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눈이 내렸다. 시린 칼바람이 무섭게 얼어붙은 계곡 사이를 돌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얼음 위에 서 있던 회승이 작업 때문에 벗어뒀던 겉옷을 챙겨입었다. 몸이 둔해지는 게 싫어서 작업 중에는 잘 입지 않았지만 거의 최소한의 보온 기능만 가진 얇은 옷만 걸친 채로 이 바람을 그냥 맞는 건 자살 행위였다. 두껍고 무거운 털옷을 두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야로 눈보라가 빼곡히 들어찼다. 하얀 눈꽃들이 회오리치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회승이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렀다. 목표했던 지점에 정확히 내리치자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회승이 익숙하게 얼음 위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떼어낸 얼음덩어리를 끈으로 꽉 동여매고 수레에 밀어 실었다. 뾰족한 모서리에 손이 베일 뻔했지만 속 편하게 다듬을 시간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리면 이 눈보라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히고 말 터였다.
눈보라를 지나온 회승의 옷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큼지막한 얼음덩어리를 작업실로 들여놓기 전 마당에 내려 둔 회승이 얼음의 가장자리를 쳐내 다듬었다. 회승의 집은 대대로 얼음을 깎았다. 눈이 내려도 녹지 않는 세상에서 얼음은 어떤 광물보다 흔했고 쉽게 녹아버리지도 않아 관리에 약간만 신경을 써준다면 조각상에 쓰이는 비싼 재료들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얼음 조각들을 가지고 놀던 회승은 귀하고 값비싼 보석보다 편하게 다룰 수 있으면서도 여느 보석에 뒤지지 않게 투명한 얼음 결정을 더 좋아했다. 꽁꽁 얼어있을 때는 함부로 손댈 수 없이 단단하지만 그 강도가 무색하게 약간의 열로도 힘없이 녹아내린다는 점에서 얼음의 투명함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언제든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느낌을 줬다. 부서지지 않는 한 영원히 반짝이는 금은보화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래서인지 회승은 자신이 섬세하게 보살펴야 하는 얼음 조각들이 비싸고 귀한 보석들보다 더 정이 갔다. 누군가에게는 길가에 채는 얼음일지 몰라도 회승에게는 보석보다도 훨씬 귀한 것들이었다.
작업실의 문을 열고 얼음을 내려둔 회승이 내부의 단단한 철문을 열었다. 아주 드물게 기온이 영하를 벗어나는 날에 조각상들이 조금이라도 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둔 보관소였다. 옷을 끌어올려 코끝까지 가린 회승이 작은 등불을 집어 들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로 들어가면 불빛 없이는 눈앞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 할 정도로 새까만 어둠이 펼쳐졌다. 그리고 수많은 크고 작은 얼음 조각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한 조각상이 있었다. 자신보다 조금 더 큰 조각상 앞에 선 회승이 조각상을 덮어놓고 있는 흰 천을 걷어내자 성인 남성의 형상이 드러났다. 회승의 아버지가 만든 역작이었다. 회승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대자 한기가 손바닥에 고였다. 자신보다 한뼘 높이 위치한 얼굴 부근을 닿을 듯 말듯 쓸어내리는 손이 혹여나 손끝이 닿기라도 할까 잔뜩 긴장한 채 바들거리며 떨렸다. 감상하듯 천천히 쓸어내리던 손이 얼어붙은 팔을 따라 조각상의 손끝으로 도달했다. 손을 맞잡기라도 할 것처럼 방향을 틀어 아주 약간의 틈을 사이에 두고 얹어진 손은 까닥하면 손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얹어진 손을 맞잡아 줄 것처럼 뻗은 손은 회승의 세상 만큼이나 차가웠다. 조각상의 차디 찬 손등 위로 입 맞추는 시늉만 겨우 한 입술이 아쉽게 떨어졌다.
회승은 어머니에게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아주 먼 옛날 세상은 생명이 푸르게 피어나고 활기가 넘쳤지만 오만방자하게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원하는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신이 세상을 얼어붙게 했다고 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빙하기에도 시간은 흘러 인간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고 그걸 소중히 여겨 신의 뜻을 거스르면 안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회승이 태어나서부터 봐 온 세상은 언제나 시리도록 하얗기만 했고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시답잖은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열려있는 문틈을 비집고 집 가장 깊숙이 위치한 공간에 발을 들인 회승은 그곳에서 자신의 신을 만났다. 작은 아이의 눈에 그건 마치 부모님이 얘기해주시던 온갖 미사여구가 점철된 천사라는 존재 같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 그것이 천사나 신의 형상이 아니고 단순히 아버지가 만든 조각상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회승에게 신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동시에 세상에 혼자 남은 회승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침대 맡 인형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까마득하게 올려다봐야 했던 조각상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의 높이가 엇비슷해질 때까지 회승은 항상 이 조각상을 뛰어넘는 조각을 하기 위해서 애썼지만 단 한 번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얼어붙은 한기 대신 따뜻한 온기가 맞잡은 손에 감돌기를 바랬다. 초점 없이 허공만 바라보는 눈동자가 자신을 따스하게 돌아봐 주기를 바랬다. 이미 더 이상 추워질 수 없을 정도의 혹한을 살아나고 있는 회승은 녹지 않는 얼음의 온기를 원했다. 한동안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서 있던 회승이 다시 조각상에 흰 천을 둘러 덮고 등불을 챙겼다. 이제 정말 밤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실내로 들어온 회승이 온 몸을 답답하게 덮고 있던 길고 두꺼운 털옷을 벗었다. 바깥보다 덜하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싸늘한 실내의 공기가 훅 몸을 감싸왔다. 서둘러 불씨가 거의 사그라들어간 벽난로의 불을 살린 회승이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이 없는지 창문과 문틈을 다시 점검했다. 차가운 온도가 조금이라도 덜 전달되도록 두터운 천으로 꼼꼼히 가린 창문을 덮자 등불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암흑을 밝혔다. 회승이 찬장에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손에 딱 들어오는 컵의 반 정도만 액체를 채워 벽난로 앞에 앉았다. 타닥거리며 마른 나무가 타들어 갔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회승이 술을 마셨다. 이 세상에서 취급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독한 술이었다.
온 몸이 온통 땀에 젖은 채로 잠에서 깬 회승이 대번에 몸을 일으켰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공기가 뜨거웠다. 서둘러 집 밖으로 달려 나가 문을 열자 더욱 뜨거운 공기가 훅 끼쳤다. 항상 쌓여있던 눈이 녹아 생긴 물웅덩이가 발아래 고여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임에도 비정상적으로 기온이 높았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새벽이 온통 소란스러웠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머리로도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을 떠올린 회승이 서둘러 작업실로 향했다. 문단속을 하는 것도 등불을 챙기는 것도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조각상 앞으로 도달한 회승이 초조한 손길로 흰 천을 벗겨냈다. 겨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서늘한 곳에 보관되어있던 조각상은 아직 멀쩡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벌써 표면에 물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 곳의 공기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던 회승은 길어야 하룻밤일 것을 직감했다.
단 한 번도 눈이 자연히 녹은 적이 없는 세상이었다.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상 기온 앞에서 추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버티지 못했다. 회승의 손이 조각상의 볼을 감쌌다. 맨 손으로 얼음을 만졌는데도 손바닥이 달라붙지 않았다. 이미 녹기 시작한 얼음은 형태를 유지하는데 급급해 다른 것들을 얼리지도 못했다. 처음 잡아 본 손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했다. 차라리 이 조각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지켜볼 일은 없었을 텐데. 현실감 없이 붕 떠 있던 머릿속이 천천히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경직되어 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조각상의 발치에 쭈그려 앉은 회승의 머리 위로 조각상의 손끝을 타고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비처럼 떨어졌다. 단 몇 시간 만에 세상이 뒤바뀌었다. 회승의 세계가 무너지는 중이었다.
하늘에 커다란 태양이 떠올랐다. 수평선 위로 시뻘건 용암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를 팔팔 끓게 만들 것만 같은 붉은 색을 하고서 천천히 머리 끝부터 디밀었다. 햇빛은 옷 틈 사이로 드러난 연약한 피부를 금세 시뻘겋게 만들었다. 겁도 없이 함부로 태양을 올려다본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 얼음이 녹고 눈 덮인 산이 무너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땅에 공기가 일렁였다. 지층이 요동치며 갈라지는 중이었다.
서늘했던 창고 속의 공기마저 숨쉬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질 즈음 회승이 잔뜩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오래 숙인 채 두 팔에 묻고 있어 뻣뻣이 굳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던 회승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눈에 식겁하며 화들짝 놀라 뒤로 팔을 짚으며 몸을 뺐다. 바닥에 팔을 짚기가 무섭게 찰박 물소리가 들렸다. 둥그런 두 눈동자가 멀어진 회승을 쫓았다.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모르는 사람이 분명한데 어딘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놀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차분히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던 회승이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각상이 놓여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보면, 늘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두 눈이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날렵하게 잘생긴 얼굴이나 걸치고 있는 얇고 하늘하늘한 옷의 모양이 똑같았다. 말도 안 돼. 회승이 중얼거렸다. 꿈일까 싶어 회승이 입 안 여린 살을 힘껏 깨물었다. 깨물린 살이 얼얼했다. "...안 돼?"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남자가 어설픈 말투로 회승의 말을 흉내 내며 웃었다.
"말도 하네."
"...하네?"
"따라 하는 것 밖에 못해요?"
"못해요."
꿈이라도 이렇게 허무맹랑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얼어붙을 듯 춥던 날씨는 비정상적으로 기온이 상승해 마치 사람을 말려 죽이려 드는 것 마냥 무서운 기세로 뜨거워지는 중이었고 회승의 앞에서는 얼음에서 사람으로 변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어쩌면 회승이 평생 갈구하고 바라왔던 존재였지만 회승은 이상하게도 금세 침착해졌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름은 알아요?"
"이름."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 아이처럼 신이 나 들뜬 표정을 하고서 남자가 눈을 빛내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회승이 오래 앉아있어 저린 몸에 힘을 줘 일어서자 남자도 잽싸게 따라 일어났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회승을 졸졸 쫓아왔다. 보관소를 나서자 눈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 찌르듯 들이닥쳤다. 찐득한 습기가 온 몸에 달라붙었다. 회승이 사는 집은 마을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회승은 서둘러 남자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등에 잠깐 닿았다 떨어진 햇빛이 따끔해서 급한 대로 조각상을 덮어두는 천을 가져다 남자의 몸 위로 둘렀다. 머리 끝부터 망토처럼 꼭꼭 여민 남자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창문으로 상황을 살핀 회승이 커튼을 여미고 등불을 약하게 밝혔다. 기후 변화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는 근처 얼음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태양 빛 아래로 발을 내딛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에 우선 밤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겪는 더위에 얼굴이 발개진 회승과 달리 남자는 흰 천을 계속 두른 채였고 별로 더워하는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벽난로 앞 흔들의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끼익 소리를 내는 의자 위에 몸을 맡긴 채로 손장난을 치는 남자의 앞으로 회승이 다가서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회승을 올려다봤다. "이름." 대뜸 뱉어지는 단어에 회승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남자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회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회승."
"어떻게 알아요?"
조각상 창고 안에서 자신이 이름을 얘기했던 적이 있었는지 고민에 빠진 회승을 반짝이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남자가 대뜸 두 팔을 회승의 허리에 감아 끌어안았다. 회승, 회승아. 공기가 잔뜩 들어찬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회승은 홀린 듯이 팔을 남자의 어깨 위로 둘러 마주 끌어안았다. 남자의 목소리에 가슴 한 쪽이 울렁거렸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쏟았던 애정이 남자의 눈 안에서, 목소리에서 따뜻한 온기로 빛나고 있었다.
뒤바뀐 세상에서도 밤은 왔다. 바늘 같던 빛의 기세가 사그라들었고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에 비하면 밤의 공기는 선선하기까지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추위를 피해 꼭꼭 숨어야 했던 이전의 밤과 다르게 지금은 해가 지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직 완전히 어둑해지지는 않았지만 해가 모습을 감춘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눈에 모든 색이 덮여 고요하고 희기만 하던 세상이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흙바닥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물에 젖어 얼룩진 땅 위로 그새 아주 작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회승이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던졌다. 회승의 집은 마을에 비해 고도가 높은 곳에 있었다. 잘 다듬어진 평지에 비해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길은 매우 험해서 그 곳에서 나고 자란 회승만이 사이를 오갈 수 있었다. 보다 더 안전하고 왕래가 편한 곳으로 옮기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회승은 자신의 집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회승에게 이미 수족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은 어느 곳보다 편했고 무엇보다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저 멀리에 아득한 수평선이 보였다. "회승아."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어깨 위로 길쭉한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회승이 몸을 돌리자 남자가 와락 회승의 목을 끌어안았다. 남자의 어깨 위에 둘려 있던 흰 천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회승이 잡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바닥으로 볼품없이 추락한 뒤였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상관없다는 것처럼 남자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회승아."
"내가 웃겨요?"
"웃겨?"
감겨있던 팔을 풀어낸 남자가 맨발로 뒷걸음질 치다가 자신이 떨어트렸던 천을 밟았다. 발에 느껴지는 낯선 촉감에 멀뚱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허리를 숙여 천의 끄트머리를 잡아 올렸다. 눈이 녹아 질척해진 땅에 짓눌려진 천은 진흙이 묻고 젖어서 꼴이 엉망이었다. 회승이 남자의 손에서 더러워진 천을 빼내고 대신 자신의 손을 쥐여주었다. 남자는 회승에게 붙들린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내려다보니 마구잡이로 땅을 밟아댄 남자의 발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남자를 잠시 문 앞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온 회승이 천을 물에 적셔왔다. 얼음이 녹은 물이지만 낮 동안에 데워져 한기는 거의 없었다. 남자의 팔을 자신의 어깨 위로 짚게 한 회승이 무릎을 꿇고 앉아 수건으로 남자의 발을 닦아냈다. 간지러운지 위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회승이 남자의 양 쪽 발을 다 닦아내고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남자의 몸이 회승에게로 기울어졌다. 급작스럽게 무게를 실어 오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회승이 기우뚱거리다 이내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너졌다. 옷 위로 회승보다 살짝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귓가에서 들리는 기분 좋은 고양이 같은 나른한 숨소리를 들으며 회승이 손안에 들어오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회승은 남자를 형이라고 불렀다. 따지고 보면 남자는 이제 갓 태어난 것과 다름 없었지만 평생을 동경해왔던 존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회승이 막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경외의 대상으로 대하기에 남자는 너무 어린 아이 같았다. 그래서 회승은 그냥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형이라는 짧은 단어를 내뱉자 순진하게 뜨여진 두 눈이 깜빡거렸다.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던 남자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회승을 가리키며 회승의 이름을 불렀다. 회승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자신을 가리키며 형, 회승의 발음을 흉내 내며 단어를 뱉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형이라는 단어만 반복하는 남자를 바라보던 회승이 몸을 일으켰다. 아래에서부터 시선이 따라붙었다. 수납장에 쌓인 잡동사니를 뒤적이던 회승이 처박혀 있던 소설책을 하나 들고 왔다. 남자의 앞에 털썩 앉은 회승이 오랜만에 책을 펼쳐 들었다. 신기해하는 시선이 집요하게 뭉툭한 손가락을 쫓았다. 첫 줄부터 찬찬히 짚어나가며 회승이 소설책의 등장하는 이름을 차례로 읊기 시작했다. 회승의 행동에 호기심을 품은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불만이 있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가 회승이 하나둘 이름을 읊어나가자 표정을 풀고 회승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승협. 갑자기 남자가 회승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주친 두 눈이 반짝거렸다. 회승이 멈칫했다가 방금 불렀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승협. 다시금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킨 승협이 입술을 달싹였다. 승협. 그리고 회승을 가리키며 말했다. 회승. 잘생긴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회승아.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자신의 이름이 처음으로 몸을 떨리게 하는 진동을 동반했다.
회승의 말을 단어 단위로만 겨우 따라 하던 승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단어를 조합하기 시작하더니 곧 문장 단위로 대화를 구사하는 법을 익혔다. 매일같이 회승의 뒤를 따라다니며 말을 걸어대던 승협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까지 문장 구사력이 향상 되자 이것저것 묻는 것을 그만두고 회승의 집에 있던 책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히 회승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것도 줄어들었다. 귀찮은 일이 사라진 건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회승은 왠지 모르게 섭섭한 기분을 느꼈다. 괜히 심통이 난 마음에 책을 집중한 승협을 방해하려 등불을 가리고 섰다가도 무슨 일이냐고 말하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순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면 회승은 괜히 민망해지곤 했다. 승협은 단 한 번도 회승에게 집중의 시간을 방해받았음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일이 없었다. 승협의 눈은 결코 회승을 그 어떤 것의 뒤에도 놓지 않았다. 한결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애정을 담아 회승을 바라봤다. 회승은 아주 오랜만에 그리운 감정과 재회했다. 절대적인 신뢰와 조건 없고 따스한 애정이 주는 충만감이 두터운 얼음벽을 녹이고 있었다. 투명하고 차가웠던 심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손바닥 만한 새의 심장 소리처럼 아주 작았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한 이상 얼었던 수면이 부서질 것을 회승은 직감했다. 그러나 불현듯 닥친 재앙 앞에서 한낱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급작스럽게 기온이 상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잔뜩 몰려든 구름 덕에 맨살을 노출해도 화상을 입지는 않을 정도로 햇빛이 약해졌다. 회승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를 봤다. 하늘이 서럽게 우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팔을 내밀자 차가운 빗방울이 회승을 반기듯 피부 위로 앞다투어 투두둑 떨어졌다. 밖으로 나온 회승이 온 몸으로 내리는 비를 맞았다. 집 안에서 후덥지근한 공기를 두른 채 종일 땀 흘리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느새 창가로 다가온 승협이 비를 맞는 회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으로 쏟아지는 비를 받고 있던 회승이 젖어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넘기다 승협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회승을 보며 웃고 있던 승협이 긴 다리를 이용해서 허리께에 있던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단번에 가까이 다가와 회승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왜 문 놔두고 창문으로 와요?"
"돌아오기 싫어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간지럽다며 승협이 키득댔다. 맞잡고 있던 비에 젖은 손을 그대로 끈 승협이 회승을 품으로 당겨 안았다. 졸지에 품에 안긴 회승이 놀란 눈을 껌벅였다.
"뭐예요, 갑자기."
"지금은 안 덥잖아. 그치?"
틈만 나면 회승에게 달라붙으려고 드는 승협에게는 안타깝게도 회승은 아직 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다. 승협이 자기보다 체구가 작은 회승을 귀여워하는 게 회승도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와 부둥켜안고 있기에는 회승에게 너무 가혹한 날씨였다. 이상할 정도로 산뜻한 얼굴로 덥다는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승협은 덥다며 뻗어오는 손을 피하던 회승이 많이 서운했었는지 회승이 벗어나려고 하는 기색이 없자 반색을 하며 회승을 끌어안았다. 그러면서도 시무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회승의 눈치를 살피는 승협을 바라보던 회승이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듯 기대오는 마른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워낙 더운 기온 탓에 비를 맞아도 회승의 더위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마주 안은 승협의 서늘한 체온이 회승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원래도 회승보다 체온이 낮은 승협은 빗속에서 물을 맞아 더 서늘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게 기분이 좋아 회승이 승협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자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승협이 간지럽다고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 모습에 회승이 작성하고 손을 뻗어오자 승협이 회승의 손을 피해 몸을 웅크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승협의 위로 회승이 겹쳐졌다. 귓가에 달라붙는 깃털 같은 웃음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땅 위로 내리는 비가 얼음과 눈을 녹이는 중이었다. 색이 없던 회승의 세상에 온갖 색들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몇 달간 그치지 않았다. 아주 긴 우기였다. 급격히 변해버린 환경에서는 기존에 눈이나 얼음 속에 저장해 놓았던 식량들이 별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것들은 추려내 재빠르게 불에 바싹 말려두었으나 양이 많지는 않아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사냥을 나가야 했다. 그마저도 혹한의 추위에 길들어 있던 동물들이 혹독한 더위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겨우 토끼 한 마리를 잡아 돌아오던 회승의 표정이 집 앞에서 이방인의 흔적을 발견하고 매섭게 변했다. 문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조용히 손잡이를 쥔 회승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멈췄다. 실내로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이랑 함께 앉아 있는 승협이 보였다. 회승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 사이로 공기가 파삭 얼어붙었다. 상황을 살핀 회승이 드물게 낮은 목소리로 승협을 불렀다. 안절부절 시선을 돌리며 입술만 달싹이던 승협이 회승의 손짓에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회승의 곁으로 가 섰다. 힐끔 눈치를 살피는 눈동자가 분주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회승의 시선에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승협의 말에 따르면 거처가 물에 잠겨 높은 곳으로 올라가던 도중 식량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들른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과 남루한 행색에서 수상쩍은 기색이나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불안해 보이는 승협을 흘긋 살핀 회승이 마지못해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풀린 분위기를 알아챈 승협이 혼나기 직전 강아지 같았던 표정을 풀었다. 꼬리가 있었다면 프로펠러처럼 돌았을 것이 틀림 없었다. 후, 회승이 가볍게 숨을 뱉었다.
회승의 집이 아무리 마을과 떨어져 있다고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인 만큼 지나가다 불빛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는데, 작은 소리에도 주변을 경계하는 회승과 달리 승협은 늘 눈을 반짝거리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사람이 회승이기에 승협에게 사람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도 회승이었고 낯선 상대에 대한 호감과 신뢰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린 아이답게 호기심도 많아서 새로운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까지는 곁에 회승이 있었고 승협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저 밖은 위험하다고 대충 얼버무리기만 했지만 계속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회승은 승협이 정말로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무사했지만 다음에는 어떨 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님을 보내고 회승이 승협을 부르자 승협이 슬금슬금 옆에 와 앉았다. 결연한 눈빛을 한 회승이 승협의 손을 붙들었다. 살갗이 맞닿자 승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또랑또랑한 두 눈이 회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회승이 짐짓 목소리에 힘을 줬다.
"저는 아니지만,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잘못하면 다쳐요. 그러니까 절대 다른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한다고 열어주면 안 돼요."
"응."
"반갑다고 막 달려가도 안 돼요. 알았어요? 무조건 제 옆에 있어요."
"응."
"누가 맛있는 거 준다고 해도 안 돼요. 신기한 거 보여준다고 해도 안 돼요."
"응."
"자, 약속해요. 손가락 걸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던 승협이 씩 웃더니 길쭉하고 가는 손가락을 회승의 단단한 손가락에 걸었다. 새끼손가락 매듭을 좌우로 가볍게 흔든 승협이 회승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 두고는 어디도 안 가. 웃는 얼굴이 티 없이 맑았다. 투명하게 속이 다 비치는 얼음 같았다. 손을 뻗어 승협의 어깨를 붙들자 바라보는 얼굴이 여전히 다정했다. 이상하게 속이 끓었다. 충동적으로 손에 힘을 실은 회승이 그대로 승협을 밀어 눕혔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 진 채로도 투명한 얼굴을 한 승협이 얌전히 눈을 깜박였다. 부유하는 감정 없이 또렷한 시선을 하고 회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신에 차 빛나는 두 눈에서 회승은 승협이 설령 자신이 어떠한 짓을 한대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낼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승협이 살아낸 시간이 짧은 데서 오는 미숙한 순수함이나 바보 같을 정도로 사람을 믿는 순진함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회승은 결국 품 안 가득 승협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승협은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세상을 경험하고, 그렇지만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회승은 마음 한 켠 자신의 갈비뼈 안쪽에 승협을 꼭꼭 숨기고 싶은 마음을 숨겼다. 회승아. 나 숨 막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새었다. 맞닿은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 했다.
눈과 얼음이 버티기 어려운 더운 날씨와 몇 개월간 쉬지 않고 내리는 비에 지상의 겨울들은 모두 바다로 흘러갔다. 내려다보는 해수면은 마치 땅이 끌려 내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높아졌다. 근래 부쩍 위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었나 싶더니 어느새 코앞까지 쫓아와 기어코 회승의 집까지도 집어 삼켜버리기 직전이었다. 회승이 사는 곳도 더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도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집을 나섰다. 집이 없으니 가다가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있으면 간이 거처를 만들어서 지냈다. 그러다 물이 들어차면 또 다시 더 높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날이 더워 얼어 죽을 걱정이 없으니 노숙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생각보다 승협은 쉽게 적응했다. 얼음이 녹은 땅 위로 자라난 풀 밭 위에 드러누워 시꺼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승협의 새로운 취미가 되었다. 그럴 때면 꼭 회승을 불러 곁에 앉혀두고는 회승의 무릎을 베게 삼아 누운 채로 회승의 손을 우산 삼아 비를 피했다. 회승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승협의 달이 떠 있는 눈동자를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승협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면서 회승은 자신이 어릴 때 보고 자랐던 밤하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에 쏟아질 것처럼 가득 박혀있던 별들과 흐르던 은하수 얘기를 하며 먹구름에 덮인 하늘을 아쉬워했다. 그러면 승협은 회승을 마주하고 웃으면서 자신은 이미 별을 보고 있어서 괜찮다고 말했다. 승협은 늘 모든 일에 무던해졌던 회승을 울컥거리는 감정의 파도 앞에 서 있게 했다. 흔들리는 마음의 섬 위에서 회승을 부둥켜안은 채 함께라면 기꺼이 저 깊은 바닷속으로 추락하겠다고 속삭였다. 그런 승협의 앞에서 회승의 파도는 기승을 부렸다. 도무지 잠재울 자신이 없을 때면 회승은 고개를 숙여 승협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 언제나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봐 주는 두 눈이 웃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절반이 물에 잠기다시피 한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아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수면에 잠겨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넘실거렸다. 저 멀찍이 수평선 근처에서는 종종 하늘과 바다를 잇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회승은 그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을 기다릴 승협에게로 돌아갔다. 비를 피해 천막 아래 엎드려 누워 자는 승협의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살랑였다. 힘없이 흔들리다 사르륵 내려앉은 머리칼이 눈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다듬은 지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벌써 머리가 다듬어야 할 정도로 자라났다. 자신의 머리도 한 번 매만져 길이를 가늠해 본 회승이 짐을 뒤적여 가위를 찾아 꺼냈다. 그 새 잠에서 깬 승협이 몸을 일으켜 앉아서 회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자르게?"
"잠 깼으면 이리 와서 앉아 봐요."
회승의 말에 승협이 얌전히 회승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새 쓸만한 얇은 천을 찾아낸 회승이 승협의 목 주위로 천을 둘러 감았다. 승협의 앞에 쪼그려 앉은 회승이 눈을 가리는 앞머리부터 차근차근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에 승협의 감은 눈에 힘이 들어갔다. 혹여나 승협을 다치게 할까 잔뜩 집중한 회승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사각사각 가위 소리가 공기를 간지럽혔다. 앞머리 정리를 끝낸 회승이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뱉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인 승협이 얼굴에 닿는 숨에 감은 눈꺼풀을 떨며 간지럽다고 킥킥 웃었다. 빠르게 뒷머리 정리까지 끝내고 가볍게 승협의 머리를 털어낸 회승이 목에 둘렀던 천을 풀어주자 승협이 물기를 터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정리했다.
"너도 자를 거야?"
"꺼낸 김에 같이 잘라버리죠, 뭐."
"내가 해주면 안 돼?"
"안 돼요. 또 다칠 거잖아요. 저번에 손가락 자르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회승의 타박에 승협이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하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가위를 들면 혹시나 자기가 회승을 다치게 할까 봐 엄청나게 긴장을 해버리는 탓에 늘 자신의 손에서 피를 봤던 승협이었다. 그래도 가볍게 찔리는 정도였는데 한 번 조금 크게 피를 보고 나서는 회승은 절대 승협에게 가위를 들려주지 않았다. 전적이 있는 터라 뭐라 반박은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리는 승협에 결국 회승이 가위를 정리해서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손 줘봐요."
승협의 곁에 앉은 회승이 손을 내밀자 그 위로 승협이 손이 냉큼 올라왔다. 자연스레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껴오는 길쭉한 손을 붙들고 눈앞으로 가져온 회승이 상처 났던 부근을 살폈다. 다행히 상처가 크지는 않았던 덕에 이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상처가 났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매끈해진 피부를 손가락으로 쓸어낸 회승이 승협의 손을 입으로 가져와 입술을 붙였다 살짝 빨아 쪽 소리를 내며 뗐다.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승협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돌려 회승을 바라봤다. 회승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벌려 승협의 길쭉한 손가락을 물었다. 혀를 내어 상처가 났던 부근을 핥았다. 툭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마디 위로도 혀를 쓸었다. 승협이 손가락 사이를 좁혀 그 사이에 회승의 혀를 가뒀다. 미끌미끌한 살덩이가 손가락 사이를 쏙 빠져나가며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장난을 쳤다. 입안으로 쏙 숨어버리는 얄미운 혀를 쫓아 길고 가는 손가락이 회승의 입술을 잡아 벌렸다. 허락도 없이 침범한 발칙한 손가락에 혀를 감으며 손장난에 어울려주던 회승이 승협의 손목을 붙잡고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쪽 빨아내며 입 밖으로 빼냈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협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물기에 젖은 손가락들이 서로를 꽉 움켜쥔 채 흙바닥에 문질러졌다. 자신에게로 기대어오는 회승을 버겁게 받아내던 승협이 결국 회승이 무게를 싣는 대로 바닥으로 상체를 기댔다.
수개월을 퍼부었어도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기는 여전히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종일 땀이 쏟아지듯 내리고 씻어도 씻어도 몸이 끈적거렸다. 두 사람은 매일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풀 밭 위에 누워 뒹굴며 서로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내리는 비를 하루종일 맞아도 춥지 않았다.
길고 길었던 우기가 끝났다. 통곡처럼 내린 비가 지나간 세상은 건조하게 바싹 말라붙은 사막으로 변했다. 지면에서 고스란히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맨살이 노출되지 않도록 두꺼운 천으로 온몸을 감싸야 했다. 그래야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도 이동할 수 있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극한의 환경에 안 그래도 드물었던 동물이나 식물들이 거의 씨가 말랐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오고 나면 이번엔 반대로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찾아왔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나서야 회승은 승협이 추위를 많이 타는 것을 알았다. 회승에게는 이런 기후가 차라리 익숙했으나 처음 추운 공기로 내던져진 승협은 체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것은 모조리 주워다 몸에 꽁꽁 두른 채 모닥불 앞을 떠나지 않았다. 회승은 승협을 위해 추운 공기를 막을 수 있도록 간이 천막을 정비했다. 승협은 회승이 자신의 옆을 떠나면 죽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보다 체온이 높은 회승을 온 몸 가득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체온이 적나라하게 맞닿은 곳에는 땀이 났다.
차가운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올라 기온이 높아지면 회승은 짐을 정리했다. 바싹 마른 땅 위를 걸어 나가며 물과 식량을 구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해가 떠 있을 때면 더위에 잔뜩 지쳐가는 회승과 달리 승협은 꽤 오랜 시간 엄청난 열기를 뱉어내고 있는 땅 위를 걸어도 멀쩡해 보였다. 사뿐한 걸음걸이로 두어걸음 앞서 나가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더위를 견디고 있는 회승을 돌아보고는 웃긴 얼굴을 하고 있다며 놀렸다. 회승은 얄밉다는 식으로 굴기는 했으나 승협의 웃는 얼굴 덕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걸을 수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 정도 부지런히 이동하면 물을 찾을 수 있었다. 대개는 우물 정도의 크기였고 작은 연못 정도의 크기도 드물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보통 식량도 같이 구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모자란 식량인데 갈수록 구하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식량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굶고 지나가는 날도 점점 늘어났다. 몸에 기운도 없고 얼굴이 반쪽이 된 회승과 달리 승협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천막 아래 태평히 누운 채로 회승을 바라보던 승협이 물었다.
"배고파?"
"당연한 소리를 해요."
"그럼 나 먹을래?"
흘깃, 승협에게로 잠깐 닿았던 회승의 시선이 곧 떨어졌다. 승협의 말을 다른 의도로 잘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저렇게 싸늘하게 자신을 보는 회승은 처음이어서 조금 당황했던 승협은 뒤따라오는 회승의 말에 서둘러 변명의 말을 따라붙였다.
"지금 그런 기분이 들어요?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는데."
"아니 진짜로. 나 허벅지에 살 좀 있으니까 먹을 만 할 걸."
"안 웃겨요."
"농담 아닌데."
"제가 암만 먹을 거 안 가려도 사람 고기는 싫거든요."
"언제는 나 사람 아니라며."
황당한 눈으로 승협을 바라보던 회승이 기어코 인상을 구겼다. 사람인 승협을 처음 만나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더위를 타지 않는 승협이 신기해 흘리듯 했던 혼잣말을 용케 알아들은 승협은 가끔 그 말을 끄집어냈다. 하여간 그렇게 안 생겨서는 은근 쪼잔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안 생겨서 사람 놀려먹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입 밖으로 꺼냈다가 괜한 싸움을 만들 정도의 기운은 없어서 회승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방금 전 회승의 냉랭한 눈빛에 적잖이 속이 쓰렸던 승협이 들었으면 억울했을 말이었다.
"그걸 아직도 우려먹는다고요?"
"우려먹는 게 뭐야? 맛있는 거야?"
"형 속 좁다고요."
"아냐 나 넓어. 니 것도 넣잖아."
"아니 진짜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회승이 결국 언성을 높이며 누워 있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경악으로 커진 회승의 눈을 마주한 승협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봐도 다 알고 하는 말 같은데, 의심을 가득 담은 회승의 눈빛을 피하며 승협은 모른 척 열심히 시선을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승협은 평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다가도 가끔 회승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말을 잘도 했다. 어쩌면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결국 승협을 바라보던 시선을 떼어낸 회승이 승협을 탓하는 대신 자신이 지금껏 승협을 대할 때 어떤 어휘를 사용해왔는지 스스로의 화법에 대해서 고찰하기 시작했다. 수그러든 회승을 눈치챈 승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축 처진 눈썹을 하고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냥 너 배고프대서, 그랬지."
"...그럼 그냥 입 다물고 키스나 해줘요. 이리와."
냉큼 몸을 일으켜 회승에게로 바싹 다가온 승협이 쪽쪽 장난치듯 입술을 붙였다 뗐다. 놀리듯 떨어지는 입술이 얄미워 손을 뻗어 고개를 붙든 회승이 아랫입술부터 물어 당기다 열린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킥킥 웃음기가 샜다.
"아무리 배고파도 혀는 깨물면 안 돼, 회승아."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괘씸한 기분에 요리조리 도망치는 혀를 붙들어 이로 긁듯이 가볍게 물자 승협이 입안에서 웃었다. 간지럽게 올라오는 자극에 쪼그려 앉아 있던 승협의 몸이 파들 떨었다. 휘청이다 회승에게로 기울었다. 마른 팔이 회승의 목을 둘러 안았다. 닿은 부분부터 피어오르는 열기가 차가운 공기를 데웠다. 어느새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샜다. 회승이 승협을 끌어안고서 바닥으로 누웠다. 위에서 회승을 내려다보는 승협의 얼굴이 말갛게 웃고 있었다.
두 발 딛고 서 있는 땅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자주 화를 내고 온몸을 뒤흔들어 요란하게 요동쳤다. 화산이 폭발하고 대지가 갈라졌다. 두 사람이 있는 높은 지대에서는 가끔 저 멀리에서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에도 저렇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를까. 승협이 묻는 말에 회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처 산이 갑작스럽게 폭발하지는 않았으나 가끔 땅이 크게 갈라진 흔적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회승은 시커먼 어둠이 도사리던 아득한 틈새를 떠올렸다. 만약 땅이 갈라지게 되면 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요. 내가 건너갈게요. 회승의 말에 승협은 고개만 끄덕였다. 회승은 가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승협이 덜컥 무서워 질 때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불쑥 나타난 승협이니 어느 순간 다시 자취를 감춘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회승은 승협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승협을 꽉 끌어안았다. 형은 사라지면 안 돼요. 회승은 자주 불안했고 그래서 승협을 소유하려고 들었다. 자신의 기도에 신이 답해준 증거라고 애써 생각하며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명분을 만들어 합리화라도 하지 않으면 승협이 떠나려고 했을 때 회승은 그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다행히 승협은 회승이 자신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발목을 붙들고 가지 말라고 떼쓰며 우길 상황으로 회승을 몰아넣지 않았다. 회승의 때론 절박하기까지 한 말에 승협은 늘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어디도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회승의 손을 잡는 승협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손에 회승은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내어놓았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태양 아래를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했더니 하늘에 떠오른 태양의 크기가 조금 작아졌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겼지만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세상을 태워버릴 것처럼 타오르던 해가 힘을 잃고 있었다. 해가 타오르기 시작한 이후로 일 년이 조금 넘은 시점의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짧게 비가 내렸고, 비가 내리고 나면 세상은 한 김 더 식었다. 두 사람은 며칠 전 찾아낸 꽤 큰 크기의 오아시스 근처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사막에서는 어느 정도 큰 물웅덩이여도 금세 말라버렸으니 물이 마르면 다시 떠날 계획이었으나 시시각각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기후에 회승은 당분간 지금 자리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근처에서 예전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을 발견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해가 떠 있는 낮에도 밤과 다를 바 없는 낮은 기온이 유지된다면 승협을 데리고 찬 공기 속을 이동하는 것도 무리였다. 승협은 더위가 한 꺼풀 꺾이거나 말거나 해가 작아지면서 눈이 멀 걱정 없이 밝은 하늘을 편히 올려다볼 수 있게 된 것이 기쁜 듯했다. 다행히 날씨가 완전히 추워지기 전에 회승이 간신히 추위를 피할 정도의 낡은 건물을 찾아냈다. 이 상황에서는 그 정도만 되어도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었다. 회승이 바쁘게 겨울을 날 준비를 했다. 승협도 거들었지만 실질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승협의 존재가 회승에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맞으니 회승은 승협의 뿌듯해 보이는 얼굴 앞에서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승협은 회승이 집 안에 급조한 화덕 앞에서 집과 비슷하게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목 끝까지 담요를 올려 덮은 채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는 회승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회승이 손잡이를 짚고 서서 승협에게로 상체를 기울일 때면 흔들의자는 버거운 소리를 내며 끼익거렸다.
가뜩이나 아침잠이 많은 승협은 날이 추워지면서부터는 아예 이부자리 밖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이상하게도 승협이 회승보다 일찍 일어난 날이었다. 허전한 옆자리에 잠이 깬 회승은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바깥만 내다 보고 있는 승협을 볼 수 있었다. 승협을 따라 창밖을 내다 본 회승이 입을 벌렸다. 눈이 내렸다. 아주 오랜만에 하늘에서 하얗게 뭉친 포슬포슬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회승이 승협의 옆에 다가서자 회승이 오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눈에 집중하고 있던 승협이 그제야 회승을 돌아봤다. 추위도 많이 타는 사람이 발갛게 달아오른 코 끝을 하고서도 반짝거리는 눈으로 회승을 보고 있었다.
"회승아, 저게 네가 말했던 눈이야?"
"네. 완전 오랜만이네요."
"나 나가고 싶어. 나가도 돼? 나가자, 우리."
처음 보는 눈에 잔뜩 신이 난 승협이 발을 동동 구르고 회승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웃어버린 회승이 승협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봐요. 밖에 추워. 안 그래도 추위에 약한 승협이 혹여나 감기에라도 걸릴까 봐 회승은 눈사람 마냥 승협을 꽁꽁 싸맸다. 승협은 얌전히 서서 회승이 하라는 대로 옷을 챙겨입었다. 회승이 장갑으로 감싸진 승협의 손을 잡자 한껏 올라간 승협의 광대가 기대감에 움찔거렸다. 승협이 보채듯 문으로 회승을 잡아끌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사람은 회승이었다. 그새 발목까지 올 정도로 쌓인 눈 앞에서 승협은 조심스럽게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를 따라 회승도 오랜만에 눈을 밟았다. 꽁꽁 무장한 발목에 금세 한기가 스쳤다. 뽀드득거리며 눈이 밟히는 소리가 그리운 감정을 동반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승협이 얼굴 위로 눈을 맞고는 고개를 털었다. 그러고는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눈을 받았다. 녹지 않고 솜털 위에 얹어져 있는 눈을 바라보다가 승협이 장갑을 벗었다. 따뜻한 손바닥에 닿은 눈이 금세 녹아 아주 작은 웅덩이가 되어 손바닥 위에 고였다.
"차갑다. 회승아."
"응, 춥진 않아요?"
"왜 내 손 위에는 저기 나무 위처럼 안 쌓여?"
"눈에게 사람 손바닥은 너무 뜨거워서 못 있어요."
"도망가는 거야, 그럼?"
"형 머리 위에는 있다."
푸드득 머리를 흔드는 승협을 보고 회승이 웃었다. 승협의 까만 머리카락 위로도, 털옷 위로도 눈이 쌓였다. 진짜 눈사람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승협은 빨개진 코 끝을 하고 연신 훌쩍이면서도 들어가자는 회승에 말에 꿋꿋이 고개를 저었다. 눈에 덮여가는 세상은 온통 하얗고 고요했다. 승협은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화상을 입을 것 같이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눈을 보고 있는 승협의 곁으로 회승이 다가왔다. 장갑을 벗어던진 승협의 손이 차갑게 식어 붉어진 걸 발견하고 얼어붙은 손끝을 가져와 자신의 손안에 넣고 데웠다. 겨울이 뺏어가던 온기를 회승이 채웠다. 손 끝부터 발 끝까지 온기가 퍼졌다. 그제야 승협은 잊고 있던 추위를 느꼈다. 조금씩 전달되는 체온에 안달이 났다. 승협이 회승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어 왔다. 왜 그래요, 힘들어요?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따뜻했다. 승협이 옷 위로 간질거리는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추워서 그래. 안아주라. 승협의 말에 회승은 별다른 말 없이 품 안 가득 승협을 끌어안았다. 녹을 것처럼 뜨거운 품 안에서 추위는 더 이상 승협을 괴롭히지 못했다.
변한 지구에서는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을 정도로 추웠던 예전과 달리 반년 정도의 주기를 두고 땅이 달라질 정도의 더위와 얼음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가 반복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물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아주 소규모의 모임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겨울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 여름에 적응하기까지도. 사람들은 다가올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있었고 그에 대비할 수 있었다. 회승은 이제 얼음을 보관하는 법을 알았다. 회승이 만들어 낸 얼음 조각들은 여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녹지 않는 얼음은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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