, 활짝 웃어주는 그 사람. 기다려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는, 김재현.
김재현과 유회승은 유회승이 전학 오던 날부터 친해졌다. 마침 그날도 회승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고, 재현이 웃으며 회승에게 고맙다 말했다, 오늘처럼. 재현은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을 보며, 뛰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회승은 그런 재현을 바라봤다. 자기도 한 붙임성 한다고 생각했는데 재현은 사람 자체가 친화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 같았다. 뭐 그래서 어떻게 됐냐 하면, 그 첫 만남을 계기로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학교에 가고, 같은 교복에, 설마 반까지 같겠어? 빙고.
회승은 버스 창가에 앉았고, 재현은 그 옆에 앉았다. 운이 좋게도 자리가 남아있었다. 아침부터 좋은 일이 계속 생긴다. 꼭 이렇게 운이 좋으면 안 좋은 일이 하나씩 생기기 마련이다. 회승은 갑자기 드는 불길한 생각을 털어냈다. 하루가 순탄하게 흘러가기를. 회승은 가방을 앞으로 끌어안으며 앉은 자세를 편하게 바꾼 후, 웃고 있는 재현을 쳐다봤다. 재현의 웃는 얼굴은 세상의 행복을 전부 끌어안은 듯한 표정이라, 회승은 재현에게서 안정감을 찾았다. 그냥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행복은 전염된다고들 하던데 재현을 보고 있으면 사실인 것 같기도 했다.
재현은 회승 말고도 친구가 많았다. 버스 타는 애들은 다 재현과 아는 사이일까? 재현은 인사를 안 하는 친구가 없었다. 덕분에 옆에 앉아있는 회승도 친구들과 머쓱하게 눈인사를 했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트게 된 친구들이 알게 모르게 늘었다. 회승은 전학 온 날부터 쭉 그렇게 익숙해졌다. 학교에, 다른 친구들에게 그리고 김재현에게. 버스가 가득 찼다. 교복이 반, 정장이 그 반의반, 다른 옷이 또 반. 이제는 재현이 아는 척하고 싶어도 못한다. 새로 사람이 타지 못하니까.
안 좋은 예감은 어째 빗나가지를 않는다. 회승은 5교시 시간표를 보고 가방을 살폈다가 사색이 됐다. 체육복을 집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개어만 놓고 가방에 넣지를 않은 것 같다. 곤란했다. 회승이 전학 온 지 겨우 몇 개월이었다. 회승의 반 외에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회승은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 찰나, 회승의 어깨를 재현이 잡았다. 왜 그래? 어, 체육복 두고 왔어. 그럼 내 것 입어. 뭐? 입으라고~ 난 빌리면 됨.
얼이 빠져 있는 회승의 손에 체육복을 들려주고, 재현은 재빠르게 반에서 사라졌다. 회승은 재현이 사라진 쪽을 멍하게 바라봤다. 잡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가버렸다. 사람이 저렇게 착하고 좋을 수가 있을까. 회승은 피실피실 삐져나오기 시작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는 회승의 기분을 대변했다. 회승은 붉어지는 얼굴과 귀를 체육복에 얼굴을 파묻어 숨겼다. 아, 진짜 김재현이랑 친구 못 해 먹겠다.
회승이 재현을 좋아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전학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소리인가. 재현은 반장도 아니면서 회승을 그렇게나 챙겼다. 학교가 어색했던 회승을 여기저기 끌고 다녀준 것이 재현이었고, 제일 먼저 친해진 친구도 재현이었다. 등교도, 하교도 같이했고,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붙어있었다. 솔직히 좋아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루의 절반을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다정하게, 핑계만 떠올라 회승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있다면 재현은 회승을 온전히 친구로 본다는 것이었다. 회승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친구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어떻게 생각하겠어. 회승은 너무 많이 생각해 닳아버린 합리화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재현의 앞에서는 무덤덤하게 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멋대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마음마저 다 말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현과 멀어지게 된 후를 생각하면 아찔해져서 고백이 나오려다가도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답답한 건 싫으니까. 시원하게 말해버리고 싶었다. 나 너 좋아해, 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한 마디.
하지만 잠시 보류했다. 잠시일 뿐이다. 아주 잠시. 재현과 지내는 동안 편해졌던 학교생활은 재현과 불편해지면 모든 것이 불편해질 것 같았다. 적응은 재현이 도와줬고, 그래서 재현이 전부였다. 재현이 아니라면 전학 온 첫날처럼 돌아가 버릴 것 같은 착각, 아니 현실. 어쩔 수 없었다. 재현과 관련된 것만이 주위를 맴돌았으니까. 회승은 김재현의 이름이 박힌 어두운 남색 체육복을 내려다봤다. 흰색으로 또렷하게 박음질 되어있는 김재현. 이제는 옷마저 김재현의 것이었다. 허, 하고 회승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김재현은 알까. 다들 열심히 자습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회승의 머릿속에는 재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회승은 김재현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눈빛에 재현이 뒤를 휙 돌아볼 정도로.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완전히 뒤돌기 전에 회승이 고개를 내렸기 때문이다. 재현은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내리고 다시 풀던 문제집으로 주의를 돌렸다.
시간이 회승에게는 아주 느리게 흘렀다. 의미 없는 낙서, 푸는 시늉만 한 문제들. 집중력이 저 밑까지 바닥나 있었다. 재현을 다시금 바라보다가, 선생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집중이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요, 회승은 눈가를 문지르며 다시 책을 봤다. 선생님께 호된 눈빛을 받는다 한들 집중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늘 하기로 했던 분량은 절반도 끝마치지 못했다. 회승은 그 자습 시간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뒀다. 한 번 흐트러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재현이 곁에 없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사실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였나, 늘 김재현과 같이하던 하굣길을 혼자서 가보고 싶어졌던 게. 회승은 혼자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가 빨리 와야 김재현 없이 집으로 갈 수 있을 텐데, 혼자서 걷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텐데.
평소에는 반에서부터 같이 나와 정류장으로 왔었으니까. 회승은 모든 것이 낯섦을 느꼈다. 김재현을 보느라 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까지 흐렸었구나. 김재현에게 집중하느라 버스 정류장 근처 나무의 이파리가 붉은색으로 물든 것마저 몰랐었구나. 발에 채이는 낙엽의 감각조차 너무도 낯설었다. 싸늘함만으로 계절감을 느꼈던 회승은 낙엽 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이 왔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회승은 마음을 정리했다. 재현과 회승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몇 차례 지나갔다.
기다리길 한참, 재현은 버스 정류장에 기대어 서 있는 회승을 보고 바로 달려왔다. 회승과 같이 집에 가려던 재현은 회승이 반에 없다는 것을 알고, 회승을 기다리다가 전화를 걸었다. 먼저 갔을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지, 재현은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서늘한데 밖에서 오래 기다렸다면 얇은 가디건만 걸친 회승이 추울 것이다.
재현은 회승이 밖에서 오래 기다려 볼이 새빨간 것을 알았다. 하지만 회승의 미묘한 변화는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 더 단단해진 눈가와 긴장한 듯 떨리는 마음은 눈치채지 못했다. 볼의 불그스름함도 날씨 탓이 아닌 것을 몰랐다. 회승은 그런 재현의 생각마저 다 알았다. 재현의 표정, 눈빛에서 모든 것을 읽었다. 여전히 재현에게 있어서 자신은 친구임에도 회승은 입을 뗐다. 나 너 좋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