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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아주 질기고 기나긴 운명의 시작.

 

 

 

 

 

  태초에 광활한 대륙과 대륙 서쪽의 미미한 산세에 터를 잡았다하여 '서금안 西金岸' 이라 불리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서금안의 '금'은 황금을 뜻하여, 귀한 황금이 샘처럼 솟는 천혜를 받은 나라였다. 채금업으로 빠르게 국력을 키운 서금안은 곧 국경을 넓히기 위하여 정복전쟁을 벌인다. 국경을 마주한 약소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강대국과의 접전을 몇차례나 치룬 끝에 대륙의 주인이 된 것이 정복전쟁 십칠 년이었다.

 

  황금의 제국. 천혜의 땅. 서금안은 천자의 절대권력을 토대로 개국 500년이 넘도록 부흥하였다. 그러나 달이 차면 필시 기울듯, 국력의 쇠락은 필연이라. 황권은 추락하여 귀족들의 손에 좌지우지된다. 고작 과거의 명성을 간신히 잇고 있는 수준에 도래하기까지. 그때가 549년, 태흥太興 11년이었다.

 

 

 

 

  널찍한 걸음이 지난 길에 동동걸음이 뒤따랐다. 아이는 다소 버거운 모양새였으나 부친인 차 승선承宣 은 정면만을 꼿꼿이 보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다. 정문을 지날 때만 해도 바로 옆에 두었다 한들, 거리가 점차 벌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이는 걷는 내내 제 아버지에게 칭얼대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제 부친을 불러세우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잊고 만 것이다. 5살 난 아이에게 황궁은 별천지였다. 끝이 없는 길과 땅, 까마득히 높은 담과 황금으로 둘러싸인 건물들. 온사방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 뿐이었다. 동그란 눈이 홱홱 굴러갔다. 정신을 온통 빼앗겨 바삐 움직이던 짧달막한 다리가 느려졌다.

 

 

 

  아차. 하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는 홀로였다. 황궁에 대한 민간의 설 중에는 어설픈 도적은 한 번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한다는 설도 있었다. 제 부친따라 처음 입궐한 아이가 이 구중궁궐에 제가 어디 있고 어딜 가야하는지 알 리가 만무했다. 꼼짝없는 미아 신세가 된 것이다.

 

  거대한 황궁이 주는 위압감과 홀로 남았다는 불안감. 성인 허리춤에나 간신히 오는 아이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겁에 질리지 않았다. 울음도 터뜨리지 않았다. 아이는 영특하기로 차 가家 의 자랑이었다. 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님은 진작에 깨우쳤다. 아이에게 있어 지나가는 이에게 조리있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는 입을 여는 대신에 발을 옯겼다. 아무리 영특하여도 아이는 아이였다. 겁에 질릴 새도 없이 마음께의 모험심이 비죽 튀어나왔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조막만한 손을 한 번 쥐었다 펴곤 힘차게 걸었다.

 

  영특한 아이는 누군갈 맞닥뜨린다면 이 모험이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좁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만 다녔다. 순찰하는 근위병들에게도, 궁인들에게도 걸리지 않도록. 그러다 발길이 닿은 곳은 아주 고요한 곳이었다. 보았던 곳 중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곳. 헌데 보이는 광경은 오로지 담뿐이었다. 하늘까지 닿을 담. 그것은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이는 담이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들어가기로 했다.

 

  다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입구는 커녕 모퉁이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길들이지 않은 새 신에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낙심하던 찰나에 아이는 무언갈 발견했다. 작은 구멍이었다. 화려한 문양으로 만개한 담벼락과는 심히 이질적인 구멍. 크기도 여간 작은 크기가 아니어서 작은 짐승정도만이 간신히 통과할듯 보였다. 가만 서서 고민하던 아이는 곧 바닥에 답싹 엎드렸다. 아이에게 예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알면 눈물 쏙 빠지도록 혼날 터였다. 양반으로서의 체면치레를 질리도록 익혔으나, 호기심에 못 이긴 탓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이리 많은 곳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르게 틔운 적모란과 연분홍빛 복사꽃, 바다같은 연못 위의 연꽃. 꽃이야 아이의 가택에도 있었으나 이곳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절경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가 꽃구경을 하던 아이의 귀에 문득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어 짐승 울음소리는 아닌 것 같고, 사람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아이는 마른침 꿀꺽 삼키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요하여 오롯이 저뿐인 것 같던 화원에서 아이는, 울고있는 또다른 아이를 맞닥뜨렸다.

 

  "이름이 뭐야?"

 

  "정, 정이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나비를 쫓다가…"

 

  바닥에 주저앉은 정의 무릎부근이 불긋했다. 넘어진 모양이었다. 아이는 정을 일으켜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야?"

 

  "나는,"

 

  "전하!"

 

  외침이 근방에서 들리었다. 헉. 몸시 놀란 아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아직 보고싶은 것이 많았다.

 

  "나 가야 돼!"

 

  "안돼! 가지마!"

 

  간절한 외침 뒤에 손길이 따라붙었다. 정의 손에 아이의 손목이 꼼짝없이 붙잡혔다. 안 되는데. 안되는데… 잡히기 전에 빨리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야 하는데. 아이는 뿌리칠 수 없었다. 절실함에 마음이 쓰여 그랬는지, 손목을 붙잡은 고사리손이 억세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다만 분명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옆에 있어."

 

  그날 정이 하였던 이 말.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말이었으며, 아이를 평생이고 매어둘 말이었다. 평생토록.

 

 

 

 

 

 

 

  나비 꽃을 껴안아 蝶抱花

 

 

 

 

 

 

 

  앞에 놓인 찻잔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훈은 잔을 조심스레 들어 입을 축였다. 한기에 움츠러든 몸을 녹이기에 더없이 좋았다. 춘분을 지나친지가 한 달 하고도 열 아흐레가 되었으나 기운이 답잖게 서늘하였다. 춘우 春雨 였다. 내내 쾌청했던 하늘이, 훈이 입궁하기 무섭게 먹구름으로 에워싸여 종래에는 빗방울을 떨구었다. 피할 방도가 없어 걸음만 재촉하였더니 비 머금어 축축해진 옷자락이며, 머리칼이며. 그 미약한 불쾌감이, 훈은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찌푸려진 미간과 처소에 들고부터 젖은 옷만 연신 닦아내고 있는 행동이 그 반증이었다. 그 모양새를 맞은편서 가만 지켜보던 재현이 위안했다.

 

  "가랑비였기에 망정이다. 오는 길이 조금만 지체되었다면 흠뻑 젖어 이곳을 청소해야했을 것 아니냐."

 

  위안이라 하기엔 장난기가 심히 서리긴 하였지만. 훈이 눈을 홉떴다. 지금 누구 때문에 맞지 않아도 될 비를 맞았는데. 때때로 훈의 눈동자는 투명하여 속내가 훤히 비치곤 하였는데, 재현이 이해한 그의 속내는 대강 저러했다.

 

  "웃으라고 던진 농인데 뭐."

 

  재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훈은 별말 않고 닦던 옷에 신경을 쏟았다. 재현의 말마따나 요행이었다. 빗줄기와 땅이 부딪쳐 들려오는 소리가 그새 굵어져 있었다. 얼추 가늠해보면 금세 멎을 비는 아닐테니, 이정도 젖은 것이 요행이라면 요행이었다. 훈은 수건을 잘 개어 옆에 두곤 드디어 똑바르게 재현을 보았다.

 

  "헌데 어이하여 부르셨습니까?"

 

  "너와 나 사이에 꼭 이유가 있어야 부르나. 네가 또 방 안에 고립되어서 무료할까하여 불렀지."

 

  "소인이 원하여 행하는 고립이라 몇 번이나 아뢰지 않았습니까. 무료하지 않았습니다."

 

  "글쎄. 내 부름에 즉각 입궐하는 것을 보면 꽤 무료한듯 보이는데."

 

  "황자의 명인데 어찌 소인이 어길 수 있단 말입니까."

 

  대거리는 훈이 투덜거리면서 끝이 났다. 훈은 불퉁한 얼굴로 여즉 물기가 남아있는 옷자락을 매만졌다. 비 맞은 것이 못마땅한 줄은 알았는데 보통 싫은 것이 아니고 여간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재현은 미미하게 웃었다.

 

  "날이 이렇게 급변할 줄은 몰랐다. 내 사과하마."

 

  "날이란 천기天氣인데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실은 말이다. 화원에 가려 불렀던 것이다."

 

  역시나. 훈의 짐작대로였다. 재현은 이맘때면 못해도 한 번은 반드시 화원에 가곤 하였으니.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까마득한 과거에도 동행하였던 훈은 이 산책으로 하여금 봄의 도래到來 를 느꼈다. 지난해에 재현과 화원을 걸었던 기억이 생동한데. 벌써 봄이 먼길 돌아 찾아왔다니. 세월이 퍽 빠르게 흘러간다고, 훈은 생각했다.

 

  "이번엔 작년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뭐, 벚나무를 새로 심었다던가 하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아마 변함없을 테지. 늘 그랬듯."

 

  "그럼 금년은 건너뛰어도 되겠습니다. 비가 이리도 오면 제아무리 절경이라도 전부 낙화하고 말테니."

 

  어차피 해마다 같은 풍경이었으니 아쉬울 것 없습니다. 마저 덧붙인 훈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내 너와함께 가기 전까진 떨어지지 말라 명하였으니 괜찮다."

 

  재현이 근엄을 떨었다. 그에, 풋. 웃음이 톡 불거진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능청인데 훈은 종종 이런 대단치 않은 것에 웃음을 지었다. 속눈썹이 드리워 그림자를 자아내고, 곱게 접힌 눈매 아래론 눈가가 도톰히 올라오고, 입매가 활짝 트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가도록 하지요."

 

  노력이 가상하여 못이기는 척 응했다. 꽃잎이 전부 떨어져 가지만 남았다해도 갈 생각이었다.

 

  애당초 훈에겐 거절할 이유도, 마음도 없었지만은. 헌데 응당 돌아와야할 답이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날을 약속하자고 응해와야 할 것인데. 그런 소리대신, 오묘한 기운이 살갗으로 와닿는다. 고갤 들면 넋이라도 나간양 바라보아오는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다."

 

  싱거운 대답에 훈은 더 캐묻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더 넘기었다. 명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재현은 종종 이렇게 바라보곤 했다. 무슨 일이냐 여쭈어도 아무 말 없으니 알 방도가 없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재현은 그리 말해놓고도 계속해 시선을 보내왔다. 그 뜻은 재현만이 알았다. 어쩌면 훈도 아는 것일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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