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쳐다보지 않아도
내 맘은 널 향해 있고
-부끄럼, 멜로망스
사랑 노래, 사랑 가사. 듣기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 설레고, 저절로 따뜻한 분홍색이 떠오르는 그런 음악을 듣고 있었다. 둥둥, 가슴을 울리는 리듬. 봄에 딱 어울리는 흐름. 원하지 않던 부끄럼만 생겼네, 흥얼거리며 손에는 아무렇게나 개어진 담요를 들고.
재현은 3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노래에 맞추어 통통. 담요의 촌스러운 바랜 분홍색이 계단 창문 밖 활짝 핀 벚꽃과 대비를 이뤘다. 얼마나 자주 가지고 다녔으면 이렇게 되나. 재현이 자신의 누나한테 물려받은 보송보송한 담요는 보온성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3층에 위치한 음악실은 냉난방이 잘 되지 않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그런 음악실을 버티기 위해 재현이 택한 건 분홍색 담요. 벚꽃은 피었어도 날은 쌀쌀했다. 춘추복만으로 견디기에는 아직은 조금 이른 감이 있어서, 재현의 팔 사이로 흘러내린 담요가 팔랑거렸다.
열리지 않은 음악실 앞에서 반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기다리던 재현은 이어폰으로 봄 캐롤이라 불리는 음악들을 들었다. 옆에서 친구들이 쟤 왜 저러냐며 술렁이는 걸 가볍게 무시하고 흥얼흥얼. 친화력 만땅에 말주변이 좋고, 친구 없이 못 사는, 이른바 인싸 김재현은 새 학기 봄 내음에 취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용했다. 조용, 했나? 자기가 조용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렇다고 치자.
음악 시간에도 재현은 온통 분홍이 가득한 창밖에 정신이 팔려 집중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건 소리요, 들리는 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것이라. 마음에도 봄이 찾아왔는지 괜스레 두근거리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봄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 누가 알았을까. 재현은 수면 위로 떠올라 가라앉을 줄 몰랐다.
학기 초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은 필수코스였다. 별것 없이, 긴장했던 재현이 느끼기에는 살짝 허무하게 끝났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잘하면 된단다,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 말씀에 긍정했다. 기분이 저 위에 동동 떠 있다고는 해도 재현은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었다.
면담이 끝나고 잽싸게 교무실 뒷문을 열어 나서려다가, 재현은 누군가와 콩, 부딪쳤다. 조금 긴 앞 머리카락에 가려진 시야 사이로 그 누군가가 들어왔다.
가슴에 달린 파랑 이름표가 그가 재현보다 한 학년 위임을 보였다. 정처 없이 떠올라 떠돌던 마음을 수면 아래 화려한 빛의 바다로 끌어당긴 사람. 가슴 한켠을 간지럽히며 피어오르는 감정.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니, 빨리 뛰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현은 그 사람에게서 눈을 돌렸다. 멍하니 넋 놓고 바라봤을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없이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기를 한참. 재현이 살짝 비껴가는 것으로 짧은 만남은 기약 없이 끝났다. 운명을 만난 게 아닐까. 재현은 실없는 생각을 했다. 입꼬리가 주체를 못 하고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승협.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는 내내 재현은 이름표에 쓰여 있던 이름을 생각했다.
자리에 앉아 재현은 조용히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봤다. 이, 승협. 이승협. 아까보다 더 크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재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재현은 천천히 엎드려 눈을 감고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둥둥, 울리는 게 봄 캐롤들의 박자와 닮아있었다. 달달한 분홍빛 봄 사랑 노래들의 가사를 한번 생각해보고, 재현은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단번에 모든 것을 제치고 재현의 마음을 잡아당긴 그의 이름은 이승협이었다. 어쩜, 이름이 이승협일 수가 있지.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온몸으로 부끄러워하던 재현은 수업 종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오다가다 한 번이라도 만날 법한데 안타깝게도 우연이란 건 재현을 승협과 만나게 해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교무실 앞에서 한번 만난 게 끝인데도 이승협이란 바다는 재현을 놓아주지 않았다. 몇 반인지, 어느 건물, 어디 층에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재현은 사랑을 키웠다. 포근한 봄에 분홍빛 짝사랑. 재현은 눈을 접어 웃었다. 짝사랑이라니, 공부하기는 글렀다. 그래도 재현은 마냥 신나있었다.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까지 야자실에 앉아, 문제집 한 귀퉁이에 연필로 속 꽉 찬 하트를 그리며. 공부할 때 듣는 가사 없는 노래조차 재현에게 찾아온 바다 산호빛 봄을 알렸다.
그 형 고3이니까 야자 할 텐데. 계속 떠올리다 보니 실제로는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재현은 생각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생각한 건 실행에 옮겨야 했다. 학기 초라 야자 인원은 야자실 가득 차고 넘쳤다. 화장실을 핑계로 야자실을 한번 둘러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혹시 여기에 승협이 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재현의 예상은 근사하게 맞아떨어졌다. 고3들은 야자 감독 선생님과 멀리 떨어진 자리를 선호했다. 다른 학년이라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고3들은 교탁 저 멀리 뒷문 쪽에 몰려 앉았다. 승협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단정한 승협의 뒷모습을 지나쳐가며 재현은 지갑을 챙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교복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음료수라도 사서 놓아두면 알아봐 줄까, 싶은 마음에. 조금 오래되고, 오그라드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직접 –안녕하세요!- 인사하기에는 아무리 붙임성 좋은 재현이라고 해도 부끄러웠거니와, 얼굴에 철판 깔고 인사하기에 쥐 죽은 듯 조용한 야자실은 적당한 장소도 아니었다. 마땅히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아서 재현은 지갑을 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자판기를 찾았다.
무난한 음료수 한 캔, 포스트잇에 둥글둥글 최선을 다해 예쁘게 써 내린 응원 멘트. 와, 진짜 부끄러워. 재현은 손바닥에 차오른 땀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고, 석식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딩동댕동, 종이 울리고 야자를 하는 학생들은 빛의 속도로 야자실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교실 안에는 재현과 야자 감독 선생님만 남았다. 재현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수를 들었다. 아직 차가움이 채 가시지 않은 온도가 손에 맞물렸다. 긴장감에 손안을 맴돌았던 열기가 내려가며 시원함을 전했다. 음료수 캔의 바닥이 책상에 닿는 소리가 조용한 야자실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음료수를 올려두고 그대로 뒤를 돈 재현은 여기서 마주치면 큰일인 사람과 맞닥뜨렸다. 조금 당황한 얼굴로 재현을 쳐다보고 있는 이승협. 형이 왜 거기 서 있어? 그러게나 말이다.
재현은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형이 왜 여기에 서 있지. 분명 아까 밥 먹으러 나갔던 거 같은데. 재현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새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을 포함한 온몸이 화끈거렸으니까. 재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뭐라도 말하며 자연스럽게 빠져나갔을 텐데, 승협의 앞에서 재현은 헤엄치지 못하고 꼼짝없이 가라앉았다. 예의 그 화려한 빛의 바다 속, 산호초. 분홍빛이 만발한 파란 바다로.
승협은 재현을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책상 위에 놓인 음료수를 손에 들었다. 순간적으로 가까워진 거리에 재현은 안 그래도 굳어있던 몸이 더 뻣뻣해져서 덜그럭거렸다. 승협은 재현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천천히 물러난 후, 포스트잇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살풋 웃었다. 여기서 재현은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 왜, 왜 웃어?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승협이 빙그레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이 없자 재현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뗐다.
“왜, 왜 웃어요?”
“그냥, 고마워서요.”
미친 거 아니야. 재현은 얼굴이 거의 익어가면서 애써 웃었다. 울고 싶다. 평소의 반만이라도 말이 잘 나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마주보기를 또 한참. 재현은 첫 만남을 떠올렸다. 산호가 가득 피어있는 분홍빛 바다를 깨달았던 교무실 앞. 그날처럼 재현과 승협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너도 내 마음과 같은 맘이길
언젠가 들었던 사랑 노래의 가사가 재현의 머릿속을 울리고 지나갔다. 심장은 원래 속도를 잃고 미친 듯이 허우적댔다. 재현에게 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영영 잠겨버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승협은 재현의 뒤쪽 벽에 달린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자신의 앞에서 잔뜩 얼어있는 재현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손을 가만히 못 두고 자꾸 눈을 피하는 것이, 음료수와 포스트잇을 선물한 익명의 주인이 자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승협은 여전히 흐르고 있는 시간을 신경 썼다. 재현과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석식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승협이 꺼낼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저녁 같이 먹을래요?”
“네?”
“싫으면 말고.”
“아뇨! 좋아요!”
재현은 자기가 대답하고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크게 대답한 것이 아닌지. 승협은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귀여웠다. 승협은 가볍게 재현의 팔을 잡고 끌었다. 대담함에 재현은 안 그래도 발갛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어갔다. 어쩌면 산호색 봄이 찾아온 건 재현만이 아닌 것 같았다. 승협의 바다에도 조금씩 산호빛 파도가 번져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