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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에게 보냈던 동성의 편지 中 일부

 

 

 

 

  안녕, 훈이 형. 저 동성이에요. 형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성이요.

 

 

  어… 저건 사실 회승이 형 따라한 건데. 되게 어색하다. 아무튼 형에게 드디어 편지를 쓰네요. 형은 편지 같은 데엔 별반 관심이 없어보였지만 저는 옛날부터 되게 좋아했거든요. 핸드폰 게임으로 맞추는 퍼즐보다 실제 퍼즐이 더 재밌는 것처럼, 편지지는 형태가 있잖아요. 보관할 수 있으니까요. 삭제하면 사라지는 형의 카톡과 다르게.

 

 

  오늘 공항으로 출발한다는 형의 연락은 잘 받았어요. 승협이 형과 그런 사이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해줄 줄은 몰라서 좀 놀랐구요. 요즘 같은 시대에 결혼이라니. 요즘 젊은이들 살기 힘들어서 결혼도 안 한다는데 형이 굳이 유교사회의 지난 길을 따라갈 줄은 몰랐어요. 각자도생이 좋은 거라며 고양이만 키울 것 같은 게 훈이 형이었거든요.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달라진다더니, 형이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이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느 기념일 날, 정작 승협이 형은 생각도 않았다던데 형이 장미꽃을 가득 샀다가 나오자마자 들켰다는 얘기는 지금 들어도 재밌어요. 형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고양이 같은 표정이 상상돼서. 어느 쪽이 장미꽃인지 볼 만 했겠네요. 그걸 눈앞에서 봤을 이승협이 부러워요. 굳이 편지에서 형형 붙이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그쵸. 형이라면 당연히 형 붙여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런 점도 귀여워요. 뭐 어때, 형은 이미 공항으로 가고 있을 텐데. 저는 지금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이는 책상에 앉아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형들은 해외에서 결혼식을 할 거라고 했죠. 국내에서의 동성혼 신고는 불가능하니 해외에서 식이라도 먼저 치르고 싶다고. 그걸 말하던 형의 얼굴이 퍽 남사스럽다는 듯 붉어져 있던 게 기억나요. 그치만 제가 누구예요. 형의 자랑스러운 동생, 동성이잖아요.

 

  그래서 알았어요. 부끄러운 게 아니라, 기뻐서 그렇구나. 하고.

 

 

 

 

  승협이 형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네요. 저보다 더 어릴 때 만난, 아주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었다고 했잖아요. 고등학교 선배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퇴했다고. 그리고 연락이 끊겼었는데 스물이 넘어서야 우연히 예전 집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그걸 말해줬을 때가 저희 대학교 때였나요? 저는 그때 사실 조금 당황했어요. 왜냐면 그 날 형의 이야기는 결말이 없었잖아요. 전 무슨 그 형이 돈이라도 떼먹었던 걸까 했어요.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만 해놓고, 갑자기 꾹 입을 다물어버려서. 지금은 프리랜서로 번역 일을 한다. 키가 크고 잘생겼다. 사람이 좀 바보 같고 착하다. 그날 해준 얘기들이 이 정도였죠. 그렇지만 훈이 형이 그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치사하게도 말해주지 않았고요. 그날부터 나중에 승협이 형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상상했던 것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요. 훈이 형이 너무 싫어하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좋아하던 사람이었을까, 부모님의 원수인 건 아닐까, 뭔가 이상한 일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실 죽은 사람인 건 아닐까… 훈이 형은 어지간히 마셨을 때가 아니면 그 형에 대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요. 술이 깼을 땐 제가 물어봐도 그랬었냐며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솔직히 서운했어요. 편지라서 몰래 말해보네요. 이걸 알아도 형은 미안해하지 마세요. 지금은 괜찮으니까.

 

 

 

  승협이 형을 제가 처음 만났던 그 날, 새벽녘 골목길에서 갑자기 장신의 남자가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추운 겨울 날씨에 예민하게 찌푸려져 있던 형의 표정이 순간 누그러지던 순간도요. 훈이 형은 눈이 크고 묘하게 끝선이 둥글어서, 날카로운 눈이나 짙은 눈썹과는 다르게 눈을 크게 뜨면 금세 인상이 순해지더라구요. 꼭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솜사탕을 받은 어린아이 같았어요. 제가 그렇게나 보고 싶던 표정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또 몰랐고요. 형은 그때 제게 승협이 형을 소개하면서 형에게 여긴 웬 일이야, 하고 말했어요. 보고 싶어서, 라고 대답하는 승협이 형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한 번 더 놀랐어요. 그렇게 잘생기고 낮은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거든요. 악수하는 손도 뼈마디가 굵고, 길고, 굳은살도 단단해서 정말 멋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기억나요? 형이 저를 친한 동생이라고 소개하던 거. 그 뒤로 저희는 셋이서 종종 만났었죠. 훈이 형네 집에 모여서 월드컵을 봤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네요. 저는 본가에서 살고 있었고 형은 자취를 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다들 훈이 형네 집에도 자주 모였잖아요. 승협이 형도 혼자 산다고는 했지만 자기 집은 안 된다고 하고. 훈이 형이 그럼 내 집은 무슨 공공재냐며 짜증내고. 그래도 승협이 형이 늘 야식이니 간식이니 바리바리 사와서 훈이 형이 2분 만에 불만을 그쳤던 게 기억나요. 재밌었어요. 툴툴거리면서도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형의 뒷모습이 좋았거든요. 제가 도와준다고 해도 이따 끝나고 설거지나 하라면서 거실로 쫒아내고. 훈이 형이 만들어주는 맛있는 파스타, 스테이크, 별별 보양식들. 그걸 기대하며 거실 소파에 앉아 부엌의 형을 보고 있자면, 꼭 저희가 함께 손님을 맞는 가족이 된 것 같았어요. 얼마 후 추운 날씨에 코끝까지 빨개진 승협이 형이 오면 현관으로 마중 나가는 훈이 형까지도요. 창밖엔 진눈깨비가 내렸고, 회색 하늘 아래서 따뜻한 노란 형광등 아래 모여. 그렇게 셋이 함께한 순간은 아주 많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즐거웠어요. 승협이 형도 말했죠, 지금 이렇게 있으니 꼭 가족 같다고. 편안하고 즐겁다고. 그렇게 말하는 눈이 참 순하고 착해보였어요. 그때 저는 승협이 형과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어요. 훈이 형처럼요.

 

 

 

  그런데 형, 그거 알아요? 이승협이 썩 좋은 일을 하고 있진 않다는 거.

 

 

 

  하긴 형이 모를 리가 없죠. 저한테 살짝 와서 말해준 게 형이잖아요. 사실 썩 좋은 일 정도로 표현할 수도 없는 건데요. 형이 뭐라고 했지, 승협이 형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본 것 같다고 했나? 저는 사실 놀랐어요. 언제 그걸 말해야 형이 #@&#※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대뜸 그걸 장본인이 말해주다니요. 형은 그걸 잘못 본 광경이나, 어쩌다 다른 사람과 햇갈린 일, 그냥 장난인데 멀어서 잘못 본,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지금은 오해를 풀었다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미안해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그건 우발적인 게 아니에요. 하루 이틀 벌어진 일도 아니구요.

 

 

 

 

  그렇지만 지금은 다른 얘기를 더 하고 싶네요. 지금 형은 웃고 있을 테니까. 어떤 게 좋을까요, 맞아, 그때 승협이 형에겐 애인이 따로 있었다고 했죠. 그리고 저를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고… 훈이 형이 술을 마시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게 기억나는데, 형은 안 나죠? 그때 엄청 취했었잖아요. 발개진 눈가가 축축해지는 게 술집의 노란 조명 아래에서도 다 보였어요. 취한 사람은 혀가 알콜에 찌들어서 소주도 물인 줄 알고 마신다더니 정말이더라구요. 어떻게 그 큰 잔에 따라준 걸 한 번에 다 마셔요? 전 매번 한 모금도 안 마셨지만 형 마시는 냄새만으로 알딸딸하게 올라왔던 기억이 나요.

 

  형은 그때 그냥 아는 누나라고만 했지만, 솔직히 다 티가 났어요. 형 주변에 그 정도로 친한 누나 없는 거 다 알아요. 내가 형이랑 만난 지 벌써 15년은 지났다구요. 그냥 누나면 몰라도 자기 어릴 때 자주 도와줬다거나, 예전엔 어수룩했는데 최근 어른스러워져서 다시 만났다거나, 날카로워진 분위기가 낯설었는데 좋았다거나… 그리고 특히나 예전에 아플 때 죽을 사다줬다던 거. 솔직히 그 얘기는 하면 안됐어요. 너무 좁혀지잖아요. 뭐 연애상담이라곤 해도 저는 얌전히 들어주기만 하는 역할에 더 가까웠지만요. 사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있긴 했어요. 그 '누나'가 첫사랑이었다는 건 몰랐거든요. 그것까진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았을텐데. 아는 사람 얘기라고 둘러대거나, 아는 후배 이야기라면 조금 기대라도 해봤을 텐데.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아냐. 넘어가주세요.

 

 

 

  형은 몰랐겠지만 그때 승협이 형도 종종 저를 따로 불러냈어요. 제가 훈이와 가장 친하기 때문이래요. 그치만 그때 텅텅 비어있는 승협이 형의 연락처를 보고 공기계인가, 생각했던 걸 보면, 그냥 주변에 사람이 없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것도 몰랐겠지만 승협이 형은 많이 취하면 종종 울었어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훈이 형이랑 둘이 아주 똑같네요. 천생연분이네. 웃기다. 승협이 형은 일부러 취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티가 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일부러 먹였어요. 막상 저는 술을 마시지도 못해서 매번 사이다나 마시고. 그렇게 형들 따라다니며 간 술집이 몇 개인지는 이제 셀 수도 없겠네요. 예전엔 훈이 형이 좋아하는 술자리에 제대로 끼지 못하는 게 원망스러웠는데 그땐 꽤 괜찮더라구요. 맨 정신에 승협이 형이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할 수 있었거든요. 이걸 훈이 형이 알면 어떨까, 우리 형이 얼마나 놀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내 승협이 형은 낮고 잘생긴 목소리로 꺽꺽 울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흉하게 볼까봐 얼른 술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내내 중얼거리데요. 훈이가 보고 싶다고. 눈이 펑펑 내리는 하늘 아래서 예전 사귀던 그 사람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그 사람에겐 미안하대요. 미안함 밖에 없대요. 당연하겠죠. 자기가 죽였는데.

 

 

 

 

 

  이 얘기는 해야 할지 계속 망설였지만 그래도 해야 할 것만 같아요. 제가 승협이 형이랑 자주 술을 마셨다고 했죠? 그때 승협이 형은 매번 자기가 집에 잘 기어들어갔다고 생각하던데, 취해서 자기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준 건 기억도 못 하더라고요. 훈이 형도 지금은 승협이 형의 집에 가봤겠죠. 사귀는 사이니까.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나요? 제가 갈 땐 그렇지 않았어요. 아마 승협이 형이 외출 당시 다급하게 나왔을 수도 있고, 집에 누군가 오리라는 상상조차 못 해서 무방비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다행이었어요. 책상 위의 사진부터 컴퓨터 바탕화면의 파일까지 이곳저곳에 자료들이 널려 있었거든요. 그걸 하나하나 보며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집에 다른 사람을 데려오지 않는 승협이 형, 매번 훈이 형이 연락하면 시간이 어느 때고 나오던 승협이 형, 그렇지만 가끔씩 하루에서 며칠까지도 연락이 두절되던 승협이 형. 번역 일을 한다고 말했던 주제에 책장은 이상할 정도로 텅 비어 있던, 승협이 형.

 

 

 

  승협이 형의 전 애인, 아니, 애인이 맞기나 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아요? 둘이 여행을 갔대요. 거기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들었어요. 원래도 사람들이 자주 실족사하는 외딴 바다였기 때문에, 경찰들도 사고사 이외를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이런 소문이 돌리는 없죠, 당연하게도. 누가 떠들고 다니겠어요. 전 이 사실을 승협이 형이 크롭한 신문 기사에서 읽었어요. 그리고 요즘 회사들이 보고서를 정말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설마 사람을 죽이는 걸 장부를 적듯,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보고서를 쓰듯……. 차라리 텍스트로만 읽었다면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온통 고요하고 살풍경한 집 안, 그 중에서도 유독 냉기가 돌던 빈 방과 거실 서랍장에서 그걸 보지 않았더라면요. 그걸.

 

 

  그 때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정신을 차려보니 밖에 뛰쳐나와 숨을 헐떡이며 달리고 있었어요.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에 발목이 저릿했고 온통 술 냄새가 묻어 있던 겨울 잠바에서는 어느 샌가 냉한, 그렇지만 익숙한 승협이 형 향수 냄새가 조금 났어요.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가 남긴 흔적을 제대로 정리하고 돌아왔는지가 퍼뜩 떠오르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컴퓨터를 끄고, 빈 방의 서랍과 문을 닫았던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어요. 혹시 들킨 건 아닐까? 형이 내가 알았다는 사실을 알고, 날 다른 사람처럼 죽여버리지 않을까? 그 며칠간 혹시 모를 연락을 기다리면서, 찾아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며 얼마나 두려웠는지, 누군가는 알까요. 승협이 형에게 전화가 와서는 그 날 잘 들어갔느냐고, 자기는 맨 정신도 아닌데 어떻게든 집에는 들어와 있었다며 너스레를 떨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그만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어요.

 

 

 

 

  아까 전화를 받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아서 서운했나요? 그렇지만 형이 결혼한다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전 언제나 훈이 형이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이승협과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얌전히 있었구요. 승협이 형 옆에서 웃는 형은 정말 즐거워보였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무표정과는 다르게요. 승협이 형을 다시 만나고부터 훈이 형은 자주 웃었고, 안정감 있어 보였고, 그리고 사랑받는 사람처럼 굴게 되었으니까. 그걸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형의 앞날에 따뜻한 봄날이 펼쳐지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래서 가끔 눈물이 나고 승협이 형이 정말정말 미워져도 참았는데, 어떻게 그래요. 사실 저는 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그 형이 그런 짓을 한다니. 무섭지 않나요? 솔직히 역겨워요. 이런 말들을 보고 형이 절 밉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는 건 당연히 잘못된 사람이 맞잖아요. 저는 승협이 형이 저희를 그동안 그렇게 실망시켜왔다는 게 놀라웠어요. 충격적이고, 배신감도 들었고요. 전 형이 여기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정은 한시적이고, 범죄는 현실이에요. 형, 그 행위를 동정하지 마세요. 의뢰가 들어왔다면 형도 죽였을 게 분명해요. 무슨 사연이 있었더라도 그런 짓은 정당화될 수 없어요.

 

 

  전 정말 형을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동안 형을 오랫동안 봐온 동생의 마음으로.

 

 

 

 

  갑작스럽게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형의 첫인상이 떠오르네요. 딱딱한 무표정으로, 세상엔 즐거운 일 하나 없다는 듯이 불퉁하게 턱을 괴고 앉아 있었잖아요. 그게 밴드부 면접실이 아니었더라면 좀 더 밝아보였을지도 모르겠는데, 하필 제가 면접자였던 터라 그렇게 무서웠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잔뜩 긴장해서 말도 덜덜 떨고, 아마 대답도 엉망으로 했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망친 것만 같아 면접장 밖에 나와 쭈그려 앉아 있는데, 차갑게 물기가 떨어지는 종이컵을 제 머리에 툭 건드려지던 그 감각을 기억해요. 이거 마시라고 말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분명 면접장 안에서 들었던 것과는 다른 온도로 녹아 있는데, 아마 그 순간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후부터 느릿느릿 형에게 다가가던 기억들을,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들을, 늘 저보다 한 발 먼저 사라져버려서 제가 이를 앙다물고 쫒아가던 그 날들을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지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닐 거예요. 괜찮아요,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때 저는 자주 웃었죠. 낯간지럽게, 부끄럽게, 쑥스럽다는 듯이, 즐겁게. 다섯에 한 번쯤은 마주 웃어주던 형의 얼굴은 여전히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갑작스러운 옛날 이야기 죄송해요. 딴 생각에 빠져버려서. 사담이 길었죠.

 

  훈이 형은 지금 공항인가요? 일찍 나왔을텐데 점심은 드셨을지 모르겠어요. 형은 밥을 잘 먹지 않으니 가볍게 청포도 에이드 정도로 때웠을지도 모르겠고요. 아니면 수속을 밟기 위해 여권을 내밀었나요? 저는 승협이 형의 여권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요. 위조되었을까요? 가명일까요? 진짜 얼굴로 당당하게 이름을 써넣었을까요? 그러니 지금쯤 승협이 형은, 경찰의 손에 넘어갔나요?

 

  그랬다면 훈이 형은 놀랐을 거예요. 당황하고 있겠죠. 어떤 모습일지는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그것만은 알 수 있어요. 형이 이걸 읽고 계신다면 아마 진작부터 예상하셨겠지만, 제가 신고했어요. 그 뒤로도 심장이 떨리고 언제 일어날지 가슴을 졸였지만, 그래도 가끔 취한 형을 업고 들어갈 수 있었던 승협이 형의 방과, 훈이 형이 저번에 제게 가져왔던 사진과, 제가 따로 준비한 녹음본과, 그렇게 몇 달이고 찾아다닌 자료들이 한 박스의 높이를 넘어섰을 때 경찰에 가져갔어요. 승협이 형은 아직도 순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훈이 형과도 즐겁게 웃었지만, 제게도 가끔 밥을 사주고 농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몇 번이나 고민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미안해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형은 지금쯤 어떤 기분일까요.

 

 

 

  제가 이 편지를 쓰는 건, 저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형을 위해서기도 해요. 지금쯤 형이 울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형은 언제나 눈물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니까.

 

 

 

  위에서 편지를 쓰던 중 왜 갑자기 저희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나 궁금했어요. 계속해서 쓰다보니 이제 알겠더라구요. 우리 형. 형은 행복했나요? 예전보다 더, 새로운 세상을 맞은 것처럼 기뻤나요? 아니면 잃어버린 첫사랑을 만난 게 놀라웠나요? 이걸 묻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어요. 어릴 때의 전 그저 형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에요. 우리 형에게, 봄이 찾아오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승협이 형이 수줍게 웃던 게 기억나네요. 사실 승협이 형이 절 불러내서 말한 적이 있어요. 훈이를 정말 사랑한다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웃는 미소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신혼 같더라구요. 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어느샌가 웃음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손 안에 있는 물기어린 유리잔을 만지작거렸어요. 사실 내가…, 그러니까 승협이 형이 정말 나쁜 일을 했었다고. 어릴 적 생활고에 시달렸고, 어쩌다보니 자꾸만 깊은 길로 빠져들어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면서. 그러다보니 정말 내가 갇혀있다는 생각에만 빠져, 분명 벗어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렇게 승협이 형이 느릿느릿 말해오는데, 그건 변명일까요, 핑계일까요, 그저 누군가 살아왔던 사실에 불과한 이야기일까요. 이때 승협이 형은 술에 취해있지 않았어요. 맨정신이었죠. 우리 사이에는 커피 두 잔이 나란히 있었고 카페 사장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쩌지 걱정될 정도로 적막했어요. 문득 죄인의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가 된 느낌이 들었어요. 새까만 천이 내려오면 우리 사이가 아니라 승협이 형을 덮고 목을 조를 것처럼 어둑했지만요.

 

 

 

  승협이 형은 제 표정을 빤히 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말했어요. 이제부터 그런 일은 다 그만둘 거라고, 손을 씻겠다고요. 승협이 형은 무슨 일을 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전 되묻지 않았어요. 그간 늘상 해온 훈이 형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듯 고개만 끄덕이는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커피의 얼음들이 투명하게 녹아 옅은 층을 냈어요. 제가 거기서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요 형. 행복하세요. 이런 말이나 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승협이 형이 웃던 게 기억나요. 웃는데도 우는 것 같은 얼굴로요. 고맙다고 말하면서. 전 그때 등허리에 소름이 끼쳤어요.

 

 

 

  요즘도 승협이 형은 자주 악몽을 꾼대요. 죽어 쓰러진 전 애인이 생각나서 잠이 안 온대요. 사실 애인이라는 것조차 의뢰를 위한 잠깐의 가짜 작업에 불과했지만, 그런데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얼굴이 훈이 형이 되어 있대요. 자기가 그렇게 형마저 죽여 버릴 것만 같다고, 그 사실이 너무 무섭대요.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대요.

 

 

 

  훈이 형. 승협이 형은 지금 어떤가요. 무사히 도망쳤나요? 승협이 형은 지금까지 남들 눈을 피해 떠돌며 외롭게, 그리고 안 들키게 잘 살아온 사람이니까, 사실 그 정도로 쉽게 붙잡히진 않을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자기만의 방법으로 경찰의 눈을 따돌리고 훈이 형 옆에 앉아서 기대감 섞인 표정으로 밝은 앞날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제가 지금껏 한참이나 적어내린 편지글과는 다르게요. 그럼 훈이 형은 승협이 형과 함께 무사히 아무도 모르는 타국에 도착해서, 하객도 없이 둘 뿐인 결혼식을 마치고, 행복하게 웃겠죠. 머리 위로 하늘하늘 꽃잎이 떨어질 거예요. 앞으로의 둘을 축복하듯이요. 그럼 둘은 이제 정말 행복해질까요? 제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훈이 형의 나날들을, 함께해줄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니면 훈이 형은 지금 혼자 남았을까요. 형, 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이 편지를 형에게 보낼 날이 올지는 모르겠어요. 처음엔 분명 말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어쩌면 원망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중요한 건 그 대상조차 알 수 없다는 거예요. 훈이 형, 모르겠어요. 눈물이 나요. 그저 울고만 싶어요. 제가 형을 불행하게 만들었을까봐 겁나요. 형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던 것 만큼은 분명했는데, 전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나요, 사실 승협이 형이 제가 왔다 간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했을지도 모르구요. 그렇다면 제가 지금 이렇게 슬픈 이유는 뭔가요. 전 너무 싫었는데, 무서웠는데, 그래서 훈이 형에게까지도 못할 짓을 했는데…

 

 

 

 

  봄이 왔어요, 형.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에 쌓여 있던 눈은 어느새 다 녹고 앙상한 나뭇가지엔 초록색 잎이 피었어요. 언제 날이 이렇게 따뜻해졌을까요. 왜 그런데 저는 모르고 있었을까요. 형은 유독 추위를 잘 탔으니 겨울도 길었죠. 조금만 날이 추워져도 멀리 나가는 것도 싫어했잖아요. 훈이 형, 저는 형이 행복해지리라 믿어요. 형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리란 걸 믿어요. 봄이잖아요. 형에게도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잖아요.

 

 

 

 

  사랑해요 형. 제발 행복하세요.

 

 

 

  우리 형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성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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