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그 선배 아니야? 밴드부?"
"어, 맞아."
"사진 진짜 잘 찍었다. 네가 찍은 거지?"
"선배가 잘생긴 거야. 난 그냥 셔터만 누르는 거지."
"겸손은. 다음 영어야. 존나 뛰어야 돼."
"아 제발 5층엔 특별실 안 만들면 안 되나."
"그게 우리 맘이냐. 가자!"
"어어."
동성이 쾅 닫아버린 사물함 문짝이 닫히지 못하고 덜렁거렸다. 때마침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확 열어젖혀져 안쪽에 붙어 있던 사진이 햇빛을 받았다 도로 반사했다. 눈부시게 웃는 환한 얼굴에서 마치 빛이 나는 듯했다. 교실엔 아무도 없었지만.
1학년 4반 서동성. 인적사항이 정자로 새겨진 학생증이 영어실로 뛰어가는 동성의 목에 걸려 달랑거렸다. 학생증 속 단정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남학생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 마냥 웃고 있었다. 보통 학생들이라면 증명사진 같은 것들을 찍을 때 조금 덜 웃기 마련인데. - 크게 웃으면 못생기게 나올까 봐 - 동성은 전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철석같이 따르는 것일지도.
꿀맛 같은 점심시간 50분을 지나 지옥의 5교시 영어 시간은 더러 아이들의 숙면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교실을 쭉 둘러보며 엎어져 자는 아이들을 세는 것보다 허리를 세우고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의 수를 세는 것이 훨씬 빠를 정도였으니까. 오죽했으면 5교시에는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깨우는 것을 포기할 정도다. 이따금 포기하지 않고 버럭 학생들을 일으키는 선생님들도 있지만, 보통은 몇 번 말로 자지 마라, 하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포기하는 정도였다. 사실 선생님들이 버럭 소리를 질러도 정말 깊은 잠에 빠진 우리 학생들은 절대 깨지 않는다. 그중 동성은 선생님이 옆에 애 깨우라고 하면 어깨를 슬슬 움직이며 야아, 일어나래. 하고 말을 거는 쪽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밥 케이크에 우동이라는 맛있는 점심 후에 찾아온 영어라는 디저트는 아이들을 식곤증에 빠지게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동성은 흔히들 아이들이 '이상한 애'라고 부르는 학생이었다. 이상하게 수업 시간에 졸지도 않고, 이상하게 숙제라는 걸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으며, 이상하게 선생님들은 동성을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동성은 인간관계에서도 유하나 유하지만은 않은, 오히려 단단한 축에 속했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로 스트레스 같은 것을 받을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매사에 침착하기로 소문난 동성이 유일하게 환장하는 것, 아니 사람이 있었는데, 같은 학교 밴드부 기타리스트. 차훈이었다.
학교마다 밴드부는 있기 마련. 동성의 학교에 있는 밴드부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자발적으로 교외 버스킹도 많이 나가는 편이었고, 교내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 공연도 섰다. 학교 내에서는 암암리에 팬클럽도 형성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그 안에 동성도 포함이었다. 동성은 다른 애들처럼 입으로만 밴드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도 좋아했다.
자신의 입학식을 축하한다며 무대에 올라온 기타리스트 훈을 보고 동성은 그날 바로 제 카메라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었다. 온 SNS를 뒤져 밴드부 계정을 모조리 다 팔로우했고, 게시글 알림 설정까지 완벽히 했다. 혹시나 싶어 학교 이름과 밴드부로 서치도 했는데, 사진은 많이들 찍는 모양이었다. 사실 큰맘 먹고 카메라를 바꾸고 인지한 사실이 내가 맘대로 찍어도 되는 건가...? 이었는데 많이들 찍어 올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성처럼 제대로 된 카메라로 찍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휴대폰 카메라였다. 본래 사진 찍기를 즐기던 동성은 얼른 버스킹을 보러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고, 며칠 뒤, 3월 모의고사를 치고 텅 빈 마음으로 집에 가는 길에 버스킹을 한다고 글이 떴다. 동성은 하굣길 한가운데에서 으아악 소리를 지르고는 같이 가던 친구들에게 자기 먼저 간다며 고함 아닌 고함을 친 후 카메라가 든 가방을 메고 알려준 장소로 뛰어갔다.
아직 시작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악기 멤버들이 세팅을 하고 보컬들은 물을 마시며 목을 풀고 있었다. 동성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공연 준비를 하는 밴드부 멤버들을 보며 전에 알아낸 이름들과 매치를 하고 있었다. 저기 저 키 큰 형이 이승협... 그 옆에 조금 작고 귀엽게 생긴 사람이 유회승. 드럼 칫칫 거리고 있는 사람이 김재현, 기타...! 기타 든 형...! 이름은 차훈이랬어. 얼굴도 만화 찢고 나온 것 같이 생겼으면서 어떻게 이름도 막 로맨스 만화 같은 데서 나올 것 같지. 진짜, 진짜, 너무 예쁘다.
동성은 훈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을 느낀 훈이 그쪽으로 살짝 돌아보고 나서야 놀라서 재현에게로 눈을 옮겼고, 그러다 재현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다시 놀라 자신도 살짝 인사하고 이내는 카메라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꽤나 오랜만에 집어 든 카메라였다. 중학교 다닐 땐 항상 카메라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찍고 싶은 것이 생기면 찍곤 했는데, 졸업하고 고등학교 간다고 좀 쉬고, 이리저리 준비하다 보니 카메라를 꺼내든 지는 오래된 것이었다. 그래서 잘 찍히긴 할까 걱정도 되고, 카메라를 들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을 찍는 동성을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도 염려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버스킹이 시작되자마자 동성은 그런 걱정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훈을 찍었다.
무대하며 빛나는 훈의 모습, 그리고 해가 저물어가는 번화가의 무드 있는 가로등 덕에 동성은 사진들을 보며 만족했다. 물론 사진 찍는다고 노래를 듣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차분히 1열에 앉아서, 제가 아는 노래는 따라 부르기도 하고, 열심히 호응도 해가면서 또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더 신이 난 것도 있었다.
버스킹이 끝나고 한산해진 거리, 밴드부는 악기 정리를 하고 있었고, 동성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눈치를 보더니 리더로 보이는 키 큰 형에게 쪼르르 다가가 카메라를 보이며 말을 걸었다.
"저기... 제가 찍은 사진들 SNS에 올려도 될까요? 절대 나쁜 의도는 없구요! 그냥 무대하시는 게 좋아서 몇 장 찍었는데,"
"아 당연히 되죠. 근데 허락은 저 말고 쟤한테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렌즈가 거의 훈이만 향해 있던데?"
생글생글 웃는 승협의 말에 훈 쪽을 본 동성이 얼굴을 붉혔다. 훈은 그냥 승협을 보고 고개만 끄덕였다.
"안 될 것 없어요. 뭐 저희야말로 찍어주시면 감사한 거죠. 우리 학교 학생이죠?"
"앗, 네...! 입학식 때 공연하신 거 정말 잘 봤어요."
"훈이만 본 건 아니고요?"
"아, 형- 애한테 왜 그래."
"하핫, 농담이에요. 잘 들어가요."
동성은 카메라 가방을 고쳐 메고 그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꽤나 가까이서 마주쳤던 훈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대박이었다. 딱 떨어지는 턱선 하며, 엄청 진하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쌍꺼풀, 거기다 긴 속눈썹, 특히 시옷자 입술이 기억에 남았다. 버스에서 사진들을 확인했다간 멀미 걸려 오히려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아 얼른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아까 거리에서 약간 확인한 거로 봐선 거의 잘 나온 것 같던데. 하긴 본판이... 크흠. 밴드부 전체 샷도 몇 장 찍었는데, 정말 저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를 하면서 저렇게 빛날 수 없었다. 미쳤나 봐, 진짜.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인★ 계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컴퓨터 앞 의자에 뛰어들어 카메라를 꺼내고, 폰을 집어 들었다. 본명을 쓰긴 조금 그렇고... 이름을 뭐로 해야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날까. 그렇다고 진짜 소문이 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름 세자 서동성 걸어놓고 훈 선배 사진만 쫘르르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나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럴 일 없으려나. 어차피 학교 내에서 밴드부는 되게 유명하던데...? 그럼 착각할 일도 없지 않을까. 아잇, 아냐. 그냥 닉네임으로 쓰자.
'야 닉네임 추천 좀'
'? 갑자기?'
'아 그냥 나 하면 생각나는 거 있잖아.'
'돌'
'...? 너무 뜬금없는데.'
'까맣잖아.'
'...'
끙... 이재혁 이 자식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었어. 돌... 그냥 돌이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돌... 돌멩이? 까맣, 까맣... 음... 흑멩이? 괜찮나? 어차피 이 이름으로 무슨 활동을 할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할까?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동성의 세미 홈마 활동이 시작되었다. 학교 내에서 이미 인기 있는 밴드부였고, 밴드부를 좋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동성은 이미 유명 인사였다. 하긴, 자기네 학교 밴드부를 카메라로 찍으러 다니는 학생은 잘 없다. 밴드부의 버스킹이 있던 다음날이면 훈의 사진이 동성의 게시글로 올라왔고, 그 존재를 밴드부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까, 버스킹이나 다른 공연 같은 것들을 다닐 때마다 항상 보이는 카메라. 모르는 게 이상했다.
"오늘 축구 알지?"
"..."
"야."
"..."
바로 앞에서 자기가 말을 거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폰만 들여다보는 동성이 못마땅했던 재혁은 그의 책상을 쾅 쳤고, 그제야 재혁에게 관심을 주는 동성이었다. 아무래도 외장 하드를 연결해 보정할 사진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혁은 엄청 서운하다는 얼굴로 동성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동성의 눈빛은 딱 간결했다. 뭐, 왜, 뭐.
"오늘 애들이랑 축구 뛰기로 했잖아."
"아, 나 오늘 못 가는데..."
"왜."
"버스..."
"버스킹 떴지."
"어... 미안. 다음엔 진짜 축구하러 가자."
한숨을 푹 쉬는 재혁의 뒷모습까지 지켜볼 만큼 동성은 한가하지 않았다. 아직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며 어떻게 색감을 잡을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재혁에게는 좀 이따 마이쮸 하나를 조심스레 쥐여줄 생각이었다. 그가 많이 서운해할까 걱정도 조금 되긴 했지만 그는 동성이 훈을 정말 좋아함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었다면 모르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깊은 마음은 동성도 몰랐다. 동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냥 단순 팬심 비슷한 것으로 알고 딱히 궁금해하진 않았지만 동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성과 하루 종일 같이 다녀본다면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야, 너 그 형 좋아하지?"
체육 시간에 축구를 막 달리다 남은 시간, 스탠드에 앉아 땀을 식히며 쉬는 와중에 갑자기 재혁이 던진 질문은 동성이 당황시키기 시기적절했다. 그저 동성이 제 마음을 동경이라고 치부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 질문에 붉어지는 자신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느끼면서 동성은 훈을 향한 제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그저 동경, 그리고 팬으로 그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여기기엔 그런 경로를 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동성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래 보여?"
"어, 존나."
"그래?"
입학식 때 훈을 처음 보고 느꼈던 그 두근거림도, 버스킹 무대를 하며 빛나는 훈을 보며 함께 웃었던 것도, 제가 찍은 훈의 사진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신나게 색감을 만지는 제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흘려보내며 동성은 마음에 한 문장을 정립했다. 나, 훈이 형 좋아해.
그러니까, 팬 같은 걸로서 정말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알잖아. 그런 거.
뭔가 달랐다. 그냥 제가 훈을 좋아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저 혼자 느끼고 있고 전혀 그에게 표출할 수 없는 감정임에도 뭔가 달랐다. 더 설레고, 더 많이 웃고, 왠지 더 보고 싶은 것만 같은. 이상하게 버스킹 소식이 더 기다려지는. 아, 다음 주부터 시험 준비 들어가야 하는데. 버스킹 하면 어떡하지. 달려가야겠지? 그치, 그치. 당연한 걸 굳이 고민하고 앉아있어.
"자는 애들 다 깨워라- 저번에 어디까지 했어."
"49페이지요-"
7교시 끝나자마자 버스킹 한다고 알림 와있으면 좋겠다. 동성은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가방 던지고 카메라 들고 달려갈 희망찬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옆에 앉아있던 재혁만 쟤 왜 저래, 하며 역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원자들의 폭격에 아이들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고, 역시나 동성은 끝까지 남아있는 멤버들 중 한 명이었다. 알칼리 금속이니 할로젠 원소니 하는 것들은 동성이 버스킹 보고 싶다는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훈을 볼 생각만 해도 에너지가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지루한 과학 시간에 데미지를 전혀 입지 않을 정도로.
정말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하였는가, 그것이 방금 동성에게도 일어났다. 사막 같은 과학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주섬주섬 교과서와 초크 펜들을 챙겨 앞문을 나서시자마자 잠금 화면을 켰더니 보이는 인★ 아이콘에 스트라이크, 지문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상태 바를 열어 그것이 밴드부 알림이어서 투 스트라이크, 그리고 그걸 열었더니 보이는 '버스킹' 세 글자에 스트라이크 아웃당한 동성은 심장을 부여잡고 옆의 재혁에게 보여주었지만 재혁은 이미 저 멀리 꿈나라 일주를 떠나버렸다.
보통 학생들이면 종례 전에 하는 청소를 정말 귀찮아해서 설렁설렁하기 마련...인데. 풀 파워 상태의 동성은 청소에도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나보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신명 나게 복도를 쓸고, -중간에 쓰레기를 누가 발로 밟아서 흩어지긴 했지만- 걸레 당번에게 걸레도 받아 밀대로도 신나게 밀었다. 깨끗한 1학년 4반 복도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거의 해외투어 마친 톱스타였다.
"야- 서동성- 축,"
"아, 쟤 오늘, 버스킹."
"아."
"진짜 미안, 다음에는 진짜 진짜 같이하자."
친구들에게 손까지 모아가며 사과를 하는 동성의 얼굴은 굉장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쟨 지금 미안한 걸까, 기분이 좋은 걸까. 한껏 업된 폼으로 뛰어가는 동성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친구들은 재혁에 의해 축구공과 운동장으로 끌려나갔다.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대하는 훈을 보며 에너지 만땅도 모자라 이만땅 채운 동성은 밴드부원들이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일어나 카메라를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위잉- 이잉- 존재감을 내비치는 폰에 반응을 해주지 않을 수 없어 한 팔에 카메라를 안고 폰을 꺼내려는데,
'쿠당, 데구르르-'
"어어...!"
렌즈 캡이 끼워지다 말고 떨어져 저 멀리 굴러가는 것을 보고 자연스레 잔걸음을 뛰었고, 렌즈 캡에 시선을 고정하고 가다 보니 한 손이 그걸 잡는 것도 보았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손의 주인이 훈인 것도 보았다. 동성은 너무 놀라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다 카메라도 중심을 잡지 못해 그걸 본 훈이 또 '어어...!'하며 고쳐 잡아주었고, 그제야 정신이 반쯤 돌아온 동성은 제 카메라를 똑바로 들고 훈에게서 렌즈 캡을 받아 끼웠다.
"가, 감사합니다."
"카메라 비싸잖아요. 조심해야지."
"느, 네. 그렇죠. 카메라, 비싸죠. 그죠. 많이 비싸죠..."
"이제 저녁시간인데 얼른 집에 들어가요, 조심하고."
"네, 서, 선배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툭-'
겨우 정신줄 마저 잡고 카메라를 가방 안에 조심히 넣은 동성은 훈에게 꾸벅 90도 인사를 하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 마음대로 하자면 절대 벗어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그대로 있었다가는 심장이 뻥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그 거리에서 점점 멀어지고, 집에 점차 가까워지면서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 내가 다 형을 좋아한다고 느끼고 있어서 오는 건가? 좋아하면 이런 건가?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 돗자리 깔고 앉아버린 설렘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그 설렘은 딱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서 동성에게 자꾸만 물음표를 건넨다. 그럼, 그 형이랑은 어떻게 가까워질 건데? 사귈 거야? 어떻게? 그리고 동성은 한 가지의 답변으로 일관한다. 안 생각해봤는데.
동성은 훈과 지금 이 관계 이상의 무언가로 발전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훈이 좋았다.
"야, 서동성-"
"어?"
제 이름이 불려 교실 뒷문 쪽으로 고개를 틀어보니, 어, 리더 형...? 여긴 왜 오신 거지. 왜 날 찾는 거고...
"여긴 어쩐 일로..."
"이거요, 학생증. 떨어트렸더라고요."
"헉, 제 거네요."
승협이 건넨 노란 목줄 학생증엔 동성의 해맑은 얼굴과 함께 친절히 서. 동. 성. 이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에 새겨진 1학년 4반 12번도 확실했다. 아, 어제 급하게 집에 간다고 떨어뜨렸구나. '아-'하고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동성을 보며 승협이 슬며시 웃었다.
"그럼 가볼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해요, 학생증."
승협은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되게 뭔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입을 꾹 다문 채 그 자리를 떠났고, 승협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동성은 학생증을 꼭 쥐고 반에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학생증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초록색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 접힌 정석적인 쪽지였다.
'매니저 할 생각 있어요?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010-xxxx-xxxx.'
"으아아아아아아악!!!!!"
"뭔데?" "뭐야." "깜짝이야." "뭔 일인데."
반 친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것이냐가 가장 중요했다. 이게 뭔 상황이지? 나 보고 매니저를 하라고? 밴드부 매니저겠지? 그치, 리더 형 개인 매니저를 구하진 않을 거 아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율동아리 밴드부가 되는 건가? 그럼 밴드부 연습에도 같이 있나? 그, 그럼 훈이 형도 자주 보는 건가? 근데 애초에 왜 나를...? 나보다 꼼꼼한 애 뽑으려면 뽑을 수 있을 텐데.
동성은 설렘 반 의심 반으로 쪽지를 주머니에 꼭 넣었다. 내가 밴드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사실 매니저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것부터 여쭤봐야지.
"아까, 왜 소리 질렀냐?"
"어, 그게 그, 밴드부에서 매니저 할 생각 없냐고 그래가지구..."
"와, 뭐야 너 성공했네-. 대박이다 진짜."
재혁의 표정은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짜식-' 괜히 자기가 키운 것 같은 표정으로 보는 재혁이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동성은 그냥 뭔가 자신에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던 참이라 넘어가기로 했다.
"야, 내가 이거 해도 되는 거겠지?"
"당연하지, 인마. 너 같이 그 밴드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확히는... 그 형을 좋아하는 거지만."
"흠..."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어.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한다며. 매니저 하면 찍을 시간도 많겠네."
거의 그냥 들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재혁의 말에 동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들어간다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기회인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여보세요?"
'쿠당탕탕탕-'
"야 후나- 너네 애기 전화 왔다-"
"아악 시발 그걸 왜 니가 받아!!!"
"동성 씨 맞죠? 지금 훈이가 절 패려고 아아악!!!"
"맞...는데..."
"아, 안녕하세요."
"혹시 차훈 선배님 전화번호였나요...?"
"아, 몰랐어요? 하긴, 승협이 형이 갔으니까... 생각은 해 봤어요?"
"네, 네... 혹시 매니저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별거 없어요. 저희 SNS들 있죠? 걔네만 좀 관리하고, 동성 씨 원래 사진 많이 찍었잖아요."
"네, 네."
"쪼-끔 더 많이 찍어주면 돼요. 할래요?"
"네! 하, 할게요."
"그러면은 일단 내일 방과 후에 밴드부실로 올래요? 어딘진 알아요?"
"아, 아뇨..."
"예술관 있죠, 제일 안쪽으로 들어오면 동아리 연습실이라고 적혀있을 거예요. 내일 봐요?"
"앗, 네네!"
'뚝-'
되게 시끌시끌하다. 지금 이 시간까지 밴드부실에서 연습하는 건가? 대박... 형이 되게 또박또박 말해줘서 잘 들리긴 했는데 형 목소리 조금만 작았어도 다 묻혔을 것 같아... 아니 잠시만 나 방금 훈이 형이랑 전화한 거야? 미쳤나 봐.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고? 나 진짜 바보인가.
그럼 나 이대로 밴드부 들어간 건가? 이제 밴드부 매니저인가? 맞겠지? 꿈 아니겠지? 생시겠지? 막 지금 눈 감았다 뜨면 '악 X발 꿈' 이런 이미지 내 눈앞에 떠 있는 거 아니겠지? 이거 꿈에서 자기가 꼬집으면 아프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꼬집어 주라고 그랬는데.
으아악! 동성은 지각할 정도로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닌데 시간을 보고 괜히 소리를 질러 아직 자고 있는 가족들의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젯밤 잠들려고 침대에 누워서, 내일은 진짜 신경 써서 머리라도 정리하고 가야지, 하고 다짐을 한 탓이었다. 그래서 더 일찍 일어나려고 삼십 분 일찍 알람을 맞춰놨더니, 원래 일어나던 시간보다 삼십 분을 늦게 일어나 버려 동성이 저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냥 씻고 옷 입고 나가면 딱 맞을 시간이었지만. 동성의 다짐에는 크게 빗나가서 그랬으려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밴드부실에 들어가겠다는 동성의 계획은 처참히 무너졌다. 지나치게 평소와 같은 제 모습이 조금은 마음에 안 들긴 했으나 어쨌든 제일 자연스러우니 괜찮다고 자기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똑똑-’
“야, 왔나봐, 왔나봐, 왔나봐.”
“뭐? 아직 준비 안 됐는데.”
‘쿠당탕탕-’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잠깐만!”
"네...!"
“야야야 그거 거기 아니야!”
“그럼 어디 놔요?!”
“그냥 아무 데나 놔!!”
“아니 그럼 아까 거기 놔뒀음 됐잖아!!”
제가 오기 전에 무슨 비밀 조직 회의 같은 거라도 하고 계셨나요.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동아리실을 뒤엎을 리가...
“들어와-.”
‘철컥-’
동성이 들어갔을 땐 의외로 깔끔한 동아리실이 눈에 들어왔다. 악기들도 잘 정돈되어 있고, 딱히 쿠당탕탕탕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정리한다고 그렇게 쿠..당탕탕탕 하신 건가. 동아리실을 둘러본다고 정작 중요한 걸 못 봤던 동성은 네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승협, 훈, 재현, 회승. 이렇게 네 사람은 교실 가운데에 의자 네 개를 일자로 놓고 각자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것이, 뭐랄까, 오디션... 느낌. 그러니까 심사위원 말고, 막 무대 준비해 온 참가자 느낌. 그렇지만 네 명의 표정은 각기 다 달랐다. 승협은 이 상황이 너무 웃기지만 웃지 않겠다는 결심이 역력히 보였고, 훈은 이마에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가 쓰여 있었다. 재현과 회승은... 딱 그거다.
어서 와. 밴드부는 처음이지?
굉장히 앉으라는 듯이 놓여 있는 한 의자에 동성이 슬금슬금 다가가 앉았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직되어 있었는데, 동성과 네 명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고요를 깨부순 것은 승협의 웃음이었다.
“아, 진짜. 이걸 왜 하자고 해가지고. 애 겁먹었잖아!”
“몰라. 다 김재현 유회승 아이디어야.”
“괜찮지 않아? 난 되게 재밌는데.”
“형, 재미없었어요.”
“아니 너도 좋아했잖아-”
이 난장판 속에서 동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중 훈만이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 말 편하게...”
“그럼 우리 이제 매니저 생긴 거야!?”
“재현이 형 또 흥분한다.”
“그럴까? 너도 말 편하게 해.”
“저는 아직 이게 편해가지구...”
“그럼 선배님 말고 좀 편하게 형이라고 하든가.”
“아, 네!”
훈의 앞에서 자꾸만 붉어지려는 볼을 식히는 것은 동성의 과제 중 하나였다. 지금 훈에게 있어서 동성은 그저 자기 사진을 찍고, 이젠 밴드부의 매니저가 된 신입생일 뿐이니까. 제가 그를 혼자 좋아하고 설레하고 난리 친 건 자기 일이고, 훈은 그것을 다 모르고 어쩌면 그동안 동성을 아예 몰랐으니까.
“형, 그... 서동성이란 애 있잖아. 우리 매니저로 들이면 어때?”
가만히 의자에 앉아 무심한 기타 줄이나 튕기던 훈이 갑자기 승협에게 신선한 제안을 하자 승협은 잠깐 당황했지만 금세 훈의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서동성이라면, 우리 공연 때마다 사진 찍으러 다니던 애인데.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훈일 따라다니는 애지만.
훈의 손은 기타에 있었지만 시선은 탁자 위에 올려둔 동성의 학생증에 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속 남자아이를 보며 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이거, 차훈 사심이 좀 많이 들어간 제안 같은데?”
“아 무슨 소리야. 걔가 우리 사진도 많이 찍고 지금 우리 SNS도 관리해야 하잖아.”
“안 해도 되는데? 회승이가 잘하고 있는데?”
“아, 됐어. 그럼.”
심통이 난 훈이 승협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자 승협이 그제야 활짝 웃으며 훈에게 가 팔을 감았다.
“이야, 드디어 차훈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뭐?”
“아냐? 너 동성이란 애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무대 하면서 다 봤지. 물론 걔는 카메라에 눈 대고 있느라 네가 걜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 알고 아까 그렇게 날 놀렸다는 거지?”
“어... 그렇지?”
훈은 우이쒸, 하며 승협 쪽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보통 명중률이 매우 낮았던 훈의 주먹은 이상하게 승협의 명치에 제대로 꽂혔다. 으어억, 곡소리를 내며 승협은 주저앉았고 훈은 자기도 정말 맞을 줄 몰랐는지 어어 형 괜찮아? 라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뒤이어 매점에서 무언가를 잔뜩 사 온 재현과 회승도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다행히 훈의 힘은 그렇게 세지 않았다. 사실 재현의 입엔 이미 치즈 브레드가 물려있어 발음도 알차게 물렸다.
훈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훈을 승협보다 훨씬 알뜰히 놀릴 수 있었던 그들이기에 훈은 이야기를 꺼낸 것을 살짝 후회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동성이 수락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동성이 밴드부에 들어와 같이 동아리를 할 생각을 하니 좋기도 하고.
“아, 그러면 형. 내일 형이 이것 좀 걔한테 전해줘. 매니저 얘기도 같이 하고.”
“왜? 네가 가면 더 좋아할걸?”
“아 내가 직접 어떻게.”
“차훈 선수,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승 캐스터?”
“제가 훈이 형을 본지 거의 10년이 다 돼가는데 이런 모습 처음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히도 승협은 훈을 도왔다. 반만. 반만 도왔다. 승협이 동성의 학생증 케이스 사이에 끼워서 준 초록색 쪽지에는 승협의 전화번호가 아닌 훈의 전화번호가 적혔다. 그리고 그 사실을 훈이 알았을 땐 다시 명치를 매우 세게 맞을 뻔했다. 왜! 왜! 내 전화번호를 주냐고! 왜!
승협을 매우 원망하며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던 훈이지만 동성에게서 전화가 올 생각을 하니 뭔가 조금, 간질거리기도 하고. 목소리도 몇 마디 못 들어봤는데. 저번에 살짝 들었던 목소리는 되게 얼굴이랑 잘 어울렸지. 동글동글하고, 귀엽고, 해맑고.
아니 내가 언제 우리 애기라고 했냐고. 김재현 진짜 아아악!! 죽여 버려!! 들었으려나? 들었겠지? 그렇겠지? 다 알았겠지? 걘 진짜 팬심으로 사진 찍으러 다니는 걸 수도 있는데 김재현 저거부터 김칫국 사발로 들이부어 마셔가지고 저거 진짜. 인생에 도움 되는 일이 없어요, 저 생명체는 진짜.
“김재현... 죽여 버릴 거야...”
“아 왜앵- 맞는 말 했잖아.”
“아니 걔한테 다 들렸을 거 아냐. 걔가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걘 진짜 단순 팬심일 수도 있는 걸 너는...”
“난 백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난 절대 걔가 단순 팬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치 회승아?”
“엥(넹)? 어우 으어게 애아애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피자 빵 마저 먹어...”
“엥(넹).”
훈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제 신세를 한탄했다. 내가 왜 김재현 같은 것을 친구로 두고 있어서... 왜 쟤가 한 행동 때문에 내가 이불을 발로 차고 있는 거냐고... 아으 진짜.
“동성아, 오늘 버스킹 공지 좀 올려줘.”
“넹-”
회승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오늘 매점에 새로 들어온 신상 과자를 품평하고 있던 동성은 과자 기름 묻은 손을 휴지에 슥슥 닦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폰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정말 매일매일 손꼽아 기다렸던 버스킹 공지를 쓰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승협이 써 달라고 할 때마다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면서 버스킹을 기다리던 제 설렘을 그대로 글에 담았다. 동성이 밴드부의 매니저로 들어갔다는 소문은 학교에 만연하게 퍼져 있었고, 이따금 밴드부가 버스킹을 하는 동안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동성의 모습이 찍혀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를 귀여워하는 학우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동성이 찍힌 사진에 달린 하트들을 보여주며 그를 이야- 하며 치켜세워주면 동성은 먹으려던 과자를 입에 물고 제 폰을 들어 훈의 사진에 달린 하트들을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훈은 빨개지려는 제 귀를 일부러 숨기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미 동성은 빨갛게 물든 훈의 귀를 본 뒤였다.
“아, 맞다. 책 하나 안 챙겨왔는데. 귀찮아...”
“엉? 저 지금 반에 가야 되는데. 형 몇 반이었죠? 가는 길에 가져다줄게요.”
“나 7반. 너 바로 옆 반이잖아.”
“아 참 그랬지.”
“형들 근데요, 저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뭔데?”
“회승이 형은 훈이 형이랑 재현이 형이랑 같은 학년인데 왜 형이라고 해요?”
“아, 회승이 빠른이야. 우리랑은 엄청 어릴 때부터 봤어서 그냥 형이라고 하는 거고. 완전 족보 브레이커지?”
“아...”
동성의 머릿속에서 재현의 말대로 관계도가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족보 그거 뭐 중요하다고...
어느새 화장실에서 귀를 잘 식히고 온 훈이 동성의 앞에 놓여있던 비스킷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는 만족의 표정에 괜히 뿌듯해지는 동성이었다. 헤헤, 아침에 제일 먼저 가서 사 온 건데.
밴드부에게는 시험 기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 물론 동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중간고사가 코 베일 듯이 앞으로 다가오자 동성은 승협에게 말하고 도서관에 가곤 했다. 학교 바로 앞에 있지만 내리막길을 모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아주 불편한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가까이 있어 준 덕에 동성은 저 멀리 버스 타고 가야 하는 도서관까지는 갈 필요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면 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집으로 금방 갈 수도 있었다. 나름 최적의 장소였을지도.
동성이 밴드부의 매니저로 들어온 지도 대충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던 참이었다. 그래서 동성이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간 연습실은 어딘가가 살짝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같이 연습을 하는 건 아니지만 노래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격렬-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반응을 보여주었던 동성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연습을 하면서 시선을 앞으로 처리할 때마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우물우물 먹고 있던 녀석이 없어서 그런 건지.
“왜 이렇게 힘이 안 나냐.”
“꽤 한 것 같은데 오늘 여기까지만 할까요?”
“그럴까? 오늘 좀 쉴까?”
뭔가 연습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훈은 폰을 들어 시간을 봤다. 뭐, 계속 도서관에 있겠지?
“야, 차훈- 집에 갈 거지? 같이...”
“아니. 나 오늘 도서관 가게.”
“에? 너 공부 안 하잖아.”
“할 거거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재현 해설위원님-”
“아, 제가 차훈을 태어난 지 한 달 차쯤부터 본 것 같은데 공부를 하겠다는 건 처음 봅니다-”
“뭔 내가 공부를 평생 안 한 것처럼 말해.”
“맞는 말이잖아.”
“아아잇, 자꾸 그러지 마. 훈이 동성이 보러 간다잖아.”
“형!”
재현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쫙 벌리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회승도 놀라 입을 벌렸지만 두 사람을 함께 두고 보니 입 크기 차이가 더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훈은 꼭 그 모습을 찍어 놓고 싶었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 쓸 시간은 없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대충 가방에 짐을 때려 넣은 훈이 먼저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사실 그 대망의 오르막길 때문에 훈은 그 도서관에 가는 걸 매우 꺼려했지만,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아씨, 그냥 학교랑 도서관 사이에 길 하나 뚫으면 내리막길만 살살 걸어갈 수도 있는데. 왜 사람들은 굳이 그 길을 만들지 않는 거지. 돈이 안 되나.
제1열람실, 제2열람실... 어디 있지.
훈은 위쪽만 투명한 문으로 안을 보다가 동성을 발견하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정식과 세기의 전쟁을 벌이던 동성은 누군가가 열람실에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진 못했고, 훈이 그의 옆자리 의자를 빼 앉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인식했다. 열람실이라 말을 할 순 없고, 대신 자신이 열심히 미지수 x와 싸우던 연습장에 글씨를 써 그에게 이야기했다.
‘형이 여긴 웬일이에요?’
‘공부.’
‘형 수학도 다 찍고 잔다면서요.’
‘조용히 해.’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반쯤은 맞는 말에 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되게 뿌듯하다는 듯이 저를 보고 웃는 동성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었다. 그냥 좀 귀여웠다. 옆에서 집중하는 동성을 보면서 자기도 뭘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책가방에 쑤셔 두었던 수학 I 교과서를 꺼냈는데, 분명 수업을 들은 내용임에도 뭐가 뭔지 몰랐다. 굳이 왜 로그를 쓰는 것이며... 굳이 왜 그것들을 함수로 나타내는 것이며... 난 왜 그걸 그래프로 그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며... 옆에 회승이 있었다면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 옆에 있는 건 1학년인 동성이었다.
그래, 일단 부딪혀보자! 라고 야심 차게 샤프를 집어 들었던 훈은 대충 한 시간 만에 곯아떨어졌다. 합주로 이미 피로도를 많이 쌓은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수학 용어까지 맞닥뜨렸으니 순식간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훈의 허리 각도가 점점 숙여지며 어느새 이마가 책에 닿는 순간까지 지켜본 동성은 교복 셔츠만 입고 있는 훈에게 재킷을 벗어 덮어주었다.
“으... 음?”
“일어났어요?”
“...말해도 돼?”
“아무도 없어요. 시계 좀 봐요.”
겨우 잠에서 깬 훈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시계를 찾았다. 벽 한가운데에 떡 하니 걸려있는 시계는 점점 서로의 간격이 가까워지다 멀어지는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건지 대충 계산해보고 히익- 소리가 나온 훈은 어느새 동성의 수학 문제집이 국어 교과서와 필기 노트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았다.
“너 되게 열심히 한다. 집에 안 가도 돼? 곧 도서관 닫지 않나?”
“11시에 닫는데, 이것만 정리하고 나가면 딱 맞을 것 같아요.”
동성이 거의 노트 끝자락에 글자를 끄적거리는 것을 보고 곧 끝나겠다 싶어 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방 구석에 넣어놓았던 초코 소라 빵과 초코 우유도 같이 꺼내 놓았다 책들 위에 얹었고, 동성은 그것을 힐끔 보고 훈이 단 음식을 좋아한단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겼다.
“다 했다, 이제 갈까요, 형?”
“넌 어떻게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냐. 허리 아파 죽겠어.”
“형이 몇 시간 동안 엎드려 자서 그래요. 그러니까 허리가 아프지.”
“정곡 찌르지 마.”
“헤헤, 어서 가요.”
불이 다 꺼진 도서관 복도는 살짝 으스스했다. 훈은 원래 이런 것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성정이었지만 동성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훈의 앞에서 참을 정도는 되었다. 어차피 옆에 훈이 있는데, 그렇게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도서관을 나가기만 하면 가로등들이 줄지어 서 있고, 조금만 더 나가면 거리에 차들이 나다닌다.
“저녁은 제대로 먹었어?”
“형 혼자 두고 가서 먹기 뭐해서 그냥 안 먹었죠.”
“그렇다고 굶나. 그냥 나 깨워서 같이 먹으러 가도 되는데.”
“형이 너무 곤히... 편하게... 자고 있어서.”
“야.”
왠지 훈을 놀리는 듯한 동성의 어투에 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아까 가방 맨 위쪽에 잘 놔두었던 빵과 우유를 다시 꺼내 동성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먹어. 단 거 좋아해?”
“헐, 네. 좋아해요.”
“그냥 먹는 건 다 좋아하잖아.”
“들켰네.”
훈은 동성이 빵을 잘 잡고 먹도록 우유를 들고 있었다. 어딘가가 엄마가 아들을 챙기는 듯한 모습이 살짝 보이긴 했지만 훈은 애써 그 느낌을 무시했다. 그냥 제 앞에서 맛있다는 표정으로 빵을 오물오물 먹는 동성의 볼이 귀여웠다. 동성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7분 후 도착이었고, 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4분 후 도착이었다. 동성이 빵을 다 먹고 손가락을 빨아 먹는 중에 훈이 타야 할 버스는 지나갔고, 훈은 그 사실을 숨겼다. 그리고 동성은 방금 자신이 본 버스가 훈의 집으로 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목 막히겠다. 마셔.”
“형은요? 형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괜찮아요?”
“어. 난 원래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배 안 고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하루 세끼는 챙겨 먹어야 든든하죠.”
“너나 많이 먹어. 자. 내가 따줄게.”
동성의 입에 무언가가 들어가는 순간엔 둘 사이에 고요가 흘렀다. 동성은 먹느라 말을 하지 못했고, 훈은 꺼낼 말을 찾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다. 동성의 입가에 초코 우유가 묻은 걸 보고 닦아 줄까 했던 훈이지만, 금세 동성의 혀가 그 자리를 지나며 자국을 없앴다. 혼자 머릿속에서 북치고 장구 치고 잘 놀던 훈과 달리, 동성은 지금 고백을 할지 말지를 머릿속 꽃잎을 떼어 가며 점을 치고 있었다. 훈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본 순간 시작된 꽃잎 점이었다.
지금 훈이 형에게 고백을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나 오늘 여기 도서관 처음 가 봤다? 올라가는 거 너무 힘들더라.”
한다.
“너 가고 우리 다 힘 빠져선 연습 조금만 하고 나왔잖아.”
안 한다.
말을 하지 않고 제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동성이 이상하긴 했지만 훈은 그 고요를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자꾸 말을 꺼냈다. 자그마한 적막이라도 훈에겐 커다란 풍선이 되어 덮쳐왔기에. 그 풍선에서 바람을 빼려고 작은 바늘로 구멍이라도 내려 쑤셔보는 훈이었다.
“우리 학교에 고양이 가족 있는 거 알아? 엄마 고양이랑 아기 고양이랑 이렇게 두 마리 있는데. 작년에 선생님들이 가여워서 돌봐주기 시작하셨대.”
한다.
“다른 애들이 궁금해서 찾아가면 숨는데, 내가 가면 와서 손에 비비적거리더라. 진짜 귀여워. 내일 나랑 같이 보러 갈래?”
안 한다.
“동성...아?”
한다.
한참을 멍하니 훈의 얘길 들어주며 끄덕거리거나 고개를 젓기만 했던 동성의 머릿속에서 모든 꽃잎이 떨어지고 마치 꽃눈같이 생긴 것만 남았다. 지금 제 앞에 있는 훈의 표정은 꽤나 재미있었다. 다 읽히는 느낌. ‘내가 뭘 잘못했나?’
“형.”
“어?”
“저 형 좋아해요.”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훈의 귀를 보면서 동성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형도 저... 좋아하죠?
그렇죠? 그렇다고 어서 말해줘요.
“그러니까 네가 지금 하는 말이,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는 그거요. 그거 맞아요. 그러니까. 형은요?”
훈은 저 말에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간질거리고, 누군가 심장에 강아지풀을 가져다 대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니,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나도 널 좋아해. 응, 나도 그래. 그럼 그다음은? 그다음은 뭐라고 해야 하지? 다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인데.
훈이 동성을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동성은 순간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훈의 귀를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물음표만 여러 개 띄웠다. 훈이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제 손을 흔들어 보여도 훈은 미동조차 없었다. 동성은 에잇, 하고 훈의 손을 들어 제 얼굴에 댔다. 화들짝 놀라는 것이 손에 바로 느껴졌지만 동성은 입을 열었다.
“형, 저 안 좋아해요?”
“...아니, 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럼 좋아해요?”
“...”
너무 간지러워서,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어.
“응?”
“어, 나도 너... 좋아해.”
뱉었다, 말했다, 다 했다.
훈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동성은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가져다 댄 훈의 손에 볼을 비비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기 강아지였다. 히히,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어, 버스 왔다. 형 저 먼저 갈게요! 집에 잘 들어가고요, 내일 봐요!”
“어? 어어, 어어... 잘 가.”
동성은 버스에 타고 나서까지 정류장에 앉아 있는 훈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었고, 훈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가, 버스가 떠나고 제 집으로 가는 버스가 4분 남은 것까지 확인 후 벌게진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아, 미쳤나 봐. 차훈. 왜 이렇게 띨띨해가지고. 왜 제대로 말을 못 해. 말을 못 하냐고. 좋아하면 좋아한다, 그러니까 사귀자. 왜 말을 못 하냐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오늘 일어난 사건이 실감 난 동성은 이불을 아주 그냥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고 베개를 집어 던지고 난리가 났다. 그러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한 바람에 지나가던 그의 동생이 아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야기했다. 엄마, 형이 드디어 미쳤나 봐.
동생의 혐오 발언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방금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내었는지에 대해 낱낱이 되짚어 본 다음에야 동성은 마음 놓고 기뻐했다. 아까 그 꽃눈 비슷한 형체로 보였던 것은 다시 활짝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꽃을 심장 어디 한 구석에 고이 넣어 두었다. 다시는 꽃잎을 떼지 않을 것이다.
하트 붙여도 되나...?
“어? 사진 바뀌... 야. 미친. 성공했냐?”
동성의 사물함 문짝에 붙어있던 훈의 사진이 둘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뀐 것을 확인한 재혁이 동성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동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손으로 브이-만 만들 뿐이었다.
“아, 형, 좀 웃어 봐요.”
“난 이게 디폴트 표정이라니까.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
“에이 형 웃는 게 얼마나 예쁜지 알아요?”
“애가 낯간지러운 소리도 잘도 한다, 진짜.”
“형 귀 빨개졌다.”
“아악, 있는 힘껏 웃을 테니까 그만해.”
‘찰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