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차훈은 아침마다 제 자신을 원망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구체적이게 말하자면 7시에 설정해둔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에 기상하는 제 자신을 원망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랬던가. 이 놈의 지겨운 회사 곧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아침마다 꼬박꼬박 착실하게 회사로 출근도장을 찍는 차대리는 곧 입사 5년 차를 고지에 두고 있었다.
감은 두 눈 위로 쏟아지는 태양 빛. 있는 대로 인상을 써가며 눈을 뜬 뒤 하는 행동은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는 것. 6시 54분. 알람이 울리기 전 조금만 더 자볼까하는 여유도 부리지 못하게 만드는 애매한 시간. 어김없이 찾아온 오늘에 한숨이 섞인 욕지거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안 그래도 탐탁잖은 회사생활에 더욱 정이 떨어진 이유는 몇 달 전 새로 부임한 이팀장의 존재에 있었다.
전생에 이팀장에게 원한을 크게 산 것이 분명하다고 의심할 정도로 이팀장은 훈을 아주 못살게 굴어댔다. 전생에 이팀장을 담보 삼아 나라라도 팔아넘긴 게 아닐까. 그렇게 못 되게 군 업보가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라고 굳세게 믿는 것은 이팀장이 훈에게 하는 꼬락서니를 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분명 자기 밑에서 대신 일을 봐줄 팀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일을 훈에게 토스하는 것은 기본, 메일 한 통으로도 해결 가능한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아가며 훈의 말꼬리를 덥석덥석 물고 늘어져 댔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냥 '재수'가 없는 놈이었다.
훈은 생각했다. 오늘도 그 재수 없는 놈이 이상한 사유를 빌미로 개새끼가 왕왕 짖어대듯 군다면 참지 않겠다고. 아침부터 떠오르는 이팀장의 그 웃는 얼굴에 한숨이 깊게 팬다. 그 와중에 언뜻 스쳐 지나간 생각은 이러했다. 남은 월차가 몇 개였더라...
훈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와 동시에 이번 달에 나가야 하는 카드값을 빠르게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노비가 평화를 꿈꾸다니. 배가 불렀지 배가 불렀어. 하며 마른세수를 연거푸 해댔다. 물에 젖은듯 온 몸이 무겁기만하다. 아무래도 이팀장놈이 넘긴 일들을 해치워대느라 한 염병할 야근이 화근인 듯했다. 그렇게 이불 속에서 5분이 흐르고, 맞춰두었던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는 것을 끄고 나서야 몸을 둘둘 말고 있는 포근한 이불을 이팀장이라고 생각하며 거세게 걷어찼다. 찬 겨울 날씨를 증명하듯 훅 들어오는 냉기에 몸을 떨었지만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꽤나 포근하여 금방 또 기분이 좋아진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애써 마음을 달래가며 기지개를 켰다. 날씨라도 좋아야지 기분이 덜 우울할 듯 싶었다. 띵- 잔뜩 구겨진 마음처럼 주름진 이불을 정리하던 중 울려 퍼지는 유쾌한 메시지 알림소리. 왠지 불안한 예감이 순식간에 훈의 주변을 에워쌌고 슬픈 예감은 역시 틀리는 법이 없었다.
[훈씨. 굿모닝. 아침에 오면 내 자리 좀 청소해놔요.]
와. 날씨, 참 더럽네.
2.
"… 차 대리님, 화 많이 나신 것 같죠….?"
"응, 건들지 말자고."
직원들끼리 암묵적으로 훈이 화난 것을 아는 것만큼, 훈은 표정에서부터 ‘나 많이 심기 불편해요.’ 하며 말하고 있었기에 애꿎은 직원들만 아침부터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그러나 직원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왜 심기가 불편한지. 늘상 그랬다지만 오늘따라 그의 얼굴에 져 있는 그늘이 더욱 짙었다. 아마 또 이팀장님이시겠지. 직원들은 서로 조심하자며 사인을 주고받았다.
회사에 영혼을 담지 않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마 이팀장의 부임 시기와 비슷할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훈은 아침부터 기분이 아주 엿 같았다. 억지로 기분 좋은 척 자기 암시를 하던 중에 자리를 치우라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와 그 개소리에 장단 맞추며 그의 어지러운 책상을 치우는 제 자신이 매우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훈은 이 사회구조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며 욕을 씹어댔다.
그러나 실컷 자리를 청소해두었더니 웬걸, 중요한 서류가 없어졌다며 훈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훈은 오늘이야말로 품에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낼 날이라고 단정 지었다. 당장 회사를 그만 두어야만했다. 그래야 이 더러운 기분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스쳐 지나가는 카드내역서. 결국 훈은 이팀장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152 번째 대처법 매뉴얼대로 억지로 웃어가며 사람 좋은 '척'을 해댔다.
오늘 하루도 아주 길 예정이었다.
3.
"지가 사장이야? 지가 대표냐고. 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한가로운 오후 열두시. 훈이 아무도 없는 회사 로비 소파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들고 고개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후 열정적으로 욕까지 씹으며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다. 누군가, 라고 표현하기에는 그 주체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설명되었지만.
‘뭐가 그렇게 짜증이나. 그 사람도 너 재수 없어 하지 않겠어?’
"지가? 지가 뭔데."
'아무리 그래도 팀장한테 지가 뭐야. 훈아.'
화가 잔뜩 나고 심통이 난 훈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예삿일이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받아치며 곧 바쁘다며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무심하게도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야! 김재현! 하며 소리쳐봤지만 이미 꺼져버린 휴대폰의 화면은 잔뜩 피곤함이 드리운 훈의 얼굴만 비출 뿐이었다. 전화기 홀드를 신경질적으로 끈 뒤, 손에 남아있는 샌드위치를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누구에게라도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직원들에게 말해 봤자 제 이미지만 안 좋아질 것이고, 친구라는 사람은 귀찮다며 전화도 끊어버리고. 소파에 축 늘어지듯 힘을 빼고 누운 훈이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그 미친놈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람. 감정 소비했어. 천장을 향해 젖혀져 있는 고개 탓에 눈두덩이 위로 형광등의 빛들이 잔뜩 내려앉았지만 이내 검게 어두워졌다. 뭔가 싶어 눈을 떠보았을 때, 하마터면 입안의 잔여물들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릴 뻔한 훈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으악!"
"우와악!"
제 머리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팀장의 얼굴에 훈이 깜짝 놀라며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켰다. 귀신처럼 조용히 제 위에서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에 한번, 그것이 이팀장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란 훈이 손에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바닥에 엎었다. 아까워. 두 모금밖에 안 마셨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옛말 하나도 틀린 것 없다는 것을 몸소 경험한 훈이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게다가 하마터면 샌드위치도 씹고 제 혀까지 씹을 뻔한 것에 훈이 안도했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소리를 지른 자신에 놀라서 같이 놀란 승협이 훈의 옆에 털썩 앉았다. 바닥에 엎은 아메리카노 때문에 혹여나 바지에 커피가 튀었을까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는 훈에게 승협이 조심스럽게도 말을 걸었다.
"저 때문에 놀란 거예요?"
"… 네."
훈은 그 짧은 찰나에 그럼 이 넓은 곳에서 당신보고 놀라지. 뭘 보고 놀라? 뜬금없이 형광등 보고 놀라진 않을 거 아니야. 하는 생각에 입을 세모 모양으로 일그러트렸지만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을 했다.
"죄송해요. 커피 다 엎었죠? 다시 사줄 테니까 가요."
"아, 괜찮… 네, 가요."
속으로 이리저리 승협을 물어뜯고 있는 훈과 달리 호의적인 승협의 태도에 살짝 망설이던 훈이 아무렴 공짜 커피에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벽을 두어봤자 뭐하나 싶어 못 이기는 척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지 위로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툭툭 털어내며 핸드폰과 쓰레기들을 챙기는데, 벌써 저만치 혼자 걸어가고 있는 승협의 뒤통수가 보인다.
어쩌면 뒷모습도 저렇게 재수가 없을까. 하며 그 뒷모습에 대고 괜스레 훈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순간 멈춰 서 뒤를 도는 승협 때문에 얼른 들었던 손을 내린다. 본 건가 싶어 괜히 침이 꿀꺽 넘어갔지만, 승협이 하는 말은 얼른 따라오라는 재촉하는 말이었다.
지가 먼저 가놓고.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먼저 자신에게 제안한 사람은 승협이지만 커피를 사주겠다는 말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먼저 앞장서서 로비를 벗어나기에, 훈이 구시렁거리며 재현을 욕하다가 결국은 승협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훈 씨."
"네?"
"제가 맘에 안 들어요?"
"윽."
홀짝거리며 ’공짜 커피’를 마시던 훈이 승협의 뜬금없는 질문에 습격당했다. 뜨거운 커피를 입속으로 부어 넣는 바람에 입안을 전부 데어 버리고 말았다. 훈이 인상을 있는 대로 써가며 온몸으로 뜨거움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던 승협이 베싯, 웃으니 그걸 또 듣고는 눈을 부릅뜨고 승협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억지로 웃음을 삼키는 승협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에 흘린 커피를 닦아주고는 괜찮냐고 물어오는 것이 퍽이나 다정하기도 했다.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냐 싶어, 승협의 손에 들려있는 손수건을 낚아채서는 제 입가와 손등을 닦고는 다시 승협에게 건네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던 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었던가. 싶어 눈을 굴리던 훈이 입가를 닦다가 승협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커피까지 사주겠다며 선심을 쓰는 것을 생각해보며 그에 대한 거리감을 점차 좁혀 갈까 싶었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자꾸만 비집고 올라왔다.
"맘에 안 들다뇨. 전혀요. 너무 좋은데요."
속에도 없는 말을 하기엔 아직 조금 무리였지만, 사회생활에서 이쯤이야 별것 아니니까. 굳은 입 꼬리를 한껏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자신을 따라 웃는 승협의 시선을 피한 채 다시 제 손에 들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혓바닥이 온통 데인 탓에 커피 맛을 제대로 느낄 순 없었지만.
"뭐, 없으면 말아요."
"그, 저."
먼저 들어갈게요. 하며 훈의 말을 뚝 자른 승협이 아까처럼 또 혼자 휘적휘적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 내부로 들어가는 승협을 멍하니 보다가 이내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것에 훈이 욕지거리를 씹으며 저 멀리 사라져가는 승협 향해 제대로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그 뒤를 쫓아 쿵쾅쿵쾅 쫓아 들어갔다. 사람이 어떻게 된 게 혼자 말하고, 혼자 들어가고. 잠깐 곱게 본 내가 머저리지. 등신이지. 곱게 볼 게 따로 있지 정말. 해가며 아직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다 마셔서 비어있는 컵을 휴지통에 휙 던지고 부서실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기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 그 잘난 재수탱이가 앉아있을 팀장실 문 앞에 서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4.
훈은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토록 재수 없어 하던 이팀장과 덜덜 떨며 퇴근길을 함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겨울은 잔잔하다고 생각할 무렵,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예쁜 쓰레기가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창문에 달라붙어 카메라로 연신 사진촬영을 해댔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눈보라에 슬슬 웃음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폭설경보 안내문자가 떴고, 조기퇴근까지 하게 되었지만 이미 길과 도로들이 꽝꽝 얼어버려 조기퇴근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버스와 택시는 보이지도 않고 도로 위에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차 행렬만이 반겨주고 있었다. 다들 지하철을 타겠다고 할 테니 지하도의 상황은 굳이 가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인 훈은 차라리 삼십 분을 기다리든 한 시간을 기다리든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눈보라를 헤치며 걸었다.
찬 바람에 얼어붙은 뺨을 손으로 감싸며 택시정류장에 도착했을 즈음, 익숙한 뒷모습에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상황판단을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늘 자차로 이동하던 이팀장이었다. 아까도 분명 되는대로 차를 끌고 가겠다며 급히 빠져나갔었는데...
다시 돌아갈까. 지하철 타러 갈까. 차라리 회사에서 잘까. 그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을 하던 중, 뒤를 돌아보던 이팀장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뒤통수에 눈이 대여섯개 달린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독심술사라거나. 어느 쪽이든 사실이어도 별로 놀랍지도 않을 사실이었다.
"훈씨?"
5.
그렇게 썩 내키지 않는 상황에 놓여버린 훈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댔다. 지금이라도 회사로 돌아갈까. 지금쯤이면 지하철에 사람 많이 없지 않을까. 하며. 그렇게 이팀장과 별 다른 이야기는 않은 채 택시 줄을 서 있는 중이었다. 대 여섯명이 기다리고 있는 택시줄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어 이팀장의 차례가 될 때까지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빨리 택시가 와서 그를 데리고 떠나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정적이 싫지만은 않다고 느끼던 중, 뜬금없는 말을 건네온다.
"훈씨는 제가 왜 싫어요."
그걸 몰라서 묻냐. 이유라고 함은 삼일 밤낮을 새서라도 늘여놓을 정도로 많은데 물어 뭐해.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카드내역서를 생각하며 겨우 눌러 참아야했다. 훈이 거짓말을 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술을 꾹꾹 눌러 씹는 것. 그 행동을 이팀장 뒤통수에 대고 하며 대답했다.
"네? ... 안 싫다니까요."
"안 싫어요?"
괜히 자기를 멕이기 위해 묻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싫어하는 건 지가 더 나를 아니꼽게 보고 있으면서. 또 자기는 미움받기 싫다 이건가. 괘씸한 마음에 둥근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훈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아닌 복수였다. 복사 3부 해와라. 5부 해와라. 3부 더 해와라. 같은 일만 여러 번 반복하게 만들고, 미팅갈 때면 무조건 훈을 불러 동행했다. 아침에 일찍 나와 자리 정돈을 부탁했고, 무슨 일만 있으면 훈을 부르기 바빴다. 정작 자기 팀원들은 근무시간에 여유부리며 커피까지 마시는데 훈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승협의 옆에 붙어있어야했다.
그렇게 싫어하는티 팍팍 내놓고서는 왜 싫어하냐고 묻다니. 염치가 없더래도 적당히 없어야지. 이 정도는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생각한 훈이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그 뒤에 따라붙을 대답은 예상도 못한 채.
"팀장님이야말로 저 싫어하시는 거 아니세요?"
"전 좋아하는데."
"그래요. 좋아... 네?"
"어, 택시왔다. 먼저 타요."
"아니."
"조심히 들어가요."
어영부영 택시에 올라타버렸다. 전에 들어본 적 없던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스치듯 한 말에 메아리가 낀듯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댔다. 전 좋아하는데. 전 좋아하는데. 전 좋아하는데... 그 목소리를 타고 올라오는 겨울향. 어두운 하늘임에도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덕분에 찰나였지만 시야에 잡힌 얼굴이 너무도 잔상이 크게 남은 탓에 손끝이 뜨거워진다. 미쳤나보다. 결국 제대로 미친 게 분명하다. 대략 5분 전까지만 해도 속으로 온갖 욕은 다하게 만들어놓고는 진짜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잘도 내뱉어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좋아해요.’
택시 안의 적막함을 덜어내기 위해 틀어둔 듯한 라디오 안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에 훈의 숨이 덜컥 주저앉았다. 눈이 느리게 끔벅였다. 멍하니 머리를 택시 창문에 기대고서 눈이 아주 더 쏟아부어 내일 출근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빌기 시작했다.
역시, 오늘 사표를 내고 왔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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