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원 안에는 언제나처럼 비슷한 노래들이 엇갈려 울리고 있었다. 저곳에서는 서투른 동요, 이곳에서는 설익은 쇼팽. 저 건넛방에는 능숙한 베토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훈은 그 음들을 사뿐히 밟으며 조심히 학원 안으로 종종 뛰어 들어왔다. 가장 안쪽 방에서 나직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봤자 청량한 피아노 소리 사이에서는 이질적으로 귀에 들어올 뿐이었다. 훈은 꼭 도둑고양이처럼 폭신하게 걸으며 들려오는 목소리를 더듬었다.
“아깝죠, 참 애가, 열심히 하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자선사업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봐줄 형편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오늘까지랬나요, 승협이 학원 나오는 거.”
“이번 주 까지에요. 그 집 형편에는 세 달 다닌 것도 기적이죠.”
“그래서 그런가, 요즘 유독 열심히 해서 마음이 영... 그래요.”
“필사적인 거죠. 정말,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조금만 더 형편이 좋은 집 아이였다면 충분히 성공할만한 애인데...”
훈은 재밌는 장난감을 주웠다는 듯이 웃음을 가득 띠고, 피아노 방들이 모인 복도로 조용히 다가갔다. 훈은 음악으로 길을 찾았다. 지루함들이 매달려 축축 늘어지는 음들 사이에서, 유난히 절박한 소리를 따라갔다. 저 피아노와 합주하면 무슨 기분일까, 훈은 상상만으로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함을 마음껏 즐기며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마다 붙어있는 낡은 이름표들을 눈으로 훑었다. <프리지아>,<튤립>,<백합>... <파란 장미>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문 앞에 훈은 멈춰 섰다.
똑똑-
“누구세요.”
어리고 무심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고, 훈은 자신을 향한 질문을 인사치레 취급하며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승협은 거듭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훈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의아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소년은 자신보다 기껏해야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였지만, 눈동자가 부딪히자 훈은 차오르는 만족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언가에 결핍되어있는 눈동자는 새까맣게 공허했다. 훈은 승협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승협과 같은 사람들이 제 손아귀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가진 게 없지만 절박한 이들은 소유하기 쉬웠다. 훈의 눈길이 피아노 위에 올라가 있는 승협의 손으로 옮겨졌다. 아직 작았지만 손의 골격과 형태가 곱고 길었다. 이렇게 되면, 너무 신나는데.
“형. 피아노 좋아해요?
훈은 피아노 의자 가장자리에 폴짝 걸터앉으며, 제 나이의 순진한 얼굴을 빌어 천진난만하게 질문을 던졌다. 승협은 훈의 뜬금없는 질문을 저보다 어린아이의 구김 없는 천진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치부하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응, 좋아해.”
“왜요?”
“그냥, 좋아. 건반이 손가락에 닿는 느낌도, 누르면 나오는 노래도. 지금이야 쉬운 것밖에 못 치지만 더 배우면...”
승협은 입을 다물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건반을 누르면 미세하게 전해오는 진동, 진동과 함께 맑게 울려 나오는 음, 악보 위에서 춤추는 음표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연주하는 즐거움. 다 끝이었다. 처음에는 없는 형편에 삼 개월이라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기뻤지만,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더 잔인하기만 했다. 포기할 수 없지만, 이룰 수도 없는 소원은 존재조차 모르는 것이 나았다. 이 모든 즐거움을, 벅참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산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저 희고 검은 건반들을 즐겁게 연주하고 싶을 뿐이었지만, 그조차도 사치였다.
“왜, 형?”
“...이제 못 배우거든.”
“왜? 좋아한다며! 그러면 배우면 되지.”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소리 없는 반박을 삼켰다. 승협은 학원을 다닌 적이 없었다.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은 다닌다는 영어 학원이나 보습 학원에 발을 들여본 적도 없었고, 수업이 끝나면 항상 학교 옆에 딸려있는 문방구에서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얌전히 집에 갈 뿐이었다. 화근은 반년 전, 같은 반 친구였던 지원이를 따라 별생각 없이 발을 들인 피아노 학원이었다. 음악 시간에 가창 수행평가 반주로 선생님의 반주를 들었을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찬 공간에 발을 들이자 승협의 심장이 다르게 뛰었다. 떨리지만 힘차게, 이곳에서 나가기 싫다는 듯이 들뜬 심장 박동이 온몸에 울렸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는 듯이, 잃었던 것을 찾았다는 듯이.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나,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승협의 심장은 여전히 그렇게 뛰고 있었다. 승협은 그 울림을 애써 무시하며, 훈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꼬맹아. 좋아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왜? 될 수도 있잖아!”
훈의 말이 지나치게 순백하여 오히려 승협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가능성은 잔인한 것이었다.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 완전한 불가능이 아니라는 게 승협을 일으켜 세웠고, 그렇다고 가능치도 않다는 것이 다시 승협을 넘어뜨렸다.
눈은 마음의 창이랬다. 승협은 문득, 저 눈이 어떤 창을 감추고, 어쩌면 누군가를 겨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훈의 눈동자는 검었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가득 메우고 있는 눈,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훈은 승협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가치가 있었고, 훈을 즐겁게 했다. 만약 저 재능이 훈의 손에서 피어난다면, 그런다면. 아찔한 흥분이 치고 올라왔다.
“형, 앞으로도 피아노 치고 싶어?”
승협은 늪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피아노만 칠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피아노만 칠 수 있다면.
“응.”
*
똑똑-
“누구세요.”
벌컥, 훈은 나직한 승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희고 깔끔한 방의 한가운데에는, 승협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승협은 너무나도 그 자리에 잘 어울렸다. 승협은 멀끔한 얼굴로 검은 반팔티 하나를 입고 있었고, 승협의 입에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연습 잘 되어가?”
“응, 뭐, 잘해야지.”
“잘할 거면서.”
훈은 여유롭게 웃으며 피아노 옆에 기대어 승협을 바라보았다.
“쳐봐, 형.”
“듣고 싶은 거 있어?”
“라 캄파넬라.”
“어, 그거 피아노 전공자한테 쳐달라고 하면 제일 싫어하는 노래 중 하나래.”
“그래서, 안 해줄 거야?”
씩 웃으며, 승협은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연주가 조용하지만 웅장하게 시작되었다. 상쾌한 음이 승협의 손끝에서 흘러나와 이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기교보다는 진심으로 가득 찬 음악은 귀에 따스하게 닿아와 마음을 울렸다. 순수하고 우아하게, 하지만 가볍지 않게, 승협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몰입, 더 나아가 환희에 젖어있었다. 음 하나하나가 분명하지만 부드럽게 서로 이어지며 듣는 사람의 귀를 다정하게 홀렸다. 훈은 더없는 만족감에 충만하여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절정으로 치닫는 연주에 마음이 들떴다. 승협은 제가 만들어내는 음에 완전히 심취하며 끝을 향해 치달았다. 승협의 길고 흰 손이 춤추듯이 건반 위를 활보했다.
“... 형은 이 노래 칠 때마다 성격 나오는 거 알아?”
“...무슨 의미야.”
승협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언제나처럼 훈은 승협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법이 없었다. 훈은 여전히 건반 위에 올려져 있는 승협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승협을 처음 만났을 때의 훈의 눈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승협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재능을 더욱 반등시켜줄, 피아니스트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손가락은 길었고 모양이 고왔으며 선이 부드러워, 피아노를 치기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손이었다.
“바이올린 가져왔어?”
“밖에. 가져올까?”
“그러면 좋고.”
훈이 나가자, 승협은 한숨을 작게 쉬었다. 자신이 훈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재능을 가진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훈에게 자신은 그저, 탐나는 재능을 가진 한 명의 피아니스트에 불과했다. 지난 칠 년간, 훈의 집안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피아노를 쳤고, 훈이는 그 모든 과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꽃이 피어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고작 그 정도였다. 훈에게 승협은 이 재능과, 이 손이 아니면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고작 그 정도의 존재였다. 박탈감에 뒤집어지는 속도 모르고, 훈의 미소만 보면 주체가 되지 않는 심장 박동에 승협을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덜컥, 훈이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들어왔다.
“뭘로 할래?”
“쉬운 거 하자.”
“듀엣 너무 오랜만인데... 생각나는 거 없어? 어려운 거 말고.”
“River Flows in You, 어때?”
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올린을 꺼내 목에 기댔다. 승협은 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훈이 음을 조율하는 동안,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짙게 방 안에 나지막이 울렸다. 정돈되지 않은 바이올린 소리와 승협의 심장 소리가 엇갈려 승협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됐어.”
훈은 낮게 조율이 끝났음을 알리고,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활을 대며 피아노를 기다렸다. 승협의 연주가 먼저 시작되었다. 나지막하고,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게. 한 음 한 음을 어루만지며, 바이올린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훈의 활이 느리게 현을 켰다. 어느 한 쪽도 급하거나 느리지 않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지만 절대 스스로를 양보하지 않으며, 둘의 선율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화려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바이올린의 고상한 소리가 피아노를 타고 자유롭게 춤을 췄다. 어느 한 쪽이 상대를 억누르지 않는 아슬아슬한 조화가 긴밀하게 이어지며 순조롭게 끝을 향했다. 훈은 눈을 감고 손 끝과 활의 진동에 집중하며 끝의 끝까지 이어갔다.
“아, 역시, 형이 제일 낫다니까. 다른 애들이랑은 이것도 못 하겠어.”
훈은 천천히 바이올린을 정리해 넣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승협은 저 입에서 나오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더 이상 피아노나 음악이 아닌, 오로지 그와 자신의 이야기였으면 하는 희망 없는 바람을 가졌다.
“어떤데?”
“바이올린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연주에 취해서 지 혼자 내달리거나, 아니면 완급조절도 거지같이 못해서 아무것도 안 들리게 하고.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입을 비죽대는 훈의 뒷모습에 승협은 많은 의문들이 목에 걸려왔다.
훈아, 나는 피아노가 아니면 너에게 무슨 의미야? 만약 내가 이렇게 연주하지 못하게 되면, 네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하게 된다면, 너는 나를 버릴 거야?
승협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신은 얕은 상상만으로도 눈가가 아파오는데, 훈에게는 너무도 가벼운 질문일 것 같아서, 훈이 별생각 없이 던지는 가벼운 대답에 너무 아플까 봐, 승협은 기꺼이 무지를 택했다. 짝사랑은 오롯이 혼자서,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내야 하는 사랑이었다. 완전한 사랑도 아닌 불완전한 반쪽짜리 사랑, 홀로 비워내고 홀로 버텨내야 하는 외로움뿐인 사랑. 겨우내 비워낸 후 돌아보면 어느 하나 아름답게 추억할 기억 한 조각 없는 외사랑.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랑을 품어버렸다. 승협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훈을 올려다보았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눈길만 부딪혀도 가슴이 울렁댈 정도의 사랑은, 어떻게 해야 떨쳐낼 수 있을까.
*
손가락이 간지러운 감각에 얕은 잠을 깨었다. 졸린 눈꺼풀을 끌어올려 보니, 품 안에서 새하얗게 예쁜 훈이 승협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해?”
“그냥, 형 손 진짜 예쁘다 싶어서. 딱 피아노 치는 사람 손이기는 하지만, 다른 악기여도 잘 어울렸을 거야. 첼로나, 바이올린이나.”
승협은 느릿하게 빈손으로 훈의 마른 어깨를 끌어안았다. 훈은 별 저항 없이 승협의 품에 안기며 손을 놓지 않았다.
“됐어. 난 피아노면 돼.”
“응, 그래서 다행이야.”
훈의 집요한 손길에는 그저 간절치 않는 호기심,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소함에도 승협의 사랑은 요동쳤고 감정들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훈은 그런 승협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승협의 손가락 마디를 천천히 쓸었다. 처음 네 손을 잡았을 때, 나는 그저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다. 만족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고, 아득한 축복이었으니까. 그런데, 원하는 것이 또 생겨버렸다. 원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만약 형이 바이올린을 했다면... 난 형이 다시는 활을 못 들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말은 차가웠다. 아무렇지 않은 훈의 말 한마디가, 승협을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럴 일 없었으니 다행이지.”
그리고 승협은 나락에서 목소리를 내는 법을 익혔다. 훈 때문에 떨어진 나락에서 흘러나와 훈에게 가닿은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승협은 훈을 사랑하지 않는 법도 몰랐고, 훈에게 다정하지 않는 법도 몰랐으며 훈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도 몰랐다.
“형 콩쿠르 내일이었나?”
“응.”
“연습 잘하고, 마중 갈게.”
훈은 싱긋 웃으며 승협의 품에 폭 안겼다. 승협은 알고 있었다. 훈은 이미 승협의 사랑을 알았고, 그럼에도 그저 사랑에 휘둘리며 설레하고 아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방관하기만 하고 있다는 걸.
“고마워, 훈아.”
훈의 매끄러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실 그런 것들은 지금의 승협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
아무리 작은 규모의 콩쿨이더라도, 준비를 완벽히 했더라도, 승협은 대기실에 앉아있을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보의 모든 부분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머리가 알았고 손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은 아직 시작조차 않았기에 승협은 시작점 앞에서 언제나 손을 떨었다. 오늘은 유독 컨디션도 좋고, 크게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규모의 콩쿨이었으며, 손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괜찮았고, 이를 비롯한 많은 것들이 어느 하나 문제 될 것 없이 수월했다. 근데도, 오늘따라 승협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렸다. 긴장보다는 불안감인 듯 성싶었다. 뭐지, 뭔가를 두고 왔나? 콩쿨날 아침이면 모든 것을 세 번 이상 확인하는 승협이었다. 그럼, 뭔가를 잊어버렸나? 오늘 연주할 곡은 베토벤 발트슈타인 소나타 제1악장. 속도감이 있는 스타트 부분에서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박자를 리드미컬하게 연주해 세련된 웅장함을 자아내는 것이 포인트, 중간 부분부터는 빠르게 보다는 감정을 싣는 것이 중요하다. 약간의 광기, 전율, 감동. 하지만 감정에 취해 이 곡이 가지는 특유의 속도감을 잃지 않을 것, 마무리는 강렬하지만 경박하지 않게. 순서는 5번이었고, 앞 순서는 까치 같은 턱시도를 입은 마른 남자애, 뒷 순서는 머리를 화려하게 땋아 올려서 그런지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이던 여자. 잊은 것도 없었다. 그럼 이 불안감은 대체 뭐지?
다른 생각을 하고자 머리를 헤집자, 당연하다는 듯이 훈이 떠올랐다. 훈이는, 잘 있을까. 뭐 하고 있으려나. 이 시간이면 자기 연습실에 있겠지. 아침은 챙겨 먹었으려나? 요즘 연습실 옆에 생긴 서브웨이 자주 가던데, 그걸로 아침이나 먹으면 좋으련만. 맨날 그거 하나 먹고 배부르다면서 점심이랑 저녁 다 건너뛰고. 나랑 키는 1센치 차이인데 10kg이 가벼운 게 말이나 되냐고.
승협에게 훈은 구원이었다. 암흑과 같던 승협의 세계를 아름다운 밤하늘로 만들어준 사람, 그 밤하늘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유성. 이루어질 수 없던 아득한 꿈을 승협의 손아귀에 들어오도록 해준, 사랑스러운 승협의 구원자. 훈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 벅찬 전율도, 훈의 미소를 보면 밀려오는 아찔한 설렘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 훈아, 나는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승협은 피아노를 쳤다. 언제나 훈을 위해서, 훈의 곁에 있기 위해서, 훈의 미소를 보고, 훈의 목소리를 듣고, 훈을 품에 안기 위해서. 승협의 모든 것은 이제 오로지 훈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훈의 생각에 흠뻑 빠져있는 승협의 주머니에서 얕은 진동이 짧은 간격을 두고 연달아 울렸다. 대기실 안은 긴장으로 가득한 날카로운 공기로 꽉 차 있었기에 승협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조심히 대기실을 나섰다.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카카오톡 메시지였고, 발신자는, 사랑스럽게도 훈이었다. 훈이다,
「형」 pm 02:47
「나 좀 다쳐서」 pm 02:47
「오늘 마중 못 나가 미안」 pm 02:48
「한동안 연습도 쉬니까」 pm 02:48
「내 연습실 안 와도 돼」 pm 02:48
「조심히 와」 pm 02:48
우당탕--, 승협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담당자가 지금 나가시면 실격이라고 고래고래 외쳐댔지만 그런 것 따위는 승협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 훈이 다쳤다, 훈이, 훈이가, 다쳤다. 스스로한테 누구보다도 엄격한 훈이가 연습을 멈출 정도로. 심장이 묵직한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평소에는 기분 좋던 박동이 오늘은 아프도록 울렸다. 물론, 훈이 다쳤다는 것이 죽을 만큼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렇게 달려가는 것보다는 콩쿠르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 그리고 훈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승협은 숨이 막혀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훈이 걱정됐고, 그 와중에 나를 떠올려준 훈이 보고 싶었다. 승협의 사랑은 그랬다. 답을 알았지만 항상 빗겨나갔고 그랬기에 승협은 자주 주저앉아야 했다. 아무리 밑바닥이라도 행복할 수 있었기에 사랑이었다.
*
“훈아! 훈아! 어딨어, 훈아!”
도어락을 해제하자마자 승협은 온 사방에 훈의 이름을 거칠게 불러댔다. 승협과 훈이 함께 사는 2층짜리 저택은 빌어먹게도 넓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 산다는 설렘이 죄다 희석되어 희멀거질 정도로. 승협은 급하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작은 울타리를 치우고 세 칸씩 뛰어 올라갔다. 승협은 주로 1층을 썼고, 훈은 2층을 고양이와 함께 썼다.
“훈아!”
“뭐야? 형?”
훈은 언제나와 다를 것 없이, 무릎 위에 로망이를 앉히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로망이는 승협이 문을 거칠게 열자 깜짝 놀라 그대로 우다다 달려 나갔다. 방으로 들어가면 훈이 지금처럼 있는 상황은 익숙했지만, 훈의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반창고들과 손목 언저리에 감겨있는 붕대를 빼면. 격한 감정이 승협의 심장에서 마구 날뛰었다. 마음이 처음 다쳤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보다 몇 배는 격하게 요동쳤다.
“형, 아직 끝날 시간 아니지 않아?”
“...그냥, 왔어. 실격일걸.”
“뭐? 왜?”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훈에, 승협은 비틀대며 훈이 앉아있는 침대에 다가가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천천히 훈의 손을 잡는 손길이 바들거렸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훈이였다. 강건하지는 않지만 한결같이, 여유롭게 웃으며 항상, 그렇게 예쁘게 그 자리에 있던 훈이. 다가가지는 못해도, 함께할 수는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만 있다면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고개를 묻었다.
“아무리 규모 작은 콩쿨이여도, 그런 데에서 알음알음 평판 생기고 그러는 거라니까? 갑자기 그렇게 뛰쳐나와 버리면 어떡해!”
왜 그랬냐며 질책하는 듯한 훈의 목소리에 승협은 문득 눈물이 솟았다. 훈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본 후부터 훈을 봐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고, 콩쿨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훈아, 네가 다쳤다는데 내가 어떻게 태연하게 피아노나 칠 수 있겠어. 제 손이 감싸고 있는 훈의 손을 꽈악 움켜잡으며, 승협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네가 다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니, 형.. 다친 건 난데...”
훈은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승협의 표정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훈은 승협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훈을 사랑했기에 그를 배려한 승협이 절제된 사랑만을 한정적으로 내비쳤기에 시답잖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제 손을 거머쥐고 있는 승협에게서 보이는 사랑은 숨이 막히도록 선연하여, 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협은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훈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흐르지 못해 고인 검은 눈이 올곧게, 오로지 훈을 향했다.
“사랑해, 훈아.”
승협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홀로 버텨온 사랑이 둑이 무너진 듯이 터져 나와 흘러넘쳤다.
“미안해. 훈아. 정말, 내가, 훈이 너를... 너무 많이 사랑해. 훈아...”
승협은 애원하듯이, 훈의 손에 매달려있다는 듯이, 울 듯이 사랑을 고백했다.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여린 사랑이 쏟아져나왔다. 사랑이라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단어로 표현하기엔 승협의 사랑은 아프기만 했다. 아프고, 외롭고, 치졸했으며 비겁했다. 나락에서 흘린 눈물, 홀로 주저앉아 아파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뒤엉킨 역겨운 사랑이었다.
“사랑해, 훈아...”
썩어버린 사랑은 비굴했으며 고백은 초라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 고백이 문득 너무도 초라해, 목소리가 조금씩 기어들어 갔다.
“...나한테 뭘 어디까지 원하려는 거야, 형?”
“어...?”
훈의 차가운 목소리에, 순간 승협의 심장이 얼어붙을 듯 시려왔다. 승협이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자 마주한 훈의 얼굴이 너무도 싸늘하게 승협을 내려다보았다.
“형, 나는.”
승협이 떨리는 손으로 잡고 있는 손을 살짝 빼었다. 비어버린 손아귀를 승협은 허망하게 쥐었다. 다음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웠다. 당장에 어디론가로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너무도 무력한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
“형의 재능이 참 좋았어. 그래서 형을 도와준 거야. 모든 걸 줬지. 형이 그토록 사랑하는 피아노를 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그리고 그 이상도 얼마든지.”
“...응.”
순간 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승협의 망가진 얼굴과 훈의 메마른 얼굴이 숨 막히는 거리에서 마주했다. 숨이 불쾌하게 죄어들었다. 차라리 당장에라도 숨이 멈추는 편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훈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승협을 죽였다.
“내가 형에게 모든 걸 줬는데, 이젠 나까지 원하는 거야?”
*
그저 죽고 싶지 않아서 한 고백이었다. 더 욱여넣고 있다간 터져버릴 것 같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다고 해서 달려갔더니 도리어 화를 내는 모습이 화나고 억울해서. 하지만 그조차도 사치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승협의 모든 것은 훈의 것이었고, 훈이 준 것이었으며 훈의 자비에 의한 것이었다. 자비의 온전한 수혜자인 승협으로서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승협은 그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욕심내 버린 것이었다. 추하고 멍청했다.
주제넘은 과욕의 업보일까, 피아노를 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악보를 읽으려 해도 음표 하나도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고, 박자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자꾸 손동작이 헛돌았다. 무엇이라도 쳐내려고 발악을 하고 아득바득 버텨도 망가지기만 했다. 음들은 마구 뭉개졌고 엉뚱한 건반이 눌렸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았다.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음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손이 멈췄다. 손이, 피아노를 거부했다.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이러면 안 된다고, 이러면 안 돼, 제발.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상상도 못 한 두려움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만약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된다면, 그날이 온다면 승협은 기꺼이 목숨을 끊을 자신이 있었다. 피아노를 잃는다면 훈을 잃을 것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승협은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두 가지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두려웠다. 두려움에 치가 떨렸다. 쳐야 해, 쳐야 한다고. 할 수 있어. 쳐야 해.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버려지고 싶지 않아. 아직 너무 사랑해서, 잃을 수 없어. 제발, 제발..
형편없는 연주가 이어졌지만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대로 멈추면 정말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음들이 마구 부딪히며 부서졌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을 거야, 눈물이 흘렀다. 괜찮아야 해, 여기서 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이제 잃기에는 너무 많이 사랑해버렸어, 제발. 양손의 연주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절박함 하나로 손을 놀렸다. 여유 한 가닥 없는 연주가 숨 가쁘게 내달렸다. 눈물이 승협의 손등으로, 피아노 건반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잃고 싶지 않아, 이대로 모든 걸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제발, 나를 버리지 마,
“씨발!!”
쾅-, 두 주먹으로 건반을 내려치자 둔탁한 불협화음이 울렸고, 얕게 공명하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저, 모든 것이 두려웠고 많은 것이 그리웠다. 훈아, 보고 싶어. 훈아, 너는 내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된다면, 나를 버릴 거야?
*
그저, 너에게 피아니스트 그 이상의 가치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에도 네 눈에 담기고 싶었고, 그저 이승협이라는 사람을, 네가 봐줬으면 하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네게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를 사랑할 뿐, 이 같잖은 사랑을 이유로 너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 이기심과 결부되어 있었다. 자신의 곁에 없는 상대의 행복을 비는 것도, 상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도. 모두 결국에는 사랑에서 기인하는 스스로의 행복과 자기만족을 위한 얄팍한 자기합리화일 뿐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게 된다. 승협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렇게 될 거면,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나에게 모든 걸 준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어서는 안 됐는데,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사랑해버렸다.
*
느지막이 잠에서 깬 훈은 비척비척 휴대폰을 붙잡았다. 저번 주에 큰 콩쿨이 하나 끝나, 이번 주에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시간은 오전 열한 시를 막 넘기고 있었고, 승협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훈아」 am 09:04
「나 연습이 너무 안 돼서」 am 09:04
「조금만 쉬고 올게」 am 09:05
「미안해」 am 09:08
이틀 전의 그 일 때문이라는 것이 너무도 선연했다. 피아노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행복해하던 승협을 알았기에, 훈은 얕게 걱정이 일었다. 충격이 될 줄은 알았지만, 피아노까지 손에 놓을 줄은 몰랐는데. 저러다, 아예 피아노에서 손 놓는 거 아니겠지, 그건 너무 아쉬운데. 하지만 훈은 그날 밤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승협이 훈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것은 단단히 잘못된 것이었고 훈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미 훈은 알고 있었다. 승협이 스스로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피아노를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걸.
「연락해」 am 11:14
답장을 보내고는, 훈은 승협의 고백을 떠올렸다. 승협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승협의 눈이 담고 있는 사랑이, 승협의 떨리는 손끝으로부터 전해진 사랑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도 깊고 거대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랑보다는 신뢰와 불가항력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익숙한 훈에게 조건 없는 승협의 사랑은 낯선 것이었다.
자신을 향한 일방적인 사랑을 목격한 훈은, 터무니없게도 만족감이 일었다. 괜찮았다. 오히려 비어있는 줄도 몰랐던 여백을 무언가가 스며들어 단단히 채워주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자신의 존재의 증명인 것 같아서. 훈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울부짖는 듯한 그 날의 고백 그리고 눈빛이 떠올랐다. 사랑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훈은 승협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발굴해낸, 가치와 경쟁력이 있는 피아니스트 정도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단, 아니면 소유물과 다르지 않았다. 적당하고 실력 있으며, 사람들 사이의 명망이 좋아 제법 쓸모가 많은 피아니스트, 어렸던 자신이 내린 결단의 성공적인 결과물.
처음으로 승협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함께한 시간들을 돌아보았고 승협의 손길 그리고 다정함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승협은 훈에게 늘 다정했고, 선을 넘지 않았다. 훈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훈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배려를 하는 일도 잘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 승협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기분 좋았고, 승협과 함께 한 시간들도 적당히 행복했고, 지금처럼 승협과 함께하는 미래도, 꽤나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정도였다. 사랑이 담기다 못해 터져 나올 듯했던 승협의 눈을 떠올리며, 훈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승협, 어디 갔으려나.
*
그저, 혼자 있고 싶었고 조금 멀어지고 싶었다. 너무 사랑해서 아픈 것들로부터.
청승을 떨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겨울 바다에 서 있었다. 찬 바람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파도가 철썩이더니 거품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광경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다는 푸르고 하늘은 희었다. 구름인지 모를 것들로 온통 뒤덮여 흰 하늘에서, 또다시 훈을 찾았다.
피아노를 사랑해서 여기까지 왔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는데. 자꾸만 하얀 입김이 나와 승협의 시야를 가렸다.
피아노를 사랑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승협의 인생에 대한 명제였다.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면, 승협은 필시 말라 죽었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 했을 테고, 이룰 수 없는 행복만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기만 했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차오름. 오로지 음악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흘러가듯이 악상을 따라가며 건반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즐거움, 연주가 끝에 치달을 때 내 안에 남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몰입의 흥분. 그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다. 사랑해 마지않았다.
철썩거리는 파도에 조금씩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모래가 질어져 발자국도 점점 또렷해졌다. 바람은 여전히 시리게 불었다. 큰 파도가 다가오기에, 승협은 살짝 뒷걸음질을 쳤고 승협이 서 있던 발자국은 파도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외사랑으로 막을 내릴 뻔한 승협의 사랑에 손을 내밀어준 것이 훈이었다. 부모님조차도 애써 외면했던 승협의 재능 그리고 사랑을 발견해준 은인이었다. 구세주이자 기적,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 그 후로 승협의 펼쳐진 피아니스트의 길. 감히 발을 디디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의 다른 세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길을 걷게 해준, 승협의 세계 전부. 그것이 훈이었다. 설령 훈이 자신을 도운 것이 승협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훈이 없었으면 비참하게 뭉개졌을 사랑이었기에 기꺼이 훈을 위해 피어나리라 다짐했었다. 그 무렵, 작고 사랑스러운 한 아이에 대한 승협의 경외감은 아득하게 자라나 있었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겨울바람이 끝도 없이 불었다. 파도는 맥없이 승협의 발치에서 찰싹거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뒤돌아 가버렸다. 코끝이 얼어붙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승협은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조금만 큰 파도가 달려든다면 신발이 젖을 거리였다. 근데도 발을 뗄 수 없었다. 결국 시원한 소리를 내며 달려온 파도에 승협의 흰 스니커즈가 먹혀들었고, 파도가 지나간 자리엔 양말까지 흠뻑 젖은 두 다리가 남아있었다. 승협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삶은, 너에게 구원받아 너로 인해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인걸. 내게 세상을 주고 빛으로 비춰준 너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오로지 너만을 사랑했어.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어떤 삶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고, 네 눈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방법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랑하지 않아보려고 해.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내 일상이 아니게 되고, 너를 향한 사랑이 나의 일부가 아닌 삶을 살아보려고 해. 너를 사랑하니까, 너무도 사랑하는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랑으로 인해 사랑을 버려내야 하는 모순이었다.
“...춥다.”
자꾸만 바닷바람이 흐르는 눈물을 스쳐 지나가며 닦아냈다. 물기가 고이자 눈가가 쓰렸다. 차훈을 사랑하지 않는 이승협은, 어떤 사람일까.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
승협은 최대한 낌새 없이 조용히, 차고에 차를 세웠다. 시간은 벌써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었고, 밤하늘은 까맣게 풍경의 채도를 내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현관 도어락을 열었다. 삑- 삑- 삑- 삑- 삐빅-, 뾰족한 도어락 소리가 띄엄띄엄 울렸다. 훈이 깨면 안 되는데 삐비빅, 소리를 내며 도어락이 열렸다. 문틈으로 불빛이 길게 새어 들어왔다.
“뭘 도둑고양이처럼 들어와?”
“어?”
거실의 불은 환했고, 소파에는 훈이 앉아있었다. 승협은 황급히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며 최대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빛은 밝았다.
“...왜 안 자고 있어?”
훈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승협에게 다가왔다. 훈이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다르게 뛰었다. 가까이 오기만 해도 이 지경이네, 승협이 무의식적인 사랑을 원망하는 사이, 훈이 후드 모자를 벗겼다.
“잠깐만, 훈아, 나 지금,”
“울었어?”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그 순간, 훈의 까만 눈이 다정해 보이는 것을 승협은 애써 부정했다. 지나친 사랑은 작은 친절들을 발견하는 족족 희망으로 바꾸기 일쑤였다. 방금 들어온 것은 승협이었지만, 훈의 손은 적당히 시원했다.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어서 그런지,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몸이 달아오르고는 했다.
“...왜 안 자고 있었어?”
“그냥, 안 졸려서.”
승협은 비틀어지는 마음을 외면했다. 정말 혹시, 나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 나름대로 절박해 보이는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으니, 훈이도 그 정도의 마음은 써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기대할 틈도 없이 실망으로 무너진 마음은 처량했다. 그럼에도, 훈의 손길에 가슴이 설레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흔들리는 승협의 눈동자가 끝끝내 자신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며, 훈은 손길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 형은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짓궂은 질문이었다. 그저, 의심할 여지 없는 승협의 사랑을 조금 시험해보고자 하는, 아니면 다시 한번 실감해보고 싶은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사실 핑계였다. 그저 승협의 그 짙은 사랑이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답을 알아도, 답안지에 쓰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승협은 훈의 눈을 마주 보았다. 동그란 눈이 올곧게 자신을 담기만 해도 마음이 들떴다. 훈이 자신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다. 어떤 말에도, 도저히 담기지 않을 것 같았다.
“... 예쁘고, 원망스럽기도 한데, 사랑스럽고, 밉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냥, 그렇네...”
없는 말들을 헤집으며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이 감정을, 생각을, 느낌을 담아낼 말.
“미안. 말로... 표현이 잘... 안 된다.”
애초에, 말 몇 마디에 담겨질 사랑이었으면 아파하지도 않았다. 도저히 단어 그리고 문장들에 담기지도 않을 마음인데도,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사랑이라는 것을 제 의지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다른 방향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훈은 씩 웃으며 승협의 얼굴을 감싸 잡았다.
“어, 훈아? 왜, 왜...?”
“청승맞게. 왜 밖에서 울고 그래.”
“...아무 것도 아니야.”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속아주길 원해서가 아니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승협은 쓰라린 웃음을 지었다. 훈은 잠시 승협을 바라보다가 승협의 얼굴을 당겨 이마끼리 콩, 하고 부딪혔다. 맞닿은 부분에서 조금씩 열이 올랐다.
“뭘 아무것도 아니야. 나 때문이면서.”
“...알면 좀, 모른 척해주지.”
승협은 애써 훈의 눈을 피하며, 조금은 원망을 묻혀 말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 그러지 말라는 건 무슨 심보인지. 승협은 훈을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수 없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살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다짐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승협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살아 숨 쉬는 일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당연하게 훈을 사랑했다.
“훈아, 내가... 언제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승협이 훈의 어깨를 조심히 잡고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그래도, 너 포기해보려고 해.”
예의 그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문장을 끝맺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확신이 없을 뿐이었다. 단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훈에게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협의 두 손이 훈의 손을 감싸 잡으며 고개를 떨궜다.
“네 말이 맞아. 너는, 나한테 모든 걸 줬어. 정말, 그야말로 전부.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안 돼. 그런 너한테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안 됐는데...”
“형.”
훈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했다. 왜, 훈이 네가? 승협은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도, 알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고 있는 훈을 감싸고 있는 것은 승협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좀 이상한가 봐.”
승협은 말없이 훈을 바라보았다. 나지막한 훈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고요했다.
“나는, 형이 나 때문에 망가지는 게 좋은가 봐. 내 말과 감정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항상 차분한 형이 내 눈만 보면 안절부절 거리는 것도.”
조용히 말을 이어가는 훈에 승협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건지, 왜, 그런 희망적인 말들을 내게 해주는 것인지, 그 말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줄 알고 말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다쳤다니까 콩쿨을 박차고 온 것도, 뭐, 참가비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괜찮았고. 날 사랑한다고 말할 때 목소리도, 내가 한 말에 세상 무너진 것 마냥 뛰쳐나간 뒷모습도 기분 좋았고.”
아무 말 없이, 승협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훈은 그런 승협의 뒷목에 팔을 감싸 당겨 안았다. 승협은 뒷목부터 달아올라 맥없이 훈의 얇은 팔에 끌려갔다. 무, 무슨 일이지? 지금, 훈이가, 나를 안은 게 맞나? 왜? 승협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훈은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웠고,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어때, 형은. 이 정도면, 사랑인 것 같아?”
“뭐?”
“난 모르겠어서 그래. 안 해봐서. 어떤 것 같아?”
승협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멍청하게 되물었고, 훈은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승협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훈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말로서 전달되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나야, 사랑이면 좋겠지. 나는.”
“그럼, 그런 걸로 하자.”
승협의 느린 대답에, 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끝도 없이 여유로웠고 또 가벼웠다.
“훈아,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 거지?”
“응. 당연하지.”
“...진짜? 그럼, 우리...”
감히 입에 담기도 두려워, 승협은 말끝을 흐렸다. 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과는 절대로 동화될 수 없을 것이었다. 훈은 결코, 승협이 훈을 사랑하는 만큼 승협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도 괜찮을까, 너는 내 음침한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온갖 생각들에 억눌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승협에, 훈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형이 사랑해주는 만큼 사랑할 자신은 없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어찌 되었건 끝만 보면 서로를 사랑하는 건 맞으니까.”
훈은 승협의 사랑에 책임감을 느꼈지만 부담감은 들지 않았다. 그거면 족할 것 같았다.
“뭐, 형이 고작 이 정도 애정으로는 부족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아냐!”
승협은 다급하게 훈의 말을 끊었다. 승협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했다. 불공평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가볍다 못해 실낱같은 애정이라도, 훈에게 조금이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너를 사랑하면서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평생토록 네 곁에 있지 못할 것도 각오했다. 다시는 네 눈을 보지 못할 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감수한 승협에게, 훈이 들이 밀은 선택지는 과분할 정도로 행복한 길이었다.
“그거면, 그거면... 나는 충분해. 정말...”
승협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훈의 여린 몸을 조심히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훈은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작게 들썩이는 승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가에는 승협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따스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다시는 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온기가 닿아오자 마음이 요동쳤다.
“사랑해, 사랑해, 훈아...”
“나도, 아마.”
이 지경으로 부스러기 같은 애정조차, 승협에게는 너무도 달았다.
*
“… 훈아, 일어나. 다 왔어.”
승협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훈을 깨웠다. 으으, 훈은 시트에 얼굴을 부비며, 잠이 덜 깬 얼굴로 눈꺼풀을 느리게 껌벅댔다. 승협은 그런 훈을 보며, 싱그럽게 웃고는 훈의 하얀 뺨에 입을 쪽 맞췄다.
“얼른 정신 차려, 훈아.”
“으으음....”
아직 묵직한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려 승협을 바라보자, 새 햐안 빛이 승협의 뒤에서 쏟아졌다. 눈이 아프도록 부셔, 훈은 눈을 찡그렸다가 천천히, 조심스레 다시 떴다. 다시 한번, 눈 부신 빛이 훈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아직도 잠 덜 깼네. 우리 가야 해.”
훈의 볼을 콕콕 찌르는 승협의 어깨 너머에서 하얀 벚나무들이 가득 보였다. 훈은 멍하니 그 풍경을 보며 얕은 생각에 잠겼다. 봄이구나, 벌써. 그 생각을 하자마자, 시원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벚꽃잎을 가득 싣고 불어왔다. 벚꽃잎이 하얗게 호를 그리며 나리는 것이 예뻤다.
“...깼거든. 눈부셔서 그래.”
훈은 아직 조금 욱신거리는 눈을 부비적거렸고, 승협은 그런 훈을 빤히 바라보다 앞머리에 내려앉은 꽃잎을 조심히 떼어주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이제 갈까.”
승협은 세탁소 비닐이 씌워진 턱시도가 조심히 담겨있는 쇼핑백과 두툼한 악보집을 한 팔에 감싸들고는, 빈손을 훈에게 내밀었다. 훈은 폴짝 자동차에서 내려서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 손을 잡고는, 승협이 들고 있는 악보집을 뺏어 들었다.
“실수만 하지 마, 알았지.”
“알겠어, 알겠어. 훈이가 봐주는데, 내가 우승해야지.”
“형이 지금 실감이 안 나나 본데 이 콩쿨, 엄청 유명한 콩쿨이거든.”
“알고 있어.”
“참내...”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시작된 그런 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