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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처럼 공기도 눅눅한 날이었다. 티비에선 곧 장마가 올 거라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장마전선이 통과하여……. 우산을 챙기는 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했다. 새로운 집은 학교와 가까워서, 다행히 빗길을 오래 걸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새 학교 사면의 벽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였고 신설한 햇빛 가리개는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비를 막아냈다. 서동성입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자기소개를 하며 교실을 둘러보면 책상의 개수만큼이나 다른 표정들이 가득했다. 안녕.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애는 김재현. 안녕. 그 옆의 뚱한 얼굴은 차훈. 수많은 것들 중에서 유독 두 얼굴이 눈에 들었다. 안녕. 짝 없이 한 줄로 놓인 책상 중 유일하게 빈자리가 저 둘 사이라서 그랬는지. 가까운 거리의 두 사람이 너무 달라 그랬는지.

 

  빈자리의 책상은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 먼지가 두터웠다. 노란 꽃가루 위로 앉은 회색 먼지들은 습기와 함께 눌어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나 오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둘까. 하다 무심코 책상에 팔을 올린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흰 교복 와이셔츠 소매가 보기 싫은 색으로 얼룩진 후였다.

 

  “자.”

  “어?”

 

  소매. 뭐 묻었잖아. 턱 끝으로 가리키느라 고개가 까딱거렸다. 고마워.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를 물티슈는 처음 사용하는 것인 듯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뜯어졌다. 소매는 이미 연노랑빛으로 물들어 닦아내도 흔적이 남아서, 닦는 것을 포기하고 두 장을 더 꺼내 책상을 닦았다. 노랗고 빛바랜 먼지들이 쓸려나가자 책상은 새 것인 양 반짝거렸다. 다 쓴 물티슈를 건네자 훈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얗고 통통한 손을 건네 물티슈를 받아갔다.

 

  차훈은 조용했다. 까맣고 동그란 머리에 까맣고 동그란 안경을 쓰곤 자리에 앉아서 칠판을 가만 쳐다보고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공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교실이 시끄러워질 때면 훈은 그저 조용히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흰 줄이 까만 머리 밑으로 흘러내리고 눈이 천천히 감기면, 훈은 꼭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지루한 수업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김재현의 자리에는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차훈은 한순간에 시끄러워진 옆 자리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모여든 아이들은 그런 훈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듯 시선조차도 던지지 않았다.

 

  "시끄러웠어? 미안."

 

  김재현은 그런 차훈에게 굳이 말을 걸었다. 어차피 이어폰 소리 커서 들리지도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재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머쓱해진 큰 눈은 한참 검고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다 새로운 곳을 찾았다. 두리번거리는 갈색 눈동자랑 눈이 마주쳤다.

 

  “동성아! 매점가자!”

 

  여전히 빗소리는 거세고, 공기는 눅눅했다. 일어나기도, 움직이기도 싫은 날씨였고 그 사이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싫었다. 재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어 갈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여기 뭐 있는지 모르잖아. 한 번만 같이 가자. 태어날 때부터 사랑만 받았을 것 같은 큰 눈이 가늘게 접혔다. 두꺼운 입술이 오물거렸고, 생각보다 큰 손이 팔에 닿았다. 그렇게 김재현은 온 세상의 행복을 혼자 다 가진 듯 굴었다. 맞다, 안녕 동성아. 나는 김재현이야! 늦은 인사를 건네는 말은 친절했고 알 없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투명한 호박색 빛을 띠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은 귀를 덮을 듯 말 듯 했고, 꽤 자란 뒷머리 아래 가려진 목은 햇빛을 잘 보지 못했는지 생각보다 가늘고 하얬다. 그러면서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지. 투명한 갈색 빛을 찾아 쳐다보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하며 되물어왔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 묻었어.

 

  못 이기는 척 재현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잘 모르는 길 알아둬서 나쁠 거 없으니까. 야, 재현아 5분 남았다. 헐. 가자. 동성아, 가자! 청록빛의 통통거리는 소리 아래로 몇 개나 되는지 모르는 발자국 소리가 우르르 한 방향으로 향했다. 재현은 잘 뛰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점에 도착했다. 들어갈 시간이 다 되어 아무도 없이 한적한 매점에서 재현이 사과가 그려진 주스팩을 두 개 샀다. 이거 맛있어. 오늘은 내가 산다!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아, 저거 청포도 맛도 하나 주세요!”

 

  종이팩에 빨대를 꽂아넣던 재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쭉 뻗은 손으로 고른 건 손에 들고 있는 주스랑 똑같은 모양의 다른 맛. 같이 온 친구들은 손에 하나씩 쥐고 있는데 누구 주려고. 순간적으로 머리에 스쳐가는 얼굴이 있었다. 손에 들린 차가운 주스팩에 송글송글 이슬이 맺히는 걸 보고 재현을 쳐다봤다. 그거 누구 주게.

 

  “훈이가 이거 좋아해.”

  “차훈이랑 안 친한 줄 알았는데.”

  “아닌데? 나 훈이랑 친해!”

 

  안경 너머로 큰 눈이 휘어졌다. 휘어진 눈꼬리에는 기대가, 올라간 입꼬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둘이 하나도 안 친해보였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현이 다시 그 큰 손으로 팔을 잡았다. 곧 종 쳐. 재현의 머리 위로 시곗바늘이 얇게 까딱였다. 그러게. 이미 다른 아이들은 올라갔는지 간데없고 텅 빈 가건물에는 재현만 서 있었다. 나도 같이. 빨리 가자. 응. 재현의 손을 잡고 뛰었다. 아슬하게 시간 안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 쳤다. 재현은 무슨 첩보영화라도 찍을 듯 연두색 종이팩을 건네며 소근거렸고, 나는 아직 이슬이 맺힌 종이팩을 잡아 등 뒤로 돌려 훈의 책상에 올렸다. 다각거리는 분필소리는 끊기지 않고 계속 들려 이 행위가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더운 여름은 집중력을 앗아갔다. 일정 온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에어컨은 더위가 주는 나른함을 지워내기엔 충분치 않았다. 비 냄새가 섞인 후덥지근한 공기가 교실을 한바퀴 돌았고, 아이들은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씩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들려오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갈 때 얼굴을 흔들고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재현은 팔을 베개 삼아 잠들어 얼굴에 걸린 안경테가 삐뚜름했다. 훈은 턱을 괴고, 뜯지 않은 종이팩을 손으로 두어번 치면서, 오른쪽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멍하니 오른쪽을 쳐다보던 눈이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친하다더니. 얼마간 시선이 마주치고 고개를 훈은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매미 우는 소리가 판서소리를 묻어버릴 때쯤 종이 쳤다.

 

  “장맛비가 온단다. 조심하고. 당분간 야자는 없다.”

 

  짧은 종례가 끝나고 꺼낸 것 없는 가방을 닫아 등 뒤로 둘러맸다. 재현은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자며 가방을 급하게 쌌고, 훈은 자연스럽게 재현의 옆에 섰다.

 

  “아, 훈이 집이 우리 집이랑 가까워.”

  “어. 바로 옆이야.”

  “나 아직 여기 잘 몰라.”

  “내가 알려줄게.”

 

  팡, 소리를 내며 색색의 우산이 골목을 채웠다. 셋이 가긴 좁아 뒤로 천천히 빠지려 걸음을 늦추자, 같은 생각을 했는지 훈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우산 밑으로 작게 오므라진 입술이 움직였다. 재현이랑 같이 가. 여기 잘 모른다며. 고개는 끄덕였지만 속도를 높이진 않았다. 일렬로 늘어진 우산 세 개가 보기 그리 싫지 않아서, 훈을 혼자 뒤에 두고 싶지 않아서. 재현이 허전해진 옆을 본 듯 뒤를 돌아봤다. 핑그르르 돌아가는 우산 아래로 헤 벌어진 입. 거의 다 왔어. 우산 밖으로 튀어나온 손가락에 빗물이 튀겼다. 우리 집은 저기, 훈이 집은 저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손가락 보다 팔을 뻗어 그 가운데를 가리켰다.

 

  “나는 저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우산처럼 일렬로 늘어진 집을 향해 움직이는 고개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완전 가깝네.”

  “내일 학교 같이 가자. 훈이도 같이 갈 거야.”

  “야. 내 의사를 왜 니가 정해.”

  “안 갈 거야?”

  “아니.”

  “내일 봐.”

 

  우산이 사라지고 텅 빈 집에 들어와 습관처럼 티비를 켰다. 당분간은 비가 올 테니 외출 시 우산을 챙기세요. 가방 안에서 귀퉁이가 찌그러진 사과주스를 뜯어 입에 물었다. 내일도 까먹지 않고 챙길 테니 걱정 마세요.

 

  훈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우리는 매일 등하교를 같이 했고, 비는 그럴 때마다 간헐적으로 그쳤다가 다시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를 반복했다. 가끔 비가 오지 않아 재현이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이면 훈은 그런 재현을 향해 가는 눈초리를 보냈다.

 

  “비 와도 안 씌워줄거야.”

  “오늘 비 안 온댔어.”

  “온댔는데.”

  “동성이가 온대잖아.”

  “그럼... 그럼 동성이 우산 같이 쓰지 뭐.”

  “뭐? 그러든가. 다신 안 씌워준다.”

  “하하...”

  “와, 근데 진짜 습하다.”

  “금붕어도 여기서 숨 쉴 것 같지 않냐.”

  “있잖아, 훈아. 혹시 우리가 사실 물고기였던 거 아닐까?”

  “끔찍한 소리 하지마, 김재현.”

  “허엉.”

 

  가끔 훈과 재현이 이런 시답잖은 말들을 할 때면 웃음이 났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우습지 않은 말이었음에도 가늘게 째려보는 훈이, 그걸 자연스레 웃음으로 넘기는 재현이 재밌었던 것 같다.

 

  수업 종이 가까워 올수록 하늘이 심상찮았다. 연한 하늘빛의 구름들은 천천히 모여서, 무채색을 띄었고, 시간이 지나 진회색으로 변했다. 뭉글뭉글하게 뭉친 수증기 덩어리 사이사이에서 밝은 빛이 드문드문 튀었다. 구름 사이로 빛이 한 번 번쩍, 우르릉 소리칠 때마다 재현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와. 큰일 났다.”

  “내가 뭐랬어. 비 온다고 했지.”

  “나올 때는 안 왔단 말이야... 아니, 여기가 영국도 아니고 어떻게 매일 우산을 챙겨.”

  “이제 21세기 글로벌시대라 그래. 여기도 영국이야.”

  “무슨 소리야. 여긴 해리포터도 없다고.”

  “아무튼. 동성이랑 같이 써. 난 안 씌워줄거야.”

  “어. 나 오늘 쌤이랑 상담하기로 했는데.”

  “잘한다. 끝나고 늦게 혼자 비 맞으면서 가든가.”

  “허엉...”

  “기다려줄게.”

  “야 서동성 니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잔인한 훈이가 되는 거지.”

 

  종이 치고, 재현이 두 번 세 번 당부를 하고 교무실로 올라갔다. 가면 안 돼. 나랑 같이 가야해! 여전히 진회색 구름에서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교실에서 잠깐 기다리는 중에 창틀을 보던 훈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우리 김재현 놀래켜주자. 어떻게? 밑에 내려가서 기다리면 되지.

 

  훈은 신나게 재현의 가방까지 챙겨 1층 현관으로 내려왔다. 김재현 우는 거 아냐? 두고 간 줄 알고. 글쎄. 가방 없어진 거 보고 후다닥 내려올 것 같은데. 비 진짜 많이 온다. 그러게. 나 살면서 이렇게 자주 많이 내리는 거 처음 봐. 나도. 훈은 대화를 끝으로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점이 선이 되어 훈의 콧잔등을 톡, 그 아래에 있는 입술을 톡. 몇 분간 그렇게 비를 맞고 있던 훈이 우산을 꺼내들었다. 동성아. 잠깐만 이리 와 봐. 남색 우산 아래에서 훈이 손짓했다. 우산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내리는 비에 운동장의 모래가 파여 흙물이 바짓단에 튀었다. 가서 지우지 뭐.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동그랗게 맺혔다 우산살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 싫어할 것 같이 생겼는데. 나? 응. 물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가끔 비 내리는 거 보는 건 좋아. 아하. 훈이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와씨, 비 많이 온다. 김재현 버릴까.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는 모습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까만 머리카락에 튄 빗방울이 별처럼 반짝였고, 도수가 없는 동그란 테 너머로는 까만 눈동자가 은하수처럼 빛났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빗소리가 잦아들었고, 우산을 때리는 작은 소리만큼이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흰 얼굴에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성아. 뭔 생각해. 설마 진짜 김재현 놓고 가려고?”

  “...어? 아니. 아니... 우산이 되게 큰 것 같아서. 그 생각 하고 있었어.”

  “아.”

 

  그 말을 하면 안 됐는데. 얼버무리려 던진 아무 생각 없는 말은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어떤 말이 나올지는 대답을 들어야만 알 수 있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전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을 때도 있는데.

 

  “김재현 우산 놓고 오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냥... 그래서 큰 거 샀어.”

 

  훈의 눈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향했다. 검은 머리카락 밑으로 귀 끝이 약간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러면,”

  “야 먼저 간 줄 알았잖아!”

  “늦게 나온 네 탓이지.”

 

  으허엉. 우는 소리를 낸 재현이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쳐 멨다. 놓고 간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빨리 뛰어왔는데. 입을 있는 힘껏 아래로 내린 재현이 훈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동성이 꺼 쓰라고!”

  “동성이 우산 작잖아. 그리고 동성이는 감기 걸리면 미안해.”

  “나한테는 안 미안하냐?”

  “너한테는... 완전 미안하지.”

 

  훈이 툴툴거리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훈이가 최고야. 비를 맞지 않으려 재현이 훈 가까이로 붙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차분한 검은 머리카락과 얽혔다. 우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자. 응.

 

  “나 얘 데려다 주고 갈게. 잘 가, 동성아.”

  “응. 내일 봐.”

  “낼 봐!”

 

  우산을 잡아당겨 접는 손이 떨렸다. 흥건하게 젖은 우산을 털어내려 몇 번 우산을 피고 접으며 아래를 바라봤다. 작은 물방울이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아래로 혼자 걸어가는 남색 우산이 보였다. 혼자 쓰기에는 꽤 큰, 남색 우산.

 

  비가 더 오지 않았으면 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우산은 마를 새 없이 축축한 장맛비에 젖었다. 재현은 가끔 우산을 놓고 왔고, 훈은 언제나 우산을 챙겼다. 재현이 우산을 놓고 올 때면 훈은 툴툴거리면서도 희고 통통한 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들고 오랬지. 허엉 까먹었어. 잘한다. 우산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훈의 가는 눈과, 재현의 곱게 접힌 눈을 볼 수 있었다.

 

  “맞다. 훈아.”

 

  하늘이 번쩍거렸다.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는지 곧이어 천둥소리가 들렸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우산 밑으로 움직이는 두꺼운 입술이 어쩐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동그랗고 까만 뒤통수가 잠깐 멈칫거렸고 우산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손에서 분홍색 엠피쓰리가 툭 떨어져 내렸다.

 

  “훈아 저거!”

 

  뒤늦게 달려가 떨어지는 작은 기계에 손을 댔다. 딱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짧았다.

 

  “야 너 괜찮아?”

  “어. 그냥 갑자기 어지러워서.”

 

  작은 기계가 흙탕물이 고인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심스레 주워 물기를 닦아 훈에게 건넸다. 훈이 엠피쓰리를 받아들어 전원을 켰다. 지직, 화면 반쪽이 까맣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응. 어차피 오래 썼어. 야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안 아파. 빨리 가자. 훈은 걸음을 재촉했고 재현은 입술을 꾹 물고 훈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색 우산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빗소리만 적막하게 우산을 때렸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동시에 타는 듯한 더위가 찾아왔고 꿉꿉했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말라 습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재현은 언제나 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늘 급식 메뉴가 뭔지에 대해 토론했고, 훈은 고장난 엠피쓰리를 만지작거리다 주머니에 집어넣고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주변을 눅눅하게 짓누르던 습기가 장맛비와 함께 사라졌을 뿐 다른 것들은 분명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전과 같지 않았다. 훈은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재현은 그런 훈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한 칸을 두고 떨어진 책상에서는 더 이상 친근한 시선이 오가지 않았다. 가끔 오가는 말의 내용도, 말투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둘은 전처럼 붙어 다니지 않았다.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같았지만. 둘을 볼 자신이 없어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서랍을 뒤적거렸다. 교과서도 없이 텅 빈 책상 안에서 노란 물이 든 채로 말라붙은 물티슈가 튀어나왔다. 물티슈를 건네던 희고 통통한 손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의 미안한 얼굴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어쩌지... 이번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괜찮아요. 몇 번인지 모를 이사와 전학을 반복하며 표정을 꾸며내는 것에는 도가 텄다. 저는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요. 푼 지 얼마 안 된 집에는 달리 쌀 짐이 따로 없었다. 교복을 넣은 상자 밖으로 와이셔츠 소매가 삐져나왔다. 노란 꽃물이 든 셔츠는 여러 번 세탁기 안에 들어갔다 나왔음에도 연한 개나리 색으로 흔적이 남았다. 달칵, 뚜껑을 열어 다시 셔츠를 집어넣었다. 털털거리는 차 엔진 소리에 기억을 묻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났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그 여름이. 사과와 청포도맛 주스, 커다란 남색 우산과 분홍색 엠피쓰리, 그리고 동그랗고 까만 차분한 머리카락과, 갈색의 곱슬머리와 함께했던, 그 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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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현    동성아, 잘 지내? 나 재현이! 이번에 훈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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