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틈만 나면 집 안을 울리던 기차 소리가 요 근래 들리지를 않았다. 바다를 옆에 낀 해안 철로를 십 년 넘게 달려 대던 기차였다. 재현과는 거의 칠 년을 인사했고. 어른들 말로는 교통편 좋은 곳에 고속도로 하나가 새로 뚫리면서 이쪽 노선은 완전히 폐지됐다나 뭐라나, 재현은 그런 소식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기차가 더 이상 철로를 지나가지 않는다는 소리인 건 알았으니- 봄 되면 철로 근처에 핀 민들레 따다가 불어 볼 수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했을 테다. 전학을 왔던 초등학교 이 학년 시절, 동급생들에게 서울 깍쟁이 소리를 듣던 것도 잠시 재현은 이제 시골 소년이 다 되었다. 작열하는 산등성이의 태양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나, 계곡을 한참 돌아다녀 흙이 잔뜩 묻은 발바닥이나. 누가 찾기 어려울 정도로 꽁꽁 숨어 있는 마을에서 재현은 즐겁게도 자랐다.
동네 청소년 대표 승협은 기차가 이 근방을 지나지 않게 된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고 했다. 읍내로 학교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면서. 사실 처음에는 그저 핑계인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바쁘긴 한가 보다 싶었다. 놀아 주지도 않는다고 심술부렸는데 고등학생은 뭐가 엄청 다르구나- 재현은 괜스레 사과 하나 건네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승협이 형 출세하면 사과도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재현뿐만 아니라 동네 중학교를 다녔던 스물두 명의 학생들은 전부 다 승협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중학교 학생회장 이승협'은 동네 꼬마들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십 미터 날아가는 비행기도 접을 줄 알고, 다같이 분식집으로 데려가 떡볶이를 사 주기도 하고, 읍내에서 제일 간다는 고등학교에서 전교 일 등을 먹기도 하고. 재현은 그런 승협을 여느 꼬맹이들처럼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워했다. 중학교 이 학년, 그 나잇대 자연히 많아지는 생각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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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는 주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 한 컵을 비우고 바닷가로 뛰어나가 온종일 수영하고 노는 주말. 재현이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거의 해 질 무렵이었다. 늘 그랬듯이 집 가는 길 위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는데, 회관 쪽이 요상하게 어수선했다. 평소라면 나이 드신 분들이 이따금씩 출입하는 곳이라 시끄럽거나 산만한 적이 없었을 테다. 호기심이 동한 재현은 회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 오늘이 재미있는 하루로 탈바꿈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을회관 앞에는 이장님과 늘상 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계셨다. 재현이 좀 더 가까이 가 보니 그 중앙에 삐죽 솟은 승협의 얼굴이 보였다. 와, 승협이 형은 키도 크고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선만큼은 이리저리 바삐 굴리는 재현이었다. 그때, 문득 인파 사이로 빼쭉- 새카만 정수리가 눈에 띄었다. 누구지, 회승이는 얼마 전에 염색한다구 했는데. 동성이는 아직 키가 저만큼 안 큰데. 재현이 고민하는 사이 승협이 재현을 발견하고 다가와서는 인사했다. 옆에는 그 새카만 정수리의 주인을 끌고.
-재현아, 인사해. 너랑 동갑. 오늘 이쪽으로 이사 왔대.
-어, 어어... 안녕?
-잘 지내 봐, 이름은 차 훈.
차 훈... 입속에서 굴리는 이름의 울림이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괜히 어색한 느낌에 땅을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 훈의 눈을 마주치니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재현이 고장난 채로 인사를 건네며 자기는 김 재현이라고 소개하자 훈의 동그랗게 뜬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못마땅한 듯했다. 그게 못내 신경 쓰였지만 재현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재현이 다시 훈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니 눈매가 꽤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조금... 무서운가? 아니다, 무섭지는 않다. 재현은 멀어지는 훈의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쭉 옮기며 역시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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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나 몰라?
-무슨 소리야,
-...됐어.
이런 적 없는데. 이상하게 밀려드는 어색함에 훈과는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런 훈이 대뜸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재현의 낯빛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안 그래도 익숙한데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는 탓에 머리 아파 죽겠고만, 어디서 저를 본 적 있냐고 묻고 싶었으나 훈은 제 할 말만 하고 금세 사라져 버렸다. 가만히 남겨진 재현은 끄응, 하고는 곰곰이 기억 저편을 더듬을 뿐이었다. 저렇게까지 묻는 걸 보면 분명 아는 사람일 텐데, 당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한참을 멍청하게 서 있던 재현의 뒤로 누군가 걸어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재현이 뒤를 돌아보니 승협이었다. 이 시간에 웬일로 학교에 안 있고. 그런 재현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승협은 슬 웃으며 오늘이 개교 기념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훈이 데리고 읍내에나 나갔다 올까 생각 중.
-어?
-너도 같이 갈래?
그새 승협과 훈은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재현은 방금 전, 짐짓 언짢은 표정으로 제게 뜬금없는 걸 묻던 훈의 얼굴을 떠올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난 안 갈래. 어색해. 그러자 승협은 놀란 눈이 되어 되물었다. 네가? 천하의 김재현이 누굴 보고 어색하다고? 그래, 그러니까 재현 스스로도 이상했다. 제가 누굴 어색해할 리가 없는데, 그 고양이처럼 생긴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면 괜히 시선을 다른 데로 피하게 되고 얼굴도 이상하게 홧홧해지는 게-
-역시 안 갈래.
승협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얼굴에 "진짜 안 갈 거야?" 가 써있는 것 같았지만 재현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아마 승협이라면 저 아니어도 회승이나 동성, 혹은 다른 마을 꼬맹이들을 어떻게든 꼬셔서 같이 데리고 나가겠지. 왠지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재현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언덕길이 높고 험준했다. 잘 떨어지지도 않는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기는 게 다였다. 평소 같았으면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고 풀섶에서 잠자리 한 마리 요령껏 잡아올려 동성이 겁 줄 생각이나 했을 것이다. 그냥 같이 갈 걸 그랬나... 재현은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제 방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중얼댔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아냐, 안 가길 잘 했어- 되뇌는 것이었다. 재현도 제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깟 어색함 따위가 뭐라고, 그게 뭐라고 집에 왔을까 후회하다가도 집에 잘 왔다고 위안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때 읍내 나가는 길목으로 기다란 인영이 모습을 비추었다. 이제 저 뒤로 꼬맹이들이 우르르 따르겠지, 피리 부는 소년이 따로 없겠어. 재현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몇 초 뒤 펼쳐질 광경을 미리 그려 놓았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승협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재현은 산기슭에 있는 제 집에서 저 아래 이장님 논두렁까지 쭉 달려나갔다. 몇 분 안 돼서 읍내 가는 버스가 도착할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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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몰아 쉬며 땀이란 땀은 다 흘리는 재현을 승협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옆에는 훈이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재현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그냥 따라갈래, 집에 있으니까 심심해.
-어... 그래. 근데 너, 버스비는 가지고 나온 거야?
-아차!
재현은 승협 옆에 서 있는 훈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저를 비웃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실제로 훈은 무표정이었다. 재현은 괜히 찔려 큼큼 헛기침을 해 댔다. 승협도 버스비는 딱 자기 탈 만큼만 챙겨 왔다고 했다. 읍내에 도착하면 카드를 쓸 거라고. 그렇게 한참을 쩔쩔맸을까,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훈이 입을 열었다.
-어떡할래, 버스 금방 올 텐데.
-어...
-한 번 놓치면 오늘은 버스 못 타는 거, 네가 더 잘 알지?
-어어...
-늦으면 먼저 타고 간다.
재현은 전속력으로 뛰었다. ○○중학교 50m 달리기 전교 일 등의 실력을 발휘하며 눈썹이 휘날리도록 집까지 달렸다. 저금통을 탈탈 털어 버스비 1100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읍내 놀러 나가는 게 낙이었던 재현에게 버스 시간표 외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삼 분 뒤에 버스가 올 것이다. 어쩌면 조금 일찍 도착할지도 모른다. 망했어, 망했어! 꿀꿀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며 애지중지했던 저금통을 까 뒤집으니 딱 천 원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급한 대로 거실에서 라디오를 켜 놓고 낮잠 자던 누나에게 백 원을 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자는 거 왜 깨우냐는 짜증만 한 무더기 받았을 뿐이었다. 어찌저찌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간 오십 원 두 개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삼 분하고도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재현은 허무한 걸음으로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버스, 먼저 타고 갔겠지. 이걸로 김씨 아저씨네 가게에서 쭈쭈바나 사 먹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재현이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가게가 아닌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하는데 웬걸, 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탁탁탁 떠는 인영이 남아 있었다. 훈은 성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것 같은 얼굴로 뭐라뭐라 말을 했다. 다만 하드 바를 입에 물고 있는 탓에 재현으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으허이 헝응 엉허 가허.
-뭐라고?
-아니, 승협이 형은 먼저 갔다고. 누가 불러서!
-엥?
-미안하다구, 여기서 기다리면 재현이 올 거라고 하면서 아이스크림 하나 물려 주고 내뺐걸랑.
-어...
-아무튼, 너 땜에 버스 놓쳤으니까 동네 구경이나 시켜 줘.
-어?
훈은 이 동네에 이사온 이래로 한 번도 마을 전체를 돌아다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집이나 집 근처, 마을회관, 승협의 집 앞, 아니면 김 씨 아저씨네 가게. 이 동네라면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곳까지 다 아는 재현은 동네 구경 시켜 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금방 신이 나서 앞장섰다. 나하고, 회승이하고 또 동성이만 알고 있는 비밀 아지트가 있는데 구경시켜 줄게! 따위의 자랑을 종알종알거리기도 했다. 훈은 이따금씩 피식피식 웃으며 재현의 신난 어투에 동조해 주곤 했다.
그랬는데 비가 쏟아졌다. 8월 중순은 예고 없는 소낙비가 허구한 날 쏟아지는 계절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허공에서 축축하고 습한 비 냄새가 올라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너무 신났던 것이다. 쫄딱 젖은 둘은 급한 대로 다시 버스 정류장 안에 뛰어들어가 비를 피했다.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꼭 쥐어짜던 훈이 이번에는 진짜로 재현을 흘겨보았다.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을 흔들어 털던 재현은 내심 미안한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잖아...
-괜찮아, 이런 비는 좀 있음 금방 개니까.
재현의 위로 아닌 위로를 끝으로 정적이었다. 제가 훈과 어색한 사이였음을 다시금 상기한 재현이 슬쩍 옆을 돌아보니, 훈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린 양 생각에 잠겨 있었다. 틱틱거리고 차갑기만 한 줄 알았는데, 지금 얼굴은- 그닥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었다. 또, 이제 보니 속눈썹이 꽤 길었다. 피부 하얀 건 알고 있었지만서도, 지금은 비에 젖어 색이 진해진 까만 머리카락에 대비되어 유독 더 새하얘 보였다. 입술도 되게 빨갛고, 확실히 익숙한 실루엣인데...
재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얼굴이 또다시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무슨 사람 얼굴을 관찰하고 난리야. 그 와중에도 훈은 옆에서 누가 뭘 하든 말든 알아챌 기미가 없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구름이 이제껏 삼켜 왔던 물기들을 하염없이 쏟아내는 중이었다. 흙이 질펀해지고 개구리가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거, 쉽게 그치지는 않겠는데. 물론 재현은 사색에 잠긴 훈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다짐이 삼 초만에 깨졌다는 것이다. 겁도 없이 버스 정류장 앞을 풀쩍풀쩍 뛰어가는 초록 개구리를 재현이 기다렸다는 듯 움켜잡았다. 그래, 이거지.
-악! 뭐야!
-개구리 처음 보시나-
-야, 놀랐잖아!
-너 근데 방금 소리지른 거 되게 고라니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비는 두어 시간을 더 기다려서야 그쳤다. 구름에 가린 해가 일찍 저물어갈 때쯤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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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에 누가 해바라기 심었대, 하는 소문은 어느새 퍼져나가 재현이 있는 산기슭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에이, 말도 안 돼. 생각하면서도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이 커다란 재현의 호기심 탓이었다. 그래, 인간한테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없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거야. 재현은 맞는 말일지도 모를 합리화를 하며 훈에게 기찻길 해바라기를 보러 가자고 말할 계획을 세웠다. 어색함이 대강 지워지고 나서 재현은 온통 훈 생각뿐이었다. 어딜 놀러갈 때도 집에만 박혀 있으려고 할 훈을 어떻게든 불러낼 궁리를 하느라 들떠 있었고, 맛있는 걸 먹을 때도 비닐에 싸서 훈네 집에 가져다 줄 생각만 가득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고, 나눌 수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엄청 잘 맞는 친구를 만났다는 기대감이었다, 아니, 재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훈아, 글쎄- 누가 안 쓰는 기찻길 옆에 해바라기 심어 놨대!
-응, 씨앗 심었으면 아마 지금쯤 새싹 일 센치 정도 자랐겠네.
-아니이, 그게 아니고! 해바라기 꽃을 사다가 심어 뒀다는 거야,
사실 재현도 누가 꽃을 사다 심었는지, 모종을 사다 심었는지, 아니면 훈 말대로 씨앗을 사다 심었는지에 관한 자세한 소문은 듣지 못했다. 어떻게든 훈을 꼬셔 기찻길에 데려갈 꿍꿍이로, 입에 발린 말과 약간의 허풍을 적절히 섞는 기술을 연마하게 되었을 뿐이다. 재현은 약속을 받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훈의 말을 빌려, 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 싸인 증명까지 하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다다음 날 오후 네 시에 보자는 꼼꼼한 일정을 걸고서야 떠나갔으니까. 데려온 고양이와 함께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훈에게는 불청객 같은 손님이었다. 다른 애들이 놀자는 것도 다 거절했는데, 집에 있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훈의 입가에는 한참 혼자 있었을 때와는 다른 상기된 표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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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걸으라니까- 뛰지 말고!
-안 다쳐, 괜찮- 으악!
-거 봐,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재현이 철로 왼쪽 부근 레일에서 외줄타기를 하듯이 뛰어다니다 결국 넘어졌다. 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과 걱정스러운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은 돌바닥에 살짝 쓸린 무릎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마구 뛰어도 안 넘어지는 균형 감각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런 균형 감각 따위 젬병이라는 사실만 알린 격이잖아. 재현이 뒤를 돌아보니 한참 뒤에서 조심스레 따라 붙던 훈이 철로에서 내려와 재현이 있는 쪽으로 다급하게 달리고 있었다. 뛰는 것도 어째... 고라니 같지. 재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픽, 웃자 훈이 성질 난다는 듯한 말투로 화답했다.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덜 넘어졌지,
-어, 좀 그런가 봐.
-제대로 넘어지기 전에 천천히 가, 천천히.
-알겠어요, 재현이는 말 잘 들을게요~
-윽, 3인칭 그거 하지 말라고! 근데, 그래서 해바라기를 심어 놨다는 덴 어딘데?
-음... 아직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한참 먼 데를 바라보는 재현이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훈이 재현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하도 휘청거려서 불안하니 걷는 데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재현이 활짝 웃으며 그에 답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철로 하나, 사람 둘, 완벽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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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걔, 이게 해바라기야?
-응, 이거 해바라기. 완전 누가 봐도 새싹처럼 생겼지?
-꽃 심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서 말하더니.
-그게...
흙더미 위로 초록 잎 두 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 부근에 그런 새싹들이 가득한 걸로 보아하니 나중이 되면 해바라기 밭이 펼쳐질 것 같았다. 해바라기 씨는 심고 두 달쯤 지나면 꽃이 피니까 그때 되면 또 보러 오자고 말하면서도 비죽 솟아오른 해바라기 싹이 귀여워서, 아무도 없는 넓은 철길에 너하고 나만 있는 게 좋아서. 재현은 한참을 쪼그려 앉아 해바라기 싹들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곡소리를 내고 일어서며 스트레칭을 하려던 훈도 재현이 그대로 앉아 있자 다시 털썩, 옆에 앉았다. 별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어색하지 않은 건 기분 탓이었을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질 때쯤에서야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 가서 저녁 먹어야지- 옆에서는 슬슬 다리가 저린 훈도 몸을 일으켰다. 일으켰는데, 너무 오래 쪼그려서 앉아 있던 탓인지 중심이 기울었다. 앉은 채로 휘청거리며 넘어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다행히도, 왔던 길을 되돌아보던 재현이 때맞춰 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빠른 재현은 거의 바닥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인 훈의 오른쪽 손을 잡아 주었고. 다리가 풀린 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꼴이 되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야, 괜찮...
재현의 머릿속에 스치는 순간이 있었다. 훈의 얼굴이 역광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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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같은 꿈을 꿨다. 꿈에서 재현은 어려져 있었다. 눈높이를 보니 일고여덟 살 정도. 아직 시골에 이사 오기 전인 것 같았다. 어릴 때 살던 동네 풍경이 나오고, 이름모를 또래 아이들과 왁자지껄 거리를 지나다 보면 놀이터 하나가 자리했다. 동네에서 가장 큰 놀이터였다. 그곳은 항상 아이들로 북적거렸고, 그네에는 타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다만, 구석 모래밭에서는 혼자 쪼그리고 앉아 모래를 만지작대는 아이가 있었다. 어린 재현은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그 아이가 보이면 곁으로 향했다. 다 큰 재현이 꿈에서 깨고 나면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꿈 속의 아이에게 이름을 물으려고 하면 재현은 번번이 꿈에서 깨고 눈을 떴다는 것이다. 까만 머리카락, 약간 마른 체구, 흰 피부, 보이지 않는 얼굴, 모래놀이와 식물 기르기를 참 좋아하던 이름 모를 꿈 속의 그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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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은 어김없이 눈을 떴다.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꿈은 손으로 쥔 모래알처럼- 스며들듯 빠져나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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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은 말할 수가 없었다. 처음 재현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부터, 저를 진짜로 모르냐는 질문을 했을 때도, 개구리 따위를 내밀었을 때도, 해바라기 심은 데에 저를 데려갔을 때도. 제겐 인생의 삼 분의 일 가까이를 차지하는 기억이 남에게는 스쳐지나가는 우연이었을 뿐이어서 화를 낼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잊힌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네게 존재하는 또 다른 찬란한 기억들이 수없이 옛 기억들을 덮어 나갔을 뿐이겠지.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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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이런 애랑만 노냐?
-맞아, 맨날 우리만 두고 어딜 가나 했더니 비실이하고 노는 거였어?
-그만해.
-야- 비실이가 우리 보고 그만하란다.
꼴에 재현의 친구들이라던 무리는 웃기 바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래 놀이터에 쪼그려 앉은 훈을 툭툭 치고 발로 밀었다. 그만하라는 말은 그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 뿐이었다. 보다 못한 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훈 앞을 막았다. 한 번 더 얘 건들면 때릴 거야.
-어디, 때려 봐. 때려 보라고-
훈을 괴롭히던 무리의 실실 웃는 표정,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여덟 살의 재현. 그 나잇대에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퍼부으며 재현이 주먹을 쥐었다. 바보, 똥개, 멍청이들. 우리 훈이 괴롭히지 마. 그리고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현을 말리려던 참이었다. 그러자 약하게 비틀거리던 훈이 우스웠는지 무리 중 한 명이 중심을 못 잡는 훈을 손가락으로 쿡, 밀었다. 다행히도, 무리를 노려보던 재현이 때맞춰 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빠른 재현은 거의 바닥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인 훈의 오른쪽 손을 잡아 주었고. 다리가 풀린 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꼴이 되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재현은 무리 친구들을 때린 벌로 사과를 해야 했고, 저 애들이 먼저 훈이를 괴롭혔다거나 하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훈이가 대체 누구냐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으니. 설상가상으로 재현은 이듬해에 전학을 가 버렸고 훈은 모래 놀이터에 남았다. 쪼그려 앉았던 발자국은 두 개였는데 항상 다음 날에는 두 발자국 다 모래 바람에 뒤덮여 흐려져 있었다. 허전하게 모래 위를 서성이던 훈은 혼자 두 쌍의 발자국을 찍어 보곤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재현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꽃이 피면 재현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해바라기 화분이 훈의 집 창가에 훈처럼, 외로이 자리하고 있었다. 훈은 해바라기가 참 저 같다고 생각했다. 태양은 암만 목 빠지게 바라봐도 모두에게 웃어 주곤 밤이 되면 쏙 사라져 버리는데, 꽃은 제 목이 꺾이는 날까지 태양을 우러러본다.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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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새싹을 보고 돌아온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재현이 눈을 떴다. 여느 때와 같지만 다른 꿈을 꾼 채였다. 제 그림자에 가리운 탓에 보인 건 흐린 실루엣뿐이었지만, 똑똑히 보았다. 날카로운 듯 둥글어 사납게 느껴지지 않는 눈매, 동글거리는 코, 기다란 속눈썹, 윗입술이 삐죽 솟아 고양이 같은 붉은 입. 분명히 모든 증거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훈아, 이런데- 네가 익숙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재현은 달렸다. 산 아래로, 내리막길에 추진력을 받아 더 빠르게 달렸다. 새벽이었지만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짜고짜 훈의 집 문을 두드렸다. 혼자 살고 있는 걸 알았다. 몇 초를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자 훈이 잠옷 차림으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훈은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곤 늘어지는 목소리로 누구세요- 물었다. 그에 재현은, 대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가 흠칫 놀란 훈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말도 없이 전학 가서 미안해. 네 얼굴 보면 가기 싫어질까 봐 그랬어. 또, 기억 못 해서 미안해. 이제야 알아서 미안해... 재현이 제게 뛰어들자마자 있는 잠 없는 잠 다 깬 훈은 상황 파악이 되자마자 재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늦었잖아.
-나, 다음 달에 다시 전학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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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꽃이 한창 핀 해바라기 밭에 훈이 없는 게 낯설고 허전했다. 꽃 다 피면 보러 오자고 했는데, 좀만 천천히 가지. 며칠 전, 재현은 훈의 얼마 안 되는 이삿짐을 실은 이장님 트럭이 얄미워서 괜히 발로 한 대 찰까 하다가 관뒀다. 트럭이 떠나기 직전에 훈이 흙과 바랜 잎 몇 장 들어 있는 화분을 재현에게 건네서였을까, 더 이상 트럭을 얄미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얄미운 건 여덟 살의 저였다는 걸 알았다. 그때의 재현도 해바라기 꽃이 다 피기 전에 홀랑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이사 가도 주소 보내 줘야 해. 편지 쓰게.
-싫어, 너도 주소 안 알려 줬잖아-
-야, 그때는...
-알겠어.
나중에 또 만나면 그때는 꽃 피는 거 같이 보자. 재현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또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널 또 못 알아보면 어쩌지. 불필요한 걱정이 멀어지는 트럭 뒤꽁무니를 한없이 쫓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네가 날 알아봐 줄 테니까. 기약 없는 걸 믿는 재현이 이내 점처럼 사라진 트럭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산 오르는 게 유달리 힘든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