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왔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졌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저마다 어떤 옷을 입을지를 고심하며 가지마다 꽃눈을 만들어 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나온 색색의 꽃들이 앙상한 가지를 뒤덮을 터였다.
가장 먼저 꽃을 틔운 나무는 매화였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울타리 너머로 흰색 꽃잎이 넘어왔다. 산 밑에서 하늘하늘 길을 따라 올라온 매화 꽃잎은 집 마루 위에 안착했다. 누가 사는지 모를 집에서는 희미한 감초 향이 새어 나왔다.
“정이! 안에 있는가?”
“예!”
사립문이 나무 닳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따금 사립문을 밀고 찾아오는 노인들은 안쓰러움 반, 안타까움 반으로 혼자 남은 이 젊은 의원의 말 상대를 자처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들어오는 박 씨의 얼굴엔 저번보다 주름이 두어 개 더 있었다.
“글쎄, 아랫집 동성이가 말일세. 며칠 전부터 아프다, 아프다 말을 하지 뭔가. 새로 온 의원한테도 데리고 가봤는데, 그 솜씨가 영 좋지 않아 말이야. 정이 자네 실력이 워낙 좋아야 말이지. 그래서,”
“어찌 아프다 하던가요?”
“정이 자네 정말... 그래, 배에서 뭐가 쿡쿡 찌르는 것 같다고 하던데. 아, 그리고 죽도 못 먹겠다 그리 소리를 치더구만. 덕분에 그 집 새댁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자세한 건 봐야 알겠지만...”
젊은 의원은 천장에서 달랑거리던 홀쭉한 주머니에서 꼬들하게 마른 약초를 꺼냈다. 작은 책상에 깔아둔 흰 종이 위로 가지각색의 갈색 약초들로 만든 작은 산이 생겼다. 젊은 의원은 볼록한 렌즈에 약초를 이리저리 비춰보고, 만족한 듯 종이를 모아 주머니로 만들었다. 얇은 흰 종이는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위에 놓인 것들을 단단히 감쌌다.
“한 식경 충분히 달여서 하루 세 번 식후에 마시라 하세요. 금방 나을 겁니다.”
“정이 자네가 지어준 약이면 아랫집 새댁도 한 시름 덜겠구만.”
달랑거리는 흰 종이 꾸러미가 박 씨의 손으로 건네졌다. 종이 꾸러미에서는 희미한 풀냄새와 감초 향이 났다. 어린아이라 하여 감초를 좀 더 넣었습니다, 말하는 의원의 얼굴엔 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 씨는 꾸러미를 품 안에 넣고 툇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었다.
“항상 고맙네, 정이.”
“뭘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데요.”
“정이, 마을에 내려올 생각은 없는가? 자네 집도 김 씨가 잘 관리하고 있으니...”
“제 집은 여깁니다. 그리고 마을에는 저보다 더 좋은 의원님도 계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재현의 얼굴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박 씨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알겠네. 다음에 또 옴세.”
신발을 단단히 고쳐 신은 박 씨가 허위허위 산길을 내려갔다. 박 씨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현은 사립문을 닫았다. 방에 들어가기 싫어 마루에 걸터앉은 재현의 손 위로 흰 꽃잎이 살풋 올랐다. 벌써 봄이 왔구나. 꽃잎이 날아오는 하늘로 고개를 돌린 재현의 눈에 꽃이 잔뜩 핀 매화 가지를 품에 안은 동생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꽃이 이리 아름다우니 여름에 맺힐 열매도 분명 달 거야. 그리 이야기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던가. 손에 앉은 흰 꽃잎은 힘없이 날아가 바닥에 추락했고, 하늘은 이미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산은 하늘에 가까운 만큼 해를 빠르게 제 뒤로 숨겼다.
마을에서부터 해가 뜨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배탈이 나은 아랫집 동성이는 된장이며 김치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재현을 찾았다. 감사합니다. 쭈뼛대는 와중에도 동성은 인사를 잊지 않았다.
돌부리가 가득한 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는 동성의 뒤로 꽃눈을 가득 단 나무가 보였다. 가지의 생김새로 보아 목련이었다. 머지않아 희고 탐스러운 꽃이 터져 나오리라. 그 전에 찻거리로 몇 송이 말려둘까, 생각하며 재현은 부랴부랴 바구니를 가지고 나왔다. 이제 막 솜털을 벗은 목련 꽃눈들이 바구니에 소복하게 담겼다. 솜옷을 벗고, 재현의 손 안에서 한 장 한 장 이른 개화를 맞은 목련은 향기를 그대로 머금은 채 말려져 작은 단지 안에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렸다.
*
승협은 오색 종이로 만든 꽃을 자랑스레 꽂고 백마를 탄 채 마을로 돌아왔다. 종이로 된 색색깔의 꽃들이 승협의 머리 위에서 춤췄다. 소자, 돌아왔습니다. 부모를 앞에 두고 절을 올리는 승협의 눈에 총기가 서렸다.
“저리 마음씨 고운 사람이 장원급제를 했으니 이제 나라도 좀 달라지겠구먼.”
“그래, 승협 도령 이라면 뭐든 잘 할 걸세.”
될 사람이 된 게지. 다른 사람의 반응은 그랬다. 승협은 사람의 마음을 고운 문장으로 바꿔낼 수 있었고, 그 마음을 진심을 다해 전할 수 있었다. 그러니 승협이 종이에 담긴 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누구보다 당당히 어사화를 단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승협이 돌아오자 승협의 부모는 재산을 베풀어 마을 전체에 잔치를 열었고, 한 사람을 제외한 마을의 모든 사람이 승협의 급제를 축하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이 사람은 승협의 능력을 동경했다. 나아가 문장을 그려내는 손을, 말하는 고운 목소리를 사모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어 속에 꾹꾹 눌러 담았고, 전해지지 못한 마음은 눌린 채 비뚤어져 열등을 먹고 질투로 변했다. 저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더 잘 쓰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한 생각과 비슷하지 않은가? 승협도령이 내 글을 가져다 썼구나! 질투는 야금야금 저를 제외한 다른 감정을 먹어 치워 의심으로 변했고, 이내 분노로 변해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킨 채 승협에게 칼끝을 겨눴다. 저 사람이 내 글을 가져다 과거에 합격했습니다. 부디 진실을 밝혀주시옵소서. 근거 없는 두 줄짜리 낭설이었으나 궁에서는 한바탕 논의가 오갔고, 결국 진위가 확실해진다면 그때 너를 궁으로 다시 불러들이겠노라. 하는 말과 함께 승협에게 내려진 벼슬은 회수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도록 연락은 오지 않았고, 빛바랜 어사화는 승협의 방에 걸린 채 먼지를 뒤집어썼다.
“그리 힘없이 있지만 말고 다른 것이라도 하거라.”
며칠 천장을 노려보기만 하던 승협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장에 나가 목검을 한 자루 샀다. 마감이 잘 되어있지 않아 거친 손잡이에 천 대신 제가 쓴 시를 감았다. 붓을 쥐던 고운 손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물집이 잡히고 터졌다. 그러는 동안 손잡이에 감은 흰 종이엔 피가 번져 글씨를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시를 노래하던 고운 목소리가 기합으로 갈라지고 붙기를 두어 번, 승협은 다시 과거를 봤다. 이번에는 무과였다. 장원은 아니었으나 합격 명단에 이름은 올릴 수 있었다. 작은 관직이지만 지원자가 적어 바로 일을 할 수 있었으며, 먼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으니 저를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소자, 돌아왔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혹여 부정이 탈까 작은 소리로 전해진 축하였으나 전해온 마음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승협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간단한 짐을 들고, 달이 밝게 뜬 밤 홀로 작은 마을로 향했다.
궁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작은 마을에는 일이 많았다. 승협은 도착하자마자 탈출한 노비를 잡아야 했고, 나태한 관리를 대신해 밀린 문서를 처리해야 했으며, 부패한 관리를 대신해 백성의 원망을 받아내야 했다.
“...그리 하시면 안 될 듯합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승협의 상관은 바른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좋아하는 이를 찾는 것이 더 힘들겠지만 대부분은 직접적으로 티를 내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 고치려 노력했으므로 승협은 지금보다는 낫겠지, 쓴 숨을 삼키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상관은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고, 그렇다면 네가 다 하면 되겠구나. 반성 대신 싸늘한 시선과 조소를 보냈다. 이후로 몰려드는 일거리와 동료의 은근한 무시는 천천히 승협을 좀먹어갔다. 이후로 눈이 쌓였다 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보릿고개라 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은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벗겨 삶고, 길에 난 잡초를 뽑아 먹었다. 그마저도 다 떨어지자 흙을 파 죽을 끓였다. 한양과 가까운 승협의 마을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백성을 위해 준비한 곡식은 백성에게 닿기도 전에 거의 사라져 한 말도 남지 않았다. 백성은 피골이 상접하게 말라가는데, 그를 다스려야 할 관리들은 살이 피둥피둥 쪄 얼굴에 기름이 흘렀다. 말단 관리인 승협은 먹을 것이 줄었고, 지치고 제대로 먹지 못한 몸으로는 본인을 챙기기에도 버거웠다. 그저 지친 몸으로 관리들의 이름으로 가득 찬 구휼 문서를 하나 더 필사해 저만 아는 곳에 숨겨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해가 떨어진 밤 붉은 불이 일렁였다. 도저히 못 살겠다며 낫이며 쇠스랑을 들고나온 백성들은 그대로 관아의 곳간으로 돌진했다. 승협은 그들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댄 채 발을 바삐 놀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간에는 볼이 움푹 팬 백성들이 있었다. 승협이 온 줄도 모른 채 윤기가 흐르는 쌀을 생으로 씹어 먹는 백성들은 쇠스랑이며 낫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주린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뒤늦게 승협을 발견한 움푹 팬 눈에는 굶주림 말고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들리지 않자 상관은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다른 관리를 보냈고, 그들은 칼을 꺼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승협을 발견했다.
“네 놈이 백성을 꼬여 역모를 꾀했구나.”
줄에 묶여 무릎 꿇려진 승협의 눈에는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당신이 그러고도 백성을 다스린다 할 수 있습니까.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보소서. 무릎 꿇려진 승협 앞에 나뭇가지 같은 백성들의 몸뚱이가 쌓였다. 마른 입 안엔 미처 씹지 못한 생쌀이 가득했다. 승협의 두 눈에 가득했던 분노가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저 놈이 역모를 꾀했으니 살려둘 수 없다 외치던 관리는 승협의 눈물을 보곤 생각을 고쳐 비릿하게 웃었다. 역모를 꾸민 자는 한양으로 보내도록 하겠다. 전하께서 백성들을 저리 만든 죗값을 물어 사형을 내릴 것이다. 승협은 손이 묶인 채 나무로 만든 옥사에 가둬졌다. 돌로 된 벽에 기대자 등이 욱신거렸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는, 성글게 만들어진 작은 창문 위로 달이 밝게 떴다. 도망치듯 짐을 싸 마을로 온 날처럼. 이리 죽으면 부모님께 전해질까. 분명 놀라실 텐데. 역모죄는 분명 삼족을 멸하여... 아. 역모죄로 죽는다면 부모님께도 위협이 갈 것이다. 그것은, 그것은 안 된다. 이미 한 번 고통을 안겨드렸으니 두 번은 그럴 수 없다. 승협은 중얼거리며 벽 가까이 금이 간 나무창살을 내리쳤다. 고쳐야 한다며 수 번을 말했으나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창살이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손이 퉁퉁 붓고 피가 발갛게 비쳤으나 승협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빠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진 창살은 승협이 겨우 지나갈 만큼의 틈을 내었고, 승협은 있는 힘을 짜내 창살을 벗어났다.
밖엔 달이 밝았다. 이 산을 넘으면 마을이 있는데요, 퉁명스레 알려주던 얼굴이 떠올랐다. 가리킨 쪽으로 가려던 승협은 급히 발을 놀려 제가 숨겨둔 문서를 찾았다. 구휼미 대출 목록. 탐욕에 절어버린 이름으로 가득 찬 그 문서는 언젠가 왕에게 전달되어 승협의 결백을 증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왕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문서를 챙겨 품에 넣은 승협은 기억에 의존해 손이 묶인 채 가지에 쓸려가며 산을 올랐다. 나무에 쓸리고 넘어져 얼굴에 생채기가 났다. 급히 오르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자 후두둑 눈물이 흘렀다. 이리 다른 마을로 가면 무슨 방도가 있을까. 그저 잠시 죽을 시간을 미루는 것이 아닐까. 넘어져 까진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무릎이 욱신거려 더 이상 걷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승협은 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은은한 감초 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이어 사람이 사는 듯 온기가 집 울타리를 넘어 승협에게 닿았다.
“계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나무로 만든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재현은 커다란 인영을 마주했다. 달빛 아래로 어둡게 보이는 낯선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므로, 재현은 보다 자세히 보려 눈을 찌푸렸다. 누구시길래 오밤중에 산을... 재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재현에게로 쓰러지듯 안긴 사람은 꽤 무거웠고, 온몸에 생긴 상처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피가 스며 나온 채 부어있었기 때문에. 쌍꺼풀이 없는 눈은 눈물이 맺혀 축축하게 젖어있었으며 길게 쭉 뻗은 손목은 밧줄에 쓸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미약하게 열마저 나는 몸은 무리한 듯 축 늘어졌으므로 재현은 별수 없이 쓰러진 이를 방으로 데려와 조심스레 눕혔다. 이 옷은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이 입던 것 같은데. 비슷한 옷을 입고 떡이며 과자 같은 것들을 가져오던 회승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재현이 형! 여기는 이런 거 먹기 힘들잖아요. 하는 웃음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눈앞의 사람이 입은 옷은 분명 회승의 옷과 비슷했으나 뜯어지고 흙이 묻어 볼품없었고, 옷 밖으로 드러난 손과 발엔 쓸린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다. 상처에 묻은 흙을 물로 닦아내자 쓰라린 듯 승협이 끙끙거렸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
잔뜩 부어버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승협이 입을 달싹거렸다. 말라버린 입술에서는 데워진 열기가 새어 나왔다. 재현은 물을 묻힌 수건을 승협의 입에 갖다 댔다. 목을 축인 승협이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느새 밖은 밝아져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치료부터 했습니다. 관아에서 일하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랬습니다.”
승협은 고개를 숙였다. 손을 묶었던 밧줄은 온데간데없고 붉은 자국만 연하게 남았다.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재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흙과 피가 묻은 천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김재현입니다. 다들 정이라 부르니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이승협이라 합니다.”
재현이 미지근해진 물이 담긴 대야를 들었다. 아, 제가, 몸도 불편하신 분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려던 승협은 재현의 거절에 엉거주춤 다시 앉았다. 재현이 나간 방 안은 식물이 마르며 내는 꿉꿉한 냄새로 가득 찼다. 약초... 의원인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흰 봉투에서 검은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비쳤다.
“의원이십니까?”
“어.. 의원이었습니다.”
재현은 멋쩍은 듯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길게 뻗은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만들었다.
“목련차입니다. 염증에도 좋고, 열이 조금 있는 것이 곧 고뿔에 들릴까 하여.”
“아... 감사합니다.”
바싹 마른 꽃잎은 뜨거운 물을 만나 다시 한 번 꽃의 형태로 피었다. 바싹 마른 꽃잎 속에 갇혀있던 향기가 은은하게 흘러나와 승협을 감쌌다. 따뜻한 차는 승협의 혀를 한 번, 그리고 속을 한 번 뜨뜻하게 덥혔다.
“향이... 좋습니다.”
“이번 봄에 딴 거라 더 그렇습니다.”
재현은 뿌듯하게 웃었다. 이제 푹 쉬세요. 승협이 차를 다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자, 재현이 빈 잔을 가지고 한 번 더 들락거렸다. 뜨뜻한 차가 효과가 있었는지 승협은 그대로 잠들었고, 재현은 그런 승협이 쉴 수 있도록 흔쾌히 제 방을 내주었다. 승협이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마을을 지나 저 너머로 떠난 후였다.
승협은 재현의 집에 머물렀다. 며칠간은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으나, 재현이 어차피 방도 남고... 하며 허락한 이후로는 조금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됩니까? 하며 장작을 패오는 승협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스트레스로 검게 변한 눈 밑은 재현의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고, 제대로 먹지 못해 움푹 팬 볼은 꼬박꼬박 세 끼를 챙겨 먹으며 원래의 통통한 볼로 돌아왔다. 몸이 회복되자 승협은 재현이 약초를 캐러 갈 때 따라가 곰취며 명이 같은 것들을 같이 따왔다. 매 끼니마다 굴뚝에 피는 연기는 집 안에 훈기를 더했으며, 정적이 감돌던 재현의 집엔 사람의 말소리가 늘었다. 이따금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러 올라올 때면 승협은 쭈뼛거리면서도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정이, 이 사람은 누군가?”
“아, 잠시 지내며 제 일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이승협입니다. 잠시 재현, 정이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구만, 다행이야. 정이 자네 얼굴이 며칠 새 밝아졌더니.”
다녀간 사람은 두어 명이었음에도 작은 마을에서는 소문이 빨라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마을의 모두가 산 속에 틀어박힌 의원에게 식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전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분의 음식과 군것질거리들을 가져다줬다. 승협이 온 지 두 달이 지나고, 어느새 봄의 끝자락이 다가왔다.
두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연둣빛 이파리가 날 때쯤 승협은 아궁이 하나를 무너뜨렸고, 그날을 계기로 재현과 승협은 말을 놓았다. 승협이 형! 도와줘! 재현아 잠깐만! 재현과 승협은 깨진 돌 대신 새로운 돌을 구해야 했고, 서로 조금씩 더 구해오는 바람에 완성된 아궁이는 그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새로운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검댕이 잔뜩 묻었고, 옷에는 돌가루가 잔뜩 묻었다. 돌가루를 털어내는 승협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고, 검댕이 묻은 재현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즐거움과 행복은 서로를 향해 단단히 맞물려 천천히 돌아갔다.
그동안 승협이 탈출한 마을에서는 승협을 애타게 찾았다. 그 마을의 수령에게 승협은 그 자체로 폭정의 증거이자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울 희생양이었다. 하루빨리 승협을 한양으로 보내 제 죄를 뒤집어씌워 마을 백성이 절반으로 줄어든 이유를 대야 했다. 또, 혹시나 승협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제 목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마을 안을 아무리 뒤져도 승협의 머리카락 한 자락도 찾을 수 없자 화살은 주변 마을로 향했다. 접근성이 높은 마을부터 승협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가 담벼락마다 붙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재현의 마을로 종이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나 지난 후였다.
“그 방(榜) 보았는가?”
“도망친 관리를 찾는 것 말인가? 보았지.”
“그 관리가 정과 같이 있는 그 사람이란 말이 있네.”
“에이, 그 관리는 역모를 주동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나.”
“그런가? 그렇다면 뭐...”
낡은 사립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승협과 재현은 토막으로 잘린 담쟁이덩굴을 이제 막 내려놓으려 했다.
“정이 자네...!”
사립문을 급하게 열어젖히며 들어온 박 씨는 승협과 재현을 번갈아 보다, 재현을 손짓하여 따로 불러냈다.
“잠시, 잠시면 되네. 정이 자네. 저 이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가?”
“아뇨...”
“마을에 이런 방이 붙었네. 나는 정이 자네가 역적을 감싸다 화를 입을까 걱정이 되어,”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갈 곳 없는 사람이라 잠시 머무는 것뿐입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래도 너무 믿지 마시게.”
박 씨는 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흰 종이에는 승협과 엇비슷해 보이는 얼굴 그림과,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다. 이승협. 한글로 적힌 이름은 누가 보아도 승협의 이름이었고, 승협이 이 종이를 본다면 해를 끼치기 싫다며 제 발로 내려갈 것이 뻔했으므로 재현은 한참 종이를 바라보다 작게 접어 말린 목련꽃 단지 아래에 넣었다. 꽃을 다 털어내지 않으면 꺼낼 수 없으리라.
재현은 이때 종이를 태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지 않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텐데도.
봄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5월이 거의 끝난 날 재현은 잠시 마을로 내려갔다. 형 절대 내 방에 들어오면 안 돼. 밖에 나와도 안 돼. 알았지? 형 진짜, 진짜로 밖에 나오면 안 돼. 내 방은 절대로, 절대로 들어가면 안 돼! 승협은 간절히 말하는 재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았다며 대답했다. 재현이 나가고 말려놓은 약재를 정리하던 승협은 한 움큼 정도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고, 재현에게 남은 것이 있나 아무 생각 없이 재현의 방문을 열었다. 불운하게도 목련꽃이 가득 든 단지는 약재 봉지를 뒤적이던 승협의 손에 부딪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갈색 조각들 사이로 형체를 잃어버린 꽃잎들이 널브러졌다. 흰 꽃잎 사이로 작게 접힌 종이가 승협의 눈에 들었다.
“아... 재현이가 알면 큰일나겠는데... 어. 무슨 종이를 이 안에 뒀냐.”
승협은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펴 적힌 글씨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눈동자가 좌우로 왕복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승협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종이 한가운데를 차지한 얼굴을 그린 그림과, 밑에 적힌 제 이름자는 누가 보아도 자신을 찾는 내용이었다.
[ 역모를 꾀한 죄인이 도망쳤으니 이 자를 본다면 속히 __현으로 압송하라. 누구든 이 자를 보호하는 이가 있다면 중죄를 면치 못하리라. ]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란 예상은 했다. 어찌 됐든 승협은 관아 소속의 무관이었으니. 그러나 실제로 이리 방까지 붙여 찾을 줄은 몰랐기에, 승협은 한참 종이의 글자들을 바라봤다. 종이 아래에 쓰인 날짜는 일주일 전이었다. ‘누구든 이 자를 보호하는 이가 있다면’, ‘중죄를 면치 못하리라.’ 글자 위로 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현은 이 종이를 벌써 며칠 전에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제가 보지 못하게 숨겨두었겠지. 종이를 쥔 손이 떨렸다. 재현이 돌아오기 전에, 어디로든 가야 한다. 정이 많은 재현은 자신이 위험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를 보내지 않고 끝까지 숨길 것이었다.
승협은 급하게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봤자 맨몸으로 온 승협이 챙길 것은 많지 않았다. 입고 온 옷은 재현의 손에서 깔끔하게 바느질되어 뜯어진 자국을 찾을 수 없었다. 짐을 들쳐메고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흔적으로 가득 찬 집이 승협의 눈에 들었다. 같이 덮었던 이불이며, 같이 베고 잤던 베개가 눈에 들었다. 이제 혼자 덮고 자야 할 텐데. 혼자 쓸쓸해서 어쩌지. 파삭, 산산조각난 단지 조각과 사이로 흩뿌려진 목련 꽃잎이 승협의 발에 밟혔다. 형 저거 같이 다 마셔야 해. 깨진 약속에서는 은은한 향이 났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리 늦게까지 다급하게 나를 찾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이유가 더 있을 터인데. 뭘까. 뭐 길래. 잠시 묻어뒀던 머리가 팽팽 소리를 내며 돌았다. 관아의 곳간은 불에 타고 백성의 수는 줄었으니 분명 이유를 대라 했을 것이다. 또, 제 죄를 가리고선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하니 모든 것을 뒤집어 쓸 사람이 필요했겠지. 그리고 그 역할에는 도망간 승협이 최적이었을 터이다. 또 도망간 내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거기까지 생각하니 승협은 지금 당장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한양으로 가야 한다. 일단 어디로든 가서, 가서...
승협은 저를 뒤쫓는 횃불을 따돌리려 좁게 난 길을 따라 달렸다. 재현과 함께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길은 둘 말고는 다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제대로 닦이지 않아 늘 무릎 높이로 자란 풀들이 다리에 채였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승협의 발을 찔러댔다. 품에 안은 관복 사이에서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땀에 젖어 살짝 번진 이름자들은 증거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사라졌다. 승협은 말도 타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발은 나뭇가지에 찔려 피가 흘렀다. 도망가는 승협 위로 흰 꽃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색색의 꽃으로 가득했던 나무들은 진한 파란색 이파리들로 옷을 갈아입고 봄의 끝자락을 마주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났다. 며칠이 걸려 한양에 도착한 승협의 문서는 무사히 조정에 전달되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폭정을 펼치던 관리들은 모두 목이 달아났고, 마을에는 새로운 관리가 갈 거라고 했다. 승협의 누명은 폭정에 시달리던 마을을 구한 공적으로 덮어씌워졌다. 승협은 원래 제자리였을 궁으로 들어가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평생을 왕에게 헌신했고, 말기에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노래와 글을 가르쳤다. 승협의 문장은 아이들에게로 이어져 고운 노래로 탄생했다.
정은, 재현은, 평생을 산 속 집에서 약초를 따며 이따금 오는 사람을 맞이하며 살았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젊은 의원이 더 이상 젊지 않을 때가 되어서도 엿이며 반찬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었고, 혹여 심심할까 자주 찾아와 말동무를 해주었다. 재현은 더 이상 누구도 들이지 않았고, 봄이 오면 피지 않은 목련 꽃눈을 따 말렸다. 그렇게 재현은 자기를 아끼는 사람들 곁에서, 은은한 목련꽃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재현의 집에서는 향을 머금은 채 바싹 마른 목련꽃이 가득한 단지가 세 개 발견되었다. 제일 큰 단지에는 형 오면 줄 것. 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랫집 동성이는 더 이상 배탈이 나지 않았고, 글을 배워 늦게나마 과거에 합격했다. 자주빛 관복을 입고 큰 궁궐에 당당하게 선 동성에게는 더 이상 배를 움켜잡고 끙끙거리던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 이따금 재현을 찾아오던 회승은 여전히 재현에게 과자며 다른 군것질거리들을 가져다주었고, 가끔 바깥소식들을 가지고 가기도 했다. 옆 마을 관리들이 전부 목이 날아갔대요. 새로운 관리가 온다던데. 아, 누명을 쓴 과거급제자가 누명을 벗었다는 소리도 있어요. 그렇구나. 재현은 회승의 이야기들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
승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어딘가에서 감초향이 느껴지는 듯도 했으나 눈을 끔뻑거리자 이내 익숙한 숙소 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동성은 승협의 옆 침대에서 이불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듯 싶더니 열린 문 사이로 재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 승협이 형 깼네."
“재현아. 형이 되게 이상한 꿈을 꿨다.”
“엉, 무슨 꿈?”
“도망가는 꿈 비슷한 거. 근데 재현아, 네가 의사였어.”
“김재현이 의사면 그 마을 위험한 거 아냐?”
“아 후나 꿈이잖아!”
“의사가 말이 되냐? 그럼 나는 전생에 고양이랑 같이 글 쓰는 작가였겠다!”
“아 그럴 수도 있지!”
왁왁 성내는 훈과 재현을 뒤로하고 승협은 거실로 나갔다. 거실 탁자 위에는 흰 꽃이 담긴 유리병이 있었다. 불현듯 느껴지는 기시감에 승협은 유리병을 들었고, 은은한 꽃냄새가 병 틈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 형 그거 목련차래! 보자마자 왠지 형 생각나더라. 그래서 사왔지. 형 그거 좋아해?”
“...응.”
“형 줄게.”
재현이 어느샌가 다가와 꽃 한 송이를 집어 들며 웃었다. 형 이거 나랑 다 마셔야 해. 깔끔하게 마른 꽃눈에서 목련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응. 재현아. 이번엔 꼭 같이 마시자. 흰 머그컵 안에서 두 송이의 목련꽃이 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