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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너무 사랑하던 나는 외투하나 없이 돌아다니다 봄 감기에 걸려버렸다.

 

 

 

  *극 중 파란색글자는 일본어입니다.

  “유학이라니?”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일본에서 3년만 학교 다니는 거야.”

 

  똑같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재현과 훈은 둘의 어머니들에게서 중학교 졸업을 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가라는 말을 들었다. 잠시 동안의 짧은 정적 후 재현이 말했다.

 

  “꼭 가야 해? 여기 친구들도 있고.. 벌써 갈 고등학교도 정해놨는데..”

 

  재현이 계속 칭얼대며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조용히 있던 훈이 말을 꺼냈다.

 

  “나는 좋은데, 일본어도 조금 할 수 있고 뭐..”

  “그럼 가자. 나도 일본 유학 가고 싶었어.”

  “뭐?”

  “훈이가 가고 싶다는데, 둘이서만 가는 거지?”

  “.....”

  “엄마!!!! 유학 언제가요? 내일 당장 가면 안 돼요?”

  “어휴..훈아 네가 얘 좀 잘 관리해줘.”

 

  훈은 계속해서 안 가고 싶다 하던 재현이 갑자기 왜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저 새로운 환경에 대해 조금 설레어하다 이제 낯선 곳에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저 신나서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은 애를 어쩌지..

 

...

 

  졸업식을 하자마자 바로 일본으로 갔고 2달 정도 적응을 하다 보니 바로 개학 날이 되었다. 개학 날은 아주 바쁘게 또, 빠르게 지나갔고 다음 날이 되어 다시 학교에 갔다.

 

  학교는 새 학년, 새 학기라 모두 들떠있었고 이곳저곳에서 말을 걸며 벌써 친구가 된 아이들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재현과 훈은 같은 반이 되었고 재현은 일본어가 서툴러 처음에는 약간의 겁을 먹고 긴장하였지만 이내 특유의 밝은 분위기와 외향적인 성격으로 반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훈은 대화는 할 수는 있었지만 시끄럽거나 몰려다니는 것이 싫어 아이들이 서로 인사하고 친해지고 있을 때 조용히 교실을 나와 학교 안을 둘러봤다.

 

  천천히 걸으며 1학년 교실을 지나고 카페테리아도 지났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다 보니 복도 끝, 작은 도서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도서부원을 모집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웃음, 행복이 가득한 도서부로 오세요!

 

  첫 문구는 별로 훈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밑에 작은 문구가 훈의 마음을 끌었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

 

  입부문의는 전화로 하라는 안내 문구에 훈은 핸드폰으로 포스터에 있는 전화번호를 찍었다. 전화번호의 주인은 3학년 4반의 이승협 이라고 적혀있었다. 훈은 핸드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더 둘러볼 곳이 없다고 생각하여 다시 천천히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된 개학 첫날이었지만 아직 수업 시간이 아니었기에 창밖을 보며 교실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도서부 입부신청 하려고 몸을 일으켜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가서 조용한 곳에서 찍어두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길어지고 훈은 받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끊으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여보세요”

  “아..3학년 4반 '이승협'의 전화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그...저.. 도서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아..혹시 한국 분.. 이신가요?"

 

  처음 해보는 일본어 통화에 잔뜩 긴장해서 대답을 해내고 있었는데 친절한 말투와 한국어에 긴장이 풀렸다.

 

  “아.. 네.”

  “맞구나. 저도 한국인이에요. 한국 분 되게 오랜만이네요”

  “.........”

  “맞다. 도서부 입부하시고 싶다고 하셨죠. 혹시 점심시간 때 시간 괜찮으세요?”

  “..네.”

  “그럼 점심 드시고 도서실 한 번만 들려주세요. 입부신청서 드릴게요.”

  “..네.”

  “그럼 이만 먼저 실례할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뚝-.

 

  전화가 끊어졌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필요 이상까지 다정하고 따뜻한 말투에 훈은 조금 설레었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 교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몇의 학생들이 교실 가운데에 있는 천장의 스피커 쪽으로 몰려있었다. 훈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창가 쪽의 뒤에서 두 번째 줄인 자신의 자리로 가서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그러다 그때 방송이 켜지는 소리와 마이크 테스트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금까지 듣고 있던 낮고 부드럽고 다정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좋은 아침입니다. 학생 여러분.』

 

  아주 짧고 그냥 형식적인 아침 인사였지만 스피커 쪽에 몰려있던 아이들은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고 있었고 훈은 자신도 '전혀' 예상하진 못하였지만, 저 한마디가 들리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교실의 모든 시선이 훈에게 향했고 훈은 잠시 멈추어 서 있다가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곧 터질 것같이 달아올랐지만 두 팔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었기에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지만, 방송은 끊이지 않고 계속 나왔다.

 

『날씨도 점점 따뜻해지고, 아름다운 벚꽃도 피는 4월입니다』

 

  전형적인 학교 아침방송에서 할 만한 말들이 방송되었고 방송이 끝나자 딱 맞게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훈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수업 준비를 했다. 수업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창밖에서 내리 쬐이는 따사로운 햇볕에 훈은 금방이라도 잠에 들 듯 꿈벅, 꿈벅,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았는데 아침부터 체육 시간인지 운동장에 많은 학생이 보였다. 그중에

 

  굉장히 훈의 취향인 사람이 있었다. 수업에는 이미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라 아예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려 그 사람을 눈으로 좇았다. 훈의 교실은 높지 않은 층에 있어서 운동장에 있는 사람이 잘 보였고 이상형의 사람은 학교 체육복 상의에 꽤 짧은 체육복 반바지를 입고 축구를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살짝 빛나며 흩날리고 있었고, 그 남자의 얼굴도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또, 이따금 멈춰서 숨을 고르고는 다시 달렸다. 그렇게 넋 놓고 창밖만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수업이 다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훈은 딱히 허기짐을 느끼지 않았기에 점심을 먹으러 가진 않고 도서부 입부를 위해 도서실로 갔다.

 

  훈은 도서부에 무사히 입부는 했지만 그날 점심시간에 도서실로 갔을 때 승협을 만나진 못했다. 들어가 보니 처음 보는 선배가 있었고 그 선배가 훈을 보고는 입부신청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적힌 오선지를 함께 건네주었다. 그 오선지에는 친절하게 한국말로 입부신청서의 항목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글들이 있었다. 훈은 개학하기 전에 혼자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했었기에 입부신청서의 내용을 대부분 다 알 수 있었지만, 그 오선지를 소중하게 놓고 봐가며 입부신청서를 작성했다.

 

  도서부에 들어가고 훈은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실에 갔다. 독서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는지 도서실은 훈 외에는 방문자가 거의 없었고 남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책장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공간을 발견하여 그 구석에 가서 자주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가보니 작은 소파가 하나 생겨있어서 주로 그곳에 누워 뒹굴 거리며 지냈다.

 

...

 

  개학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고 등굣길의 벚꽃들은 거의 다 떨어졌다. 예전부터 가족여행을 자주 가던 재현은 일본으로 보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페인으로 불려갔고 훈은 항상 재현과 같이 등교했는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더니 어째 매일 옆에서 시끄럽게 조잘대던 애가 없어지니 등굣길도, 교실도 너무 조용하다 느꼈다. 그래서 그냥 대충 자리에 가방을 던져놓고는 도서실로 갔다. 항상 있던 그 소파 자리로 가서 털썩하고 몸을 뒤로 던져 누웠는데 이상한 느낌이 났다.

 

  “..안녕.?”

 

  훈이 당황해서 몸을 일으켜보니 자신의 밑에 어떤 남자가 책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누워있었다. 그 남자는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을 내리며 말을 건넸다. 얼굴을 확인해보니 그 선배였다. 목소리 좋은 그 선배, 매일 아침, 교내방송으로 들었던 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 훈은 그대로 아주 잠시 굳어 있다가 얼굴과 귀 끝, 목까지 시뻘게지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는데,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제대로 본 게 처음이고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도 굉장히 훈의 취향이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당황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올해 입학한 애 맞지?”

  “네. 올해 입학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말하니까 좋다.”

  “..저도요.”

  “아 맞다. 말 놓아도 될까..요?”

  “네 편하게 하세요. ..선배.”

  “고마워. 책 읽는 거 좋아해?”

  “아 네.”

  “오 나도 책 읽는 거 엄청 좋아해. 여긴 책 읽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승협은 들고 있던 책을 책갈피를 끼워 덮었고 어색하게 서 있는 훈을 살짝 내리 끌어 옆에 앉혔다.

 

  “되게 외로웠거든.”

  “....”

  “근데 얼마 전부터 어떤 애가 매일 있기에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아 매일 오면 안 되나요..?”

  “아냐 자주 와주면 좋지. 이 소파 내가 놓았어, 맨날 바닥에 앉아 있길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편하게 있어. 아 혹시.. 일본어. 어려우면 내가 도와줄까..?”

 

  훈은 개학 전의 속성독학으로 대부분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승협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못하는 척하자고 결심했다.

 

  “나도 막 엄청난 걸 알려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간단히 과외처럼,”

  “좋아요! 아니, 일본어.. 어려워요.”

  “그래? 음.. 그럼 학교 끝나고 한 시간 정도 봐줄 수 있겠다. 그때 시간 괜찮아?”

  “..네.”

  “나는 이제 방송하러 가야겠다. 안녕.”

  “안녕히..가세요.”

 

  승협은 덮어두었던 책을 챙기고 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도서실을 나갔다. 훈은 그대로 쿵 하고 소파에 누웠다. 아니 쓰러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러고 5분쯤 지나자 승협의 목소리가 방송되었다.

 

『벚꽃이 지고 나서 어느샌가 여름이 한 걸음 다가온 것 같습니다.』

『다음 달에 전 학년 중간평가가 있을 예정이니...』

 

  방송이 끝나고 훈은 몸을 일으켜 도서실을 나와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이 다 끝나고 훈은 떨리는 마음으로 승협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승협의 수업이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르게 끊으려고 했지만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여보세요? 훈아.”

  “ㄴ네. 선배..”

  “아직 학교지? 3학년 층으로 와줄래?”

  “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 입부신청서에서. 미안, 말없이 알아내서.”

  “아녜요. 지금 갈게요..!”

 

  전화가 끊어지고 훈은 가방을 챙겨 3학년 교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한참 전에 수업이 다 끝났는지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어느 반인지 알았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한 교실의 문이 열리더니 승협이 들어오라 손짓하였다.

 

  “금방 왔네. 미안, 다짜고짜 오라고 해서.”

  ‘뭐가 이리 미안한 게 많아..’

 

  승협은 자연스럽게 훈이 메고 있던 가방을 훈의 어깨에서 빼내 교실 가운데 자리의 의자에 걸고 훈을 그 자리로 데려갔다. 훈을 자리에 앉히고는 본인의 가방에서 필기구와 공책, <100일 만에 일본어 마스터하기!> 라고 써진 책을 꺼내었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한번 지어 보이더니 공책과 일본어책을 펼치고는 웃음기가 싹 사라지며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훈은 그냥 승협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라고만 생각했는데 승협이 이렇게나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훈도 열심히 공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 구경은 무슨..

 

  승협의 스파르타 수업이 끝나고 훈은 그냥 시간 없다고 하고 그만둘까 생각했다. 기운도 탈탈 털리고 멘탈도 탈탈 털려서 단둘의 시간이든 뭐든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승협이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말을 걸어왔다.

 

  “수고했어. 공부하느라 머리 썼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네. 좋아요.”

 

  멍청이, 바보... 저 예쁜 웃음에 넘어가 버리다니.. 근데 저 얼굴로 웃고, 저 목소리로 물으면.. 어떻게 하냐고.. 승협과 디저트가게에 갔지만 케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승협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훈의 귀 끝이 붉어져서 숨기는데 바빴기 때문이다. 그 뒤로 감히 그만두지 못하고 매일 승협의 수업에 갔다. 그리고 승협이 시간이 되는 날이면 수업이 끝나고 디저트 가게에 갔다. 승협은 그리 디저트들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항상 이런 것은 선배가 사는 것이라며 훈이 내겠다고 하여도 꼭 자신이 샀다. 그렇게 언제는 승협의 교실, 훈의 교실, 그리고 가끔은 도서실에서도 수업을 했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고 이주가 지난 금요일에 재현이 돌아왔다.

 

  재현은 이번에도 산더미 같은 선물들을 가져와서 그중에 훈이 마음에 든다 하였던 고양이 담요만 빼놓고 나머지는 반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재현은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학교로 와서 훈과 먼저 얘기할 기회가 없었기에 훈에게 이것저것 얘기해주려 쉬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훈은 바로 사라졌고 재현은 잠시 화장실을 간 것이겠지 생각하고 반 아이들과 놀았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 다 끝나도록 훈은 오지 않았고 수업 종이 치고 나서야 조용히 들어왔다. 그래서 그냥 재현은 끝나고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 생각했지만 끝나고도 훈은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늦게 들어온다 하였다.

 

  “왜 늦게 들어오는 데에.. 나 오늘 왔잖아..”

  “아 과외 있다니까.”

  “뭐야.. 차훈 공부도 잘하면서 웬 과외야..”

  “....얌전히 집에 가 있으면..”

  “나도 데려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진짜? 진짜지? 말 바꾸기 없기. 나 진짜 한마디도 안 하고 집에 딱 있을게!”

 

  훈은 심히 신나하는 재현을 보고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내뱉은 후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한번 쉬고 재현을 보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승협과의 약속시간이 십 분 정도 지나있었고 훈은 빠르게 승협의 교실로 달려갔다. 너무 오랜만에 뛰다 보니 숨이 차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앉아 헉헉대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더니 어떤 학생이 울먹이며 나왔고 교실의 안에는 승협이 서있었다. 승협은 훈을 보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뛰어왔어? 나도 일이 좀 있었어서.. 더 늦었어도 괜찮은데.”

 

  훈은 손을 잡고 일어서지는 못하고 혼자 벽을 짚고 일어섰다. 승협은 그런 훈을 보며 다정한 눈빛으로 보며 웃었다. 둘은 항상 둘이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수업할 준비를 했다. 승협의 스파르타 수업이 효과적이었기에 엄청 두꺼웠던 일본어책이 거의 다 끝났고 이렇게 둘이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 알았다. 승협은 책을 펴서 이리저리 펼쳐보다 덮으며 말했다.

 

  “훈아 이제 이런 기초는 다 끝냈고..”

  “네.”

  “곧 중간평가인데 같이 공부할래?”

  “아.. 좋아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도서실에서 만날까?”

  “네.”

 

  승협은 훈을 향해 웃으며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이거, 주말 동안 봐둬. 중간평가지만 졸업할 때 꽤 많이 들어가거든. 여기 나오는 것만 잘 알아두면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선, 아니..승협이형..”

 

  승협은 훈에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훈은 익숙하지가 않아 어색해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승협은 훈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잘 들어가고, 월요일에 보자.”

  “....안녕히 가세요.”

 

  승협이 웃으며 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훈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일본어로 말했다. 승협은 그런 훈이 귀여운지 놀리듯 몇 번 더 훈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다음 또다시 정리해주었고 진짜 작별 인사를 하고 훈이 들어가는 것까지 본 뒤에 돌아갔다. 집에 들어가니 정말 재현이 얌전히 있었고 소원 하나를 얻어내었다.

 

  주말 동안의 재현은 굉장히 바빠 보였다. 훈이 말을 걸면 약속이 있다고 하고 주말동안 계속 반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다며 아침 일찍 나가 저녁이 다 되서야 들어왔다. 훈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원래 다른 애들이랑 잘 노니까 하고 넘겼다. 그렇게 주말 내내 한마디도 안 하다가 월요일이 돼서 등굣길에 재현이 처음 한 말은

 

  “나도 과외 같이 하자.”

 

  “뭐?”

  “나도 같이하자, 그럼 집에 같이 갈 수 있잖아.”

  “..안 돼.”

  “소원...”

  “..알았어, 물어볼게.”

 

  일단 물어본다고 하니 재현은 평소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평소처럼 조잘대었다. 주말 동안 말 안 하고 참은 것들을 지금 한꺼번에 다 얘기하려는지 계속되는 얘기들에 지쳐서 훈은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가방을 던져놓고 재현을 피해 도서실로 갔다. 도서실에 가자 승협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훈이 조심스레 옆에 앉아 눈앞에 손을 휘적여 보았지만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잠들어있는 듯 했다.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는 승협은 훈이 보기에 고왔다. 그래서 훈은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 주말에도 봤지만 승협이 줬던 파일을 꺼내서 다시 한 번 읽었다. 시험에 자주 나오는 문제 유형이나 여러 공식들이 있었고 중요한 부분에는 밑줄까지 쳐져 있었다. 그렇게 있다가 어느새 시간을 보니 승협이 아침 방송하러 가야 할 시간이 되어 승협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저기.. 선배.”

  “......”

  “방송하러 가셔야 돼요.”

  “...형이라고 부르면 일어날게.”

  “네? ..일어났잖아요.

  “아냐 아직 안 일어났어. 훈이가 승협이형아, 일어나세요. 라고 해주면 일어날게.”

  “왜 더 추가되었죠. 안 가시면 방송부 또 와서 혼내요.”

  “그러니까 ‘승협이형아’ 해주면 일어날게.

  “..승협이형..아..”

  “아아 제대로, 일어나세요~ 까지.”

  “하아.. 승협이형아..일어나세요..”

 

  그제야 승협은 몸을 일으키더니 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훈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해하자 승협은 시선을 거두고 따뜻한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가디건과 가방을 챙기고 훈에게 한번 웃어준 뒤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도서실을 나갔다. 뮤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손으로 가리며 얼굴을 붉힌 뒤 소파에 누웠다. 그렇게 눈을 감고 곧 나올 승협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십, 구, 팔, 칠 .... 일.”

 

『좋은 아침입니다. 학생여러분.』

 

  눈을 감고 선선한 봄바람을 느끼며 듣고 있으니 마치 승협이 바로 옆에서 말해주는 듯했다. 훈은 아직도 승협이 그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신과 얘기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워 방송을 듣던 훈은 깜박 잠에 들었고 알림 소리에 헐레벌떡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수업 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휴대폰을 보니 재현에게서 부재중 전화 7개와 문자 15개가 와있었고 훈은 망했다고 중얼거리고 빠르게 본인 물건들을 챙겨 교실로 달렸다.

 

  교실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할 수 있는 한 조용히 문을 열었지만 교실 안의 주목은 지각생에게로 쏠렸다. 훈은 선생님의 경고를 받고 빠르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재현에게서 작은 쪽지 하나가 왔다.

 

-후나 어디 있다 왔어 ~ㅇ~?-

-몰라도 돼.-

-힝.. 아 맞다 그 형한테 물어봤어????-

-? 무슨 형-

-과외 말이야!-

 

  형 인 건 어떻게 알았대..

-...아니.-

-그럼 끝나고 같이 물어 보러 가자!^3^-

-시ㄹㅎ..-

 

  싫다고 쓰려는 순간 언제 오셨는지 선생님이 옆에서 보고 계셨고 쪽지를 뺏기고 말았다. 하지만 재현은 답을 꼭 들어야겠는지 선생님이 다시 지나가자 책상에서 몸을 살짝 빼서 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난 같이 가는 걸로 안다.*

*....마음 대로해.*

 

  훈은 반 정도는 그냥 포기한 마음으로 재현에게 알았다고 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인사를 하자마자 재현은 훈의 자리로 뛰어와서 훈이 물건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재현이 계속 앞에서 빨리하라고 재촉하자 훈은 재현에게 눈빛을 한번 쏘아주고 다시 천천히 물건을 정리했다. 가방을 다 챙기고 훈은 귀찮다는 표정을 하며 달라붙는 재현을 어찌어찌 떼어내며 같이 도서실로 갔다. 도서실에 들어가자 이미 승협이 와있었고 책을 읽으며 연필을 빙글 돌리고 있었다.

 

  “어! 훈아...?”

  “아, 선배.. 그..”

 

  훈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재현이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안녕하세요! 저는 1학년 4반의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아.. 무슨 일이야 훈아?”

  “그게.. 먼저 얘기도 없이 죄송해요.”

  “승협 형,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훈이 친구인데..불러.”

 

  승협의 표정이 아주 짧게 굳어졌던 거 같지만 훈은 눈치채지 못했고, 재현은 그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은근히 훈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승협은 그런 손짓을 보고 묘한 미소를 한번 짓더니 능숙하게 훈의 손을 잡아 자신이 있는 곳으로 살며시 잡아끌어 제 쪽에 있는 도서실 의자에 앉혔다.

 

  “그래서 후배는 무슨 일?”

  “형, 저희 다 한국인인데 한국말로 해요.”

 

  둘 다 웃고 있었지만 묘한 기류가 흘렀고 훈은 그 이상한 분위기가 싫었지만 귀찮아서 가만히 있을까도 했지만 나서기로 하고 승협의 팔을 잡아 시선을 제 쪽으로 돌렸다.

 

  “선배. 혹시 과외 한 명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음...”

  “형, 제가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일본어가 좀 어려워서..”

  “나는 훈이 한 명 정도가 괜찮아. 다른 사람 알아보는 게 어때?”

 

  훈에게 팔을 잡힌 채로 승협이 웃으며 답하자 재현의 표정에는 여러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짜증과 분노, ....그리고 질투. 재현이 금방이라도 화낼 것 같이 있으니 훈은 다시 한 번 승협에게 물었다.

 

  “..이번 시험 때까지만, 해주시면 안 되나요..승협이..형..?”

 

  승협은 잠시 고민하는듯하더니 훈을 한번 보고 재현을 보며 말했다.

 

  “훈이가 부탁해서 특별히 들어주는 거야.”

  “고마워요. 선배.”

  “대신 딱 이번 시험 때까지야. 알았지?”

  “.....네.”

 

  재현은 감정을 추스렸는지 조용해졌고 훈은 승협이 준 파일에서 이해가 가지 않거나 어려웠던 부분들을 질문했다. 승협은 하나하나 친절히 답해주었고 재현에게도 복사본 프린트를 주었다. 재현에게도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물어보기에는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혼자 끙끙대며 프린트를 쳐다봤다. 훈은 의문이 들었던 것들을 다 정리하고 승협이 준 젤리를 하나씩 까먹다가 불쌍한 강아지마냥 끙끙대는 재현을 보자 한숨을 쉬고 옆자리로 갔다.

 

  “모르겠으면 말을 해.”

 

  괜히 툴툴대며 재현의 프린트를 뺏어들더니 재현이 별표 쳐놓은 부분들을 설명해주었다. 재현은 헤실 웃으면서 훈의 설명을 들었고 재현이 모르겠다고 하는 문장들을 하나씩 알려주다 훈도 잘 모르겠는 문장이 나와 승협을 불렀다.

 

  “형, 이 문장은 어떻게 읽어요?

  “아 그것은 정말 달콤한 봄날의 꿈이었다."

  “달콤한, 뭐요?”

  “여기 예문으로 나온 문장이야. 그리고 어려우면 훈이 방해하지 말고 나한테 물어봐.”

  “.....네.”

  “참 훈아, 끝나고 달달한 거 먹으러 갈래?

  “? 좋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일본어로 얘기해요?”

  “그냥. 훈이 일본어 공부해야 되니까”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더 공부를 하고 해가 뉘엿뉘엿 노을이 질 때쯤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협은 훈의 가방을 들어주었고 둘이 늘 가던 디저트 가게로 향했고 재현은 단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둘만 두고 싶지 않아 따라갔다. 승협과 훈은 익숙하게 메뉴를 시켰고 재현은 얼마 없는 메뉴들 중 제일 안 달만 한 걸 시켰다.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승협은 아메리카노를 먹었고 훈은 민트초코 파르페를 먹었다. 그리고 재현은 대충 안 달만 한 것을 시켰으나 주문 미스로 ‘네 마음 속 초코 퐁당 파르페‘를 시켰다. 재현이 메뉴가 나오자마자 좌절하였고 찔끔찔끔 먹고 있었는데 다행이도 재현이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아는 훈이 뺏어갔다.

 

  디저트를 다 먹고 승협은 훈을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재현이 본인이 같이 사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며 반대해서 결국 승협은 먼저 돌아가고 재현과 훈이 나란히 걸어갔다. 재현이 훈의 걸음걸이에 맞춰 걸었고 해는 이제 다져서 골목길은 꽤 어두웠다. 중간중간 있는 가로등의 불이 서서히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재현과 훈의 앞에서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늦은 봄이었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아 밤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훈은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있었고 재현은 얇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훈이 살짝 추워하자 재현은 바로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훈에게 둘러줬다.

 

  “아직 날씨 추운데 교복만 입고 다니면 어떡해!”

  “어차피 네가 외투 빌려주잖아.”

  “그럼 내가 둘러주는 옷만 입어야 돼.”

  “응? 뭔 소리야.”

  “아냐 어둡다 빨리 들어가자.”

  “어.”

 

  재현은 말끝을 흐리며 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뛰어갔다. 조금 달렸는지 훈이 지쳐서 헉헉댔다. 그러자 재현은 바로 멈춰 훈을 살펴보았다.

 

  “미안. 괜히 뛰었네..”

  “괜, 찮아..”

 

  멈춰선 곳은 바로 집 앞이었고 그때 바로 둘의 머리 위의 가로등 불이 켜졌다. 그러자 재현이 갑자기 훈을 걱정해주던 손을 거뒀고 훈은 몸을 일으켜 망가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훈이 다 정리하자 재현이 훈에게 말했다.

 

  “훈아. 혹시.. 그 형 좋아해..?”

  “뭐? 아니거든!”

  “진짜? 정말?”

  “...응. 근데 왜.”

  “아냐 그냥! 들어가자.”

 

  그렇게 이 주 정도 흘러 시험 날이 되었고 훈은 승협과 열심히 공부한 만큼 결과가 좋게 나왔고 재현은 지금껏 받아본 시험성적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주 아주 살짝 승협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훈은 결과가 나오자마자 너무 기뻐서 3학년 교실로 뛰어가 다른 선배들의 시선도 잊은 채 승협에게 자랑했다.

 

  “선배! 선배! 저 시험!

  “축하해 훈아.

 

  승협이 웃으며 축하해주자 훈은 그제야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승협의 교실을 나왔다. 그러자 승협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훈을 따라왔고 훈은 자신을 따라오는 승협에게서 도망치며 뛰었다. 하지만 어차피 훈이 갈만한 곳이 도서실뿐이었기에 붙잡혔고 나란히 도서실 구석의 소파에 앉게 되었다.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음.. 그러면 나 초콜릿 만들어줘.”

  “네?”

  “누군가가 정성으로 손수 만든 초콜릿 먹어보고 싶어.”

  “정말 그거면 돼요?

  “더 있는데.. 초콜릿 받으면 알려줄게.

  “..알겠어요.

 

  그래서 훈은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초콜릿 만들 재료들을 사서 돌아갔다. 그리고 힘껏 정성을 담아 여러 가지 아기자기한 모양의 초콜릿을 만들었고 예쁜 상자에 포장까지 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혼자 등교를 해서 학교 정문에 있는 학생들의 사물함들 중 승협의 사물함에 초콜릿을 넣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넣으려고 여는 순간 수많은 예쁘고 귀여운 선물상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훈은 승협이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바로 눈으로 실감한 것은 처음이라 잠시 놀라 멈춰서있었다. 그러다 그냥 덤덤하게 선물상자들을 모두 집어 들어 다시 넣고 마지막에 자신의 것도 넣었다. 그런데 그날 하루 종일 무언가가 이상했다. 분명 아무렇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딘가 답답하고 가슴에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훈은 그냥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보건실에 가서 누워있기로 하고 보건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인기 많을 만해. 잘생겼지, 키도 크지, 목소리도 좋지, 공부도 잘하지..”

  “그리고 인기가 많을 수도 있는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 선배랑 사귀는 것도, 내가 그 선배를 좋아하지도...”

 

  그렇게 생각을 하다 잠들어버렸고 잠에서 깬 것은 이미 수업은 한참 전에 끝난 노을이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놀라고 당황해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나가려다 몸의 중심을 잃어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져서 아픔과 창피함에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괜찮아? 내 손 잡고 일어날래, 훈아?”

 

  고개를 들어보니 이승협이 있었다. 늘 그렇듯 다정한 말투와 목소리로 또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훈은 승협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얼굴이 붉어졌고 붉어진 얼굴이 창피해서인지 이승협 때문인지 혼란이 왔다. 그대로 가만히 승협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말 아픈 건지 열이 나기 시작하고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훈은 현실감을 잃어버려 승협의 손을 덥석 잡고 일어섰다. 훈은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이건 꿈 일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꿈이면 한번 마음 가는 대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잡고 일어난 손을 꼬옥 잡고 놓지 않았다.

 

  “선배..”

  “응? 왜 훈아, 넘어진 데는 괜찮아?”

  “승협이 형.. 저번에 말한 바라는 거 얘기해주세요.”

  “훈아, 너 열나는 거 같은데 괜찮아?”

 

  승협은 훈이 잡은 손의 반대 손을 훈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올려 열을 쟀다. 훈은 이제는 막을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승협이 형. 저는 바라는 거 있는데”

  “.....”

  “초콜릿.. 너무 많이 먹지 마요.”

  “훈아?”

 

  훈은 그 말을 하고 조금은 현실 파악이 되었는지 잡고 있던 손을 빼고 얼굴을 가리며 보건실을 뛰쳐나갔다. 승협은 이게 무슨 상황이었는지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생각하다가 훈이 놓고 간 핸드폰을 발견하고 챙겼다. 승협은 훈이 나간 곳을 따라가서 건네주려고 했지만 어디서 그 빠르기가 나왔는지 이미 복도에는 훈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빨라도 아직 학교 밖으로는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복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혹시 하는 생각으로 도서실로 향했다.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너무나도 잘 보이게 훈이 소파 뒤에 숨어있었고 승협은 모르는 척 웃으며 다가가 소파에 앉고서 배꼼 나와 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당한 머리는 흠칫 놀라더니 승협의 말에 슬금슬금 나와 옆에 앉았다.

 

  “거기서 안 나오면 나랑 다신 안 보겠다는 걸로 알게.”

  “선배..죄송합니다..”

  “아까처럼 승협이형아라고 해주면 안 돼? 왜 호칭이 다시 돌아갔어.”

  “제가 언제 형아라고 했어요!”

  “나 바라는 거 하나 그거로 할게. 훈이가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고 말 편하게 하기.”

  “다른 거.. 뭐라도 좋으니 다른 거로 해주면 안 돼요?”

  “음.. 훈이가 뽀뽀해주기?”

 

  라고 말하며 볼을 내밀며 뽀뽀해달라는 시늉을 하자 훈은 볼을 붉히면서도 질색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요..아니 부를게..”

  “그래 훈아. 아 맞다. 초콜릿 고마워. 맛있던데.”

  “뭐..자주 먹어봤을 텐데..”

  “응? 나 정말 처음 먹어봐.”

  “형 사물함에..”

  “아 그거 자꾸 내 사물함에 남의 물건이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원래 주인 사물함에 다 돌려놔.”

 

  훈은 속으로 승협이 멍청한 건지 멍청한 척하는 건지 생각했다. 분명 그 선물상자들의 주인은 승협이고 누가 봐도 고백용 간식, 선물, 편지들인데. 그냥 훈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하지만 이미 훈의 얼굴에는 여러 의문의 표정들이 드러났었고 승협은 그걸 눈치 챘는지 웃으며 말했다.

 

  “왜, 신경 쓰여?”

 

  신경 안 쓰였다면 순도 100프로의 거짓말이고 우르르 쏟아졌던 선물상자들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가 진실이었다. 하지만 진실 그대로를 말하기에는 이승협에게 자신의 수를 뻔히 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예쁘게 웃는 승협을 바로 앞에서 보고 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아뇨. 나랑 형이 무슨 사이라고..”

  “그런가? 그렇지? 근데..”

 

  훈은 다음 말을 듣고 얼굴과 목, 그리고 귀까지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예 온몸이 물들었고 하얀 피부가 붉어졌다. 승협이 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훈이는 왜 이렇게 손을 잡았을까?”

  “......”

  “왜 이렇게 온몸이 붉어졌을까?”

  “ㅎ형.”

  “왜 이렇게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걸까?”

 

  이승협은 능글맞게 웃으며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는 훈의 고개를 따라 내려갔다. 계속해서 훈의 이름을 부르면서. 훈아, 훈아, 훈아, 훈아. 열 번쯤 불렀을까 훈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몸은 감기에 걸려 열이 나듯이 승협이 웃거나 닿을 때마다 뜨거워졌다. 승협은 훈이 뜨거워질 때마다 손을 더 세게 잡고 예쁘게 웃었고 훈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승협이 형.”

  “왜 훈아?”

  “날..좋아해요?

 

  훈은 그 질문을 고심 끝에 다짐하고 승협의 반응들을 보며 반쯤 혹시..? 라는 생각으로 꺼낸 거였다. 승협은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 긍정적으로 웃고 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승협의 표정에서 언 듯 보이는 의문, 당황, 난처.. 에 훈은 불안해졌다. 거의 고백과도 다름없는 질문을 했는데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면 훈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겁이 나기도 하고 승협을 놓치고 싶지 않아 조금은 울먹이면서, 조금은 충동적이게 답이 나오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날,, 좋아해 줄 수 있어요?

  “나는..”

 

  “훈아!!!!!!”

 

  승협이 답을 하려는 순간 도서실 문이 강하게 열리더니 재현이 들어왔다. 뛰어왔는지 머리카락과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재현은 둘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아주 잠시 동안이었고 빠르게 표정을 풀며 훈에게 걱정했다 말하고는 나가자 말했다. 훈은 대답을 듣고 싶긴 하였지만 거절일까 두려워 김재현을 따라 나갔다. 재현은 훈의 손을 꼭 잡고 아무 말 없이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멈췄다. 왠지 비장한 표정을 하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결심했는지 말했다.

 

  “훈아, 좋아해. 정말 오랫동안 널 좋아하고 있었어.”

  “뭐?”

  “그래서 난 네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내가 너에게 주고픈 사랑을 받아줬으면 좋겠어.”

  “김재현.”

  “나 너 좋아해. 진짜 진심이야..”

 

  하루 만에 한 번의 고백을 하고 한 번의 고백을 받아 훈은 혼란스러워졌다. 늘 장난스럽기만 하던 재현의 마음이 진심인지도 모르겠고 받아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언 듯 보이는 재현의 마음이 지금 저의 마음과 닮아서 훈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발 저 고백을 장난이라 하고 취소해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재현의 눈은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훈은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하다. 그냥 웃으며 답했다.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재현아.”

  “내가 기다릴게. 이대로 끝내기엔 내가 너를 너무 오래 사랑했어..”

  “미안해 재현아. 그냥 이대로 이기엔 내게 너는 너무 오랜 친구였어.”

 

  재현은 훈의 말이 끝나자 애써 꾹 참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발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울고는 다시 애써 진정하고 말했다.

 

  “그래도 고마워. 들어줘서,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

  “내가 잘할게. 네 감정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재현은 먼저 뛰어갔고 훈은 멍하니 서 있다가 느릿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재현은 훈을 피하며 부모님께 말해 집도 옮겨 나갔고 정말 훈이 불편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어쩌다 혼자 살게 된 훈은 이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혼자가 되었다. 승협은 이제 3학년의 본분을 다하느라 엄청 바빠졌고 훈은 도서실도 가보고 디저트 가게도 가보았지만 승협을 만날 수 없었다. 반으로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한창 공부 중인 선배들이 있는 곳에 가기에는 약간 무서웠다. 그래서 정말 혼자 생활하였는데 처음에는 조용하고 하고픈 데로 할 수 있어서 마냥 좋았지만 가면 갈수록 조금은 외로웠다.

 

...

 

  그렇게 계속 혼자서 시간은 계속 흐르다 승협의 졸업식 날이 되었고 졌던 벚꽃들은 다시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인기 많던 승협은 많은 후배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훈은 몰래 슬쩍 꽃을 사 들고 왔지만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승협을 보고 구석에서 바라만 보았다.

 

  “그래.. 잊었을 거야. 아니면 그냥 고백받았던 경험 중 하나가 될 수도..

 

  그렇게 바라만 보다 가져온 꽃도 주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교정을 벗어나 집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누가 볼까 빠른 걸음으로 걸었고 미처 건네주지 못한 꽃은 훈의 마음처럼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울먹이려던 눈을 뒤로 돌렸는데 승협이 있었다. 훈의 앞에 서서 헉헉거리고 있었다. 훈은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이 안 됐다. 그렇게 훈이 멍하게 보고 있는 사이 승협이 먼저 말했다.

 

  “훈아, 왜 이렇게 걸음이 빨라..”

  “....나한테 온 거 예..요?

  “너한테 꼭 줘야 할게 있어서.

  “왜...?

  "이거.. 이 단추는 너에게 꼭 주고 싶었거든."

  "이걸..왜 나한테 줘?"

  "어.. 여기에선 심장에서 제일 가까운 단추를 주는 게.."

  "혹시 지금 이거 방송 이벤트야?"

  "응? 아니."

  "그럼 혹시 나 놀리려는 장난인가?"

  "..내가 왜 이런 장난을 쳐.."

  "그럼...혹시..이거.."

 

  훈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한 방울, 한 방울. 훈의 손에 들린 장미꽃이 눈물을 맞고 탐스럽게 빛났다.

 

  “이것은 정말 달콤한 봄날의 꿈인가요?

  “아니. 너무 늦은 그 날의 대답이야. 훈아.”

  “하지 마. 안 들을래..”

  “..사랑해 훈아. 날 사랑해?”

  “형은 진짜..”

  “아니라면 날 사랑해 줄 수..”

  “사랑해. 안 사랑할 리가 없잖아..”

 

  승협은 훈이 들고 있던 장미꽃을 뺏어 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훈의 손에 단추를 쥐여줬다.

 

  “누가 졸업식에 빨간 장미꽃을 줘 훈아.”

  “아 진짜.. 짜증나 이승협..”

  “사랑해 훈아.

 

  승협의 말이 끝나자마자 승협은 훈에게 입을 맞추었고 훈은 당황했지만 포개어진 입술의 부드러운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고 훈이 걸린 병은 개도 안 걸린다던 여름 감기도 아니고 독하디 독한 겨울 감기도 아닌 외투 하나 없이 꽃을 어루만지다 걸려버린 봄 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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