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ekend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앞의 글을 보지 않으셨어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처마 밑으로 빗물이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재현의 시야에 수박이 불쑥 들어왔다.
"야 안 가냐?“
"왠 수박이야."
"승협이 형이 너 수박이라도 사먹이라고 돈 보냈던데?“
승협의 얘기에 입을 꾸욱 다무는 재현을 보며 두 번째 수박 조각을 베어문 훈이 고개를 저었다.
"형도 심란할 텐데 전화 좀 해라."
"이따가."
"그래라. 야 그거 먹고 이거 두 조각 더 먹어라."
깨작이는 재현이 맘에 안 드는지 하나 더 들고 일어난 훈이 접시 위에 남은 두 조각은 꼭 먹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 나가는데 돌아오면 좀 꺼져있어라?"
"싫어."
"아 언제까지 있을 건데."
일어서던 훈이 다시 주저앉자 몸을 돌려 다시 밖을 쳐다보던 재현이 빗소리에도 묻힐 것 같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라.."
"승협이 형 아버지가 뭐 하루이틀 만에 자리 털고 일어나실 지도 모르고 너 벌써 5일이나 여기 있었는데? 형 대구 내려간 날부터 있었잖아."
"그래도 휴가도 남았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고집을 보여주듯 흘리는 말끝에 끈질기게 말해볼 생각이 사라졌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훈은 일어났다. 두 조각 남은 수박 중 하나를 집어 베어 물자 밍밍한 물맛이 나 다시 그릇에 내려놓은 재현이 다리를 끌어안았다.
"나 나간다!"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재현은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
5일 전
"어.. 그랬나. 그럼 내려가야겠네.."
코로나로 멀리는 못 가고 사람들이 적은 해변이나 숲을 돌면서 캠핑을 하기 위해 장 봐온 물건을 정리하던 중에 걸려온 전화는 승협의 표정이나 간간이 하는 대답만 들어도 어떤 일인지 충분히 짐작 가는 내용이었다.
"재현아, 미안한데 나 대구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왜 누구 아프셔?“
"아버지 쓰러지셨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찡그려진 얼굴로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하는 말들에서 진한 슬픔과 혼란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 재현은 가만히 그를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캠핑 장비 옆 승협의 옷가지가 든 가방은 그대로 그의 손에 들려 새벽 기차에 태워졌다.
"내려가면 전화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해."
"어..“
"괜찮을거야..“
차마 하지 못하고 있던 말을 재현이 하자 갑자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승협이 주변을 둘러보다 무작정 재현의 손을 잡아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사람 두 명이 빠듯하게 들어가는 자판기 사이의 공간에 재현을 밀어 넣은 승협이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양 볼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놀랐지만 등허리를 끌어안는 승협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낀 재현이 입술을 떼고 목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허리에 힘주어 매달렸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
"잘 도착했어?“
‘응, 경대병원이야.’
"괜찮으시대?“
‘아니, 지금 코로나 검사 결과 나와서 겨우 일반 병실로 옮겼어. 일단 1인실로 잡았는데 오래 계셔야 하면 좀 더 사람 많은 데로 옮기려고.’
"그래? 형 어머니는 어떠셔?“
"놀라셨나봐,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는 했는데 쓰러지실 줄이야 몰랐으니..“
"많이 놀라셨겠다.“
"응.“
길어지는 침묵이 어색해질 무렵 재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벌써 10분이나 전화했네. 승짱 이제 들어가봐, 깨실 때 옆에 형 있어야지.“
‘그래.’
무거운 승협의 목소리에 선뜻 전화를 내려놓지 못한 재현이 끊기지 않은 전화에 다시 입을 열었다.
"형 그럼“
‘걔야?’
‘어? 어. 재현이다.’
‘아직 같이 살고?’
‘당연하지.’
작게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재현이 전화를 제대로 끊으려 할 때 자신의 얘기가 들렸다. 손에 든 전화에서 작은 소리가 계속 새어 나오는 걸 듣던 재현이 결국 통화를 스피커로 돌리고 앉아있던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버지는 너 결혼했으면 하시더라.’
‘엄마.’
‘그냥 그렇다고.’
‘그냥이 어딨어.’
‘엄마가 그 정도도 말 못 하니.’
‘안 한다고 한지가 언젠데 아직 그러니 그렇지.’
‘이제 너도 스물아홉이니 생각이 달라졌나 했지. 얘는 뭘 묻지도 못하게 하네.’
‘물어봤자인데 뭘 물어.’
‘그래도.. 내려온 김에 선이나 한번 볼래?’
‘엄마.’
‘아, 알았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재현은 손을 뻗어 스크린 위의 붉은 버튼을 살짝 건드렸다. 바로 종료되는 통화에 다시 고개를 무릎에 묻은 재현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
‘재현이 25:00’
"아."
"왜?“
"아니야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급하게 자켓을 챙겨 일어나는 승협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그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승협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 잠시만..“
"아니, 아니, 여보..“
"어? 아빠! 엄마 여기 있어봐라."
***
멍하니 거실에 앉아 거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캠핑 장비를 보던 재현은 밖의 빗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마랬지.."
잠시 생각하다 가방 중 자신의 옷이 든 가방에서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코펠을 뺀 재현이 그대로 집을 나섰다.
***
"형 아직 연락 안 와?"
"어. 바쁘겠지."
막무가내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온 재현을 보고도 별 말 없이 자신이 마시던 맥주를 하나 꺼내준 훈이 오징어를 씹다 묻자 재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하기야.. 너 여기 와있다고 톡은 보냈어?“
"아니. 그냥 이따 전화 오면 얘기하게."
"너가 먼저 걸어봐."
"바쁜데 그냥 기다릴래."
"왜.“
"모르겠어. 그냥 전화하기 싫어.“
재현의 고등학교 친구인 훈은 지난 7년간의 둘의 연애사에 대해서는 가끔 본인들보다도 정확할 정도로 많은 데이터베이스를 자랑했지만, 그 기록 중 김재현이 연락을 피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싸움은 한바탕한 뒤 자신을 찾아온 재현이 술을 마시고, 취하지는 않았지만 취기는 적당히 올라올 때 승협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가장 흔한 패턴이었다. 그리고 다른 수십 가지의 패턴 중 그 어느 것도 ‘김재현이 이승협을 피한다’라는 지금의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형이랑 싸운거 아니야?“
"응. 그냥.."
"그냥 니가 형 연락을 피한다고?"
"바쁘잖아."
"그래. 있다 가라. 어차피 형 꽤 대구 있어야겠네."
훈은 살짝 움찔하는 재현의 어깨를 봤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말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부엌에서 맥주와 땅콩만 더 들고 올 뿐이었다.
***
‘재현아, 잤어?’
늦은 밤에 온 전화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현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푸른 표면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는 진한 피로가 묻어있어 하루종일 승협의 전화를 피한 것이 미안해진 재현은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목이 메어왔다.
"응. 훈이네 놀러 왔는데, 좀 일찍 자려고 했어."
‘피곤하겠다.’
"형이 더 피곤하지.."
‘아버지는 아까 낮에 일어나셨어. 쓰러지면서 머리를 살짝 부딪치셨는데 뇌진탕 올 수 있으니 경과 좀 보고 퇴원해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도 빨리 일어나셨다니 다행이다.."
‘재현아, 아까 얘기 신경쓰지마. 엄마 원래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
누가 들어도 자다 깬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에 승협이 급하게 꺼낸 이야기에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하지만 또 미안해지는 기분에 재현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일도 병원에 하루종일 있어야겠네. 밥 잘 챙겨 먹고 전화해."
‘응, 너도. 사랑해.’
"나도."
숨을 들이쉬고 한 번에 다다다 쏟아부은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고 재현은 그제야 참아온 숨과 울음을 한 번에 토해냈다.
***
"형 언제 온대?"
"혹시 몰라서 레일 설치하는데 그거 되는 거만 보고 온대."
"그렇냐. 그럼 며칠 더 있겠네?“
"몰라.“
"뭘 자꾸 모른대. 뭐 때문에 이러는데.“
여행을 못 갔다고 화난 것도 아니고, 승협이 대구에 오래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닌데 왜 재현이 장마 내내 우울해하는지 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 내려간 날, 형이 전화를 안 끊어서 형이랑 어머님이 얘기하는걸 들었어.“
"그래서.“
"결혼 얘기하시더라고.“
"뭐 너나 형이나 하루이틀이냐 그게.“
"몰라 근데 형 진짜 대구 오랜만에 갔잖아. 마지막으로 아버지랑 크게 싸우고 지금 2년 만에 갔단 말이야."
"2년? 오랜만이긴 하네."
대꾸하던 훈이 앞의 치킨이 차가워질까 서둘러 입에 다리를 물고 뜯어먹으며 재현에게도 다리를 건넸다.
"야, 다리 먹어.“
"아 진지한 이야기하는데."
"치킨 식잖아. 그래서 뭐 어째. 형 오랜만에 갔는데 뭐."
다리를 크게 베어물고 맥주까지 한 모금 마신 재현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 훈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치킨 상자를 뒤적였다.
"우리가 이제는 헤어지는게 맞나 싶더라고. 나는 우리 부모님 그래도 가까이 계시고 만나도 그냥 이제는 별말 안 하시니까 괜찮은데.. 옛날에 형이 술 마시고 부모님 볼 때마다 죄짓는 기분이라고 그랬거든."
"그 형은 그런 소리는 왜 하냐."
"그러고 나서 바로 그래도 니가 너무 좋다고 그랬어."
"야 그거 그때 아니야? 그 헤어지냐 마냐 엄청 싸우고 형 어디가서 술 존나 마시고 동아리방 와서 나 내쫓은 날?"
"어. 그날 맞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순식간에 평소에 순하게 축 처진 눈꼬리가 의심으로 올라가는 걸 본 훈이 마시려든 맥주도 내려놓고 항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야! 내 가방, 지갑, 폰 전부 안에 있는데 형이 나가라고 떠밀었잖아! 술 취해서 힘만 존나 세서 나가긴 했는데 겨울에 추워서 복도에서 덜덜 떨다가 니가 갑자기 문 열더니 형 뻗었다고 같이 좀 데려다 달래서 니는 질질 짜고 형은 존나 늘어져서 자취방에 넣어주고 왔잖아! 어이가 없네?"
"아 그랬나?"
다시 순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재현에 짜증은 났지만 일단 집에서 내보내야 하는 훈이 잠자코 다시 이야기를 끌어냈다.
"그거랑 이거랑 왜."
"아니, 나는 그래도 가족이랑 잘 지내는데 형은 너무 그렇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냥 어쩌면 형이랑 헤어지는 것도 맞는 일인가 싶었다고.."
맥주도 내려놓고 멍하니 마당을 보면서 재현은 말을 이었다.
"뭐 그렇다고 헤어지진 않을 거야.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왜 이렇게 우울해.“
"그냥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형도 힘드니까 그런 티 내고 싶지 않은데 그냥 캠핑갈 물건 널려있는 거실에 혼자 있으니까 갑자기 형이 없으면, 안 돌아오면, 그럴 리 없는 일들을 자꾸 상상하게 되니까.“
혼자 가만히 생각하던 재현이 내려놓은 맥주를 다시 들고 마셨다.
"야, 나 이거 먹고 갈래."
"왜."
"집 가서 좀 치워 놓고 형 오면 남은 휴가라도 집에서 편하게 보내게."
"이럴거면 치킨 시키기 전에 가지 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맥주 캔을 들어보이는 훈의 캔에 자신의 캔을 부딪친 재현이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
호기롭게 나왔지만, 재현의 생각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차를 들고 올걸, 지금이라도 택시를 탈까 하며 몇 번의 환승을 거쳐 겨우 다다른 집은 당연하게도 엉망이었다.
급하게 빼느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코펠을 정리해서 캐비넷에 넣고 챙겨둔 양념과 접시까지 잘 정리해 넣고 텐트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였다.
***
"승협아."
"어, 아부지 왜."
"엄마가 하는 말 너무 신경쓰지마라."
"어. 알겠다.“
환자 침대 옆의 소파에 몸을 쪼그리고 누운 승협에게 아버지가 건넨 말은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냥 니 좋은대로 해라. 니가 좋은게 우리도 좋은거지."
"어."
"나중에 한 번 데리고도 오고 그래라."
"어.“
"내일은 올라가라. 너무 오래 있는거 아니가."
"퇴원하는건 보고 가야지.“
"괜찮다. 가봐라.“
"알았다. 아버지도 자라 이제."
"그래. 올라가면 엄마한테 연락도 좀 자주하고 해라."
가슴에 뭐가 막힌 듯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삑삑삑삑삑’
"어?"
"재현아!"
"승짱?"
재현이 멍하니 있는걸 본 승협이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가서 품에 가두듯이 끌어안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씻고 짐 챙겨서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형 일찍 왔네?"
"응. 먼저 가보라 하셔서 그냥 왔다."
"그래?"
그새 조금 야윈듯한 등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잡고 볼과 입술에 마구잡이로 입술을 들이미는 승협을 받아주며 재현은 눈물이 왈칵 나는 게 느껴졌다.
"왜 울어."
"그냥 보고 싶어서."
"나도."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승협이 갑자기 생각이나 말을 꺼냈다.
"캠핑 있잖아, 우리 짐 챙겨서 지금이라도 갈래?"
"아니아니. 우리 그냥 남은 일주일은 집에서 쉬자. 형도 피곤하고 나도 좀 피곤해."
안 가겠다는 재현을 보며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승협이 거실의 텐트를 보더니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짜?"
"형 피곤한데 운전 안 돼. 장마도 안 끝나서 비도 또 온다는데.."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나.."
못 가는 것이 꽤나 아쉬운지 승협은 괜히 애꿎은 텐트만 만지작거렸다.
"아니면 형, 그냥 여기에 저거 펼치고 안에서 잘까?"
"응?"
"어차피 나가도 비 맞고 그럴 것 같은데 거실에다 설치하면 어때?"
"그것도 괜찮네. 그러자."
***
"내일은 비 안 온대. 장마 끝이라는데?"
"그래? 그래도 안 나갈래애애..“
"알겠어. 근데 진짜 이거 펼쳤다고 좀 캠핑 같다? 라면도 그렇고."
"봐 코펠에 끓이면 대충 캠핑 느낌 난다니까?"
"그렇네."
"승짱.."
"응."
"같이 있으니까 좋다."
텐트에 마주보고 앉아있다 쇄골 쪽에 머리를 기대오며 하는 말에 웃은 승협이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기대있는 재현의 양팔을 잡아 다시 똑바로 앉혔다.
"재현아, 내가 반지를 못 사왔는데.."
"어?"
"나랑 결혼할래?"
"어?"
"갑작스러운 것도 알고 우리가 뭐 지금까지는 결혼한 거 아니냐 하면 할 말도 없고, 어, 그렇기는 한데, 어.."
"형."
"어어."
"결혼하자."
횡설수설하는 승협의 손을 끌어다 잡은 재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되는지 승협은 긴장을 풀고 웃었다.
마주보고 앉은 재현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힌 승협이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진짜 보고싶었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사랑해."
"나도 사랑해,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