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다.
어제 일기예보는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하루 종일 해가 쨍쨍하게 떠 있을 것이라 했던 기상 캐스터의 말과는 너무나 다르게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게 하늘엔 먹구름들이 꽉 채웠고 평소라면 좋아했을 빗줄기들은 우산이 감당 못할 만큼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그냥 휴교하면 안 되나..
날씨 때문인지 축축 처지는 기분에 괜히 꿍얼댔지만 교육에 굉장히 열정이 깊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가 이런 일로 휴교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주섬주섬 학교 갈 준비를 하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겨서 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우산을 깜빡해서 다시 후다닥 들어와 우산을 챙겼다.
소리만 들어도 비가 온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이걸 놓고 갈 뻔했다니 내가 오늘 좀 이상한 것 같긴 하다. 그러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등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쓸데없는 생각들은 대충 날려버린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현관에 나와 보니 비가 많이 오고 있다는 걸 더욱 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들은 절대 그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가 학교는 까맣게 잊은 채 힘차게 내리꽂는 빗줄기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옆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렸다.
“학교 안가? 지금가도 아슬아슬한데.”
“아, 미안. 기다렸어?”
“내가 널 왜. 오늘 늦게 일어났어.”
태어날 때부터 17년을 함께 지낸 사이인데 한번을 살갑게 굴어준 적이 없다. 이름이 외자인데 성이랑 같이 불렀다가 혼난 적도 있고 뭐든 같이 하자고 했을 때 같이 해준 적이 없다. 생긴 것도 고양이 같이 생겨선 성격도 완전 도도하고 차가운 고양이 같다.
지금도 자기 할 말을 끝내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우산을 펴고 휭 가버린다. 그 애가 아파트 단지 정문에 가까워질 때쯤에야 나는 내 우산을 펴고 애써 뒤따라갔다.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훈이를 17년을 본 덕분인지 오늘 늦게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섭섭해도 날 기다려줬으니 내가 또 용서해줘야지.
또 내가 얼른 쫒아가서 옆으로 발맞춰 걸으니 티 안 나게 기뻐하는 것도 고양이 같다.
학교에 도착해서 다른 반인 훈이와 굿바이를 하고 교실로 들어와서 반애들의 말을 들어보니 장마가 일찍 시작되어서 일주일 내내 이정도의 비가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체육도 취소됐고 점심시간에 나가 놀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큰 상실감에 책상에 엎드려 나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계속해서 내리는 빗줄기들을 쳐다봤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모든 것이 다 잠길 것 같았다. 이미 운동장이 거의 다 잠겼으니 이 학교가 잠기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집에 갈 때는 헤엄을 쳐서 가야하나.. 훈이는 물을 싫어하니 내가 업고 가야겠다.
이런 실없는 생각으로 수업시간을 흘려보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고 종이 치자마자 바로 훈이네 반으로 달려갔다. 훈이는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있었다.
“훈아!! 밥 먹으러 가자!”
“안 먹어. 잘 거야..”
“뭐? 오늘 탕수육 나오는데..”
“너 혼자 맛있게 먹고 와.”
“너 지금 안 먹으면 저녁도 안 먹잖아. 한 끼는 먹어야지-”
하아...
훈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느릿느릿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재촉했다.
“밥 먹으러 가자며. 빨리 가.”
훈이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걸었고 나는 그 걸음에 맞춰 눈도 제대로 못 뜬 훈이의 손을 잡고 급식실로 갔다. 배식을 받아서 마주보고 앉아 먹는데 훈이는 고작 세 입을 먹고 배부르다 하고 있다. 내가 조금만 더 먹으라고 하자 탕수육 한입을 더 먹었고 같이 교실로 올라왔다.
훈은 바로 자신의 교실로 가서 다시 책상에 팔을 얹고 엎드렸고
나는 비어있는 훈이 옆자리에 앉아서 잠드는 걸 구경했다.
머리에 갑자기 고양이귀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훈이의 자리가 창가자리라 찬바람이 들어와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고
빗소리 때문에 잠을 자기 힘들까 싶어서 얼굴을 확인해 봤지만
아주 잘 자고 있다. 고양이같이. 예쁘게.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고른 숨을 쉬고 있다.
오늘 비가 와서 추울까싶어 반에서 담요도 가져와 덮어주었고
팔이 아플까싶어 훈이 사물함에서 고양이 인형을 꺼내어
팔을 빼고 머리 밑에 놔주었다.
교실이 꽤 시끄러운데 어떻게 이렇게 잘 잘 수가 있을까.
아까 밥은 새 모이만큼 먹고 배는 안 고픈가.
가만히 보고 있으니 되게 예쁘다.
속눈썹도 길고 코고 동글동글해서 귀엽고 곱게 감겨진 눈도 귀엽다.
아 곧 수업시간인데 가기 싫다.
왜 전 훈이랑 다른 반 인거죠. 선생님.
그때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들렸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훈이 손을 만지작거리다 보들보들 고양이 같은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고 내 반으로 돌아갔다. 아 움찔한 거 같았는데. 모르겠다.
교실로 가서 자리에 앉으니 비가 조금씩 그치고 있는 게 보였고 운동장에 고여 있던 빗물도 줄어들어 있었다. 집에 헤엄쳐서 가는 일은 없겠다. 뭔가 아쉽네.
훈이는 일어났을까.
이번 시간 무서운 선생님 수업일 텐데..
깨워주고 올 걸 그랬나?
그래도 그렇게 예쁘게 자는 애를 어떻게 깨울 수 있겠어.
교과서 귀퉁이에 고양이만 그리고 있으니
방금도 보고 온 훈이가 보고 싶어졌다.
끝나고 놀러가자 할까..
사거리에 고양이 카페 생겼던데!
아 오늘 비 왔고 추웠으니 그냥 방에서 같이 영화보자고 할까..
그렇게 별별 생각을 하다 보니 창 밖에서 햇빛이 들어왔다.
어느새 하늘은 구름이 싹 걷히고
맑은 하늘엔 언제 비가 내렸나는 듯이 해가 쨍쨍 비추고 있었다.
시계의 시침은 5시에 가까워져 가면서 곧 수업이 끝나간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종례를 들으면서 몰래 조금씩 가방을 챙기고 인사를 하자마자 훈이네 반으로 달려갔다. 훈이네 반은 아직 끝나지 않아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꽤 오래 걸렸다. 창문으로 훈이네 반을 구경하다 훈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훈이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나는 살짝 서운해져서 다시 눈이 마주칠 때까지 훈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훈이의 귀가 붉어지더니 재빨리 손으로 귀를 가렸다.
나는 그런 훈이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서
훈이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잠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런데 정민이가 날 불러 세웠다.
아마 오늘 국어시간에 받았던 과제 때문일 것이다.
훈이에게 오늘 같이 못 갈 것 같다 문자를 보내고 도서관으로 갔다.
금방 끝날 것 같던 과제는 하교시간은 훨씬 넘기고
노을이 져갈 때쯤에나 끝났다.
그래도 정민이가 잘 해줘서 너무 늦지는 않게 끝났고
꺼놨던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훈이한테서 문자가 와있었다.
>언제 끝나? 5:34
>너무 늦게 안 끝나면 기다릴까. 5:35
>비 온다. 6:02
지금 시간을 확인해보니 7시 20분을 넘기고 있었고 한 시간이나 지났기에 먼저 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서둘러 학교 로비로 내려갔다. 현관으로 나가보니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빗줄기가 힘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 약간은 추워하고 있는 훈이가 있었다. 나는 겉옷을 벗어 훈이에게 건네줬고 훈이는 받아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우산을 펴고 같이 현관 계단을 내려갔다.
제멋대로 내리는 비를 맞지 않게 아주 조심하면서
훈이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신발 앞 코에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어?”
“내가 왜. 나도 늦게 끝났어.”
“그래.”
이상할 거 하나 없었지만 둘 사이에 뭔가 이상한 어색함이 흘렀다.
하나.
둘.
셋.
같은 속도로 나란히 맞춰 가던 훈이가 멈춰 섰다.
그리고 우산으로 태연한 척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민이랑 과제 하느라..”
“요즘 자주 같이 다니던데, 많이 친한가봐?”
“친하지! 게임도 잘하고 나하고 반장 부반장인걸.”
“나보다 더 친해?”
훈이는 더 이상 표정을 숨기지 못하였고
나는 당황해서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훈이의 눈망울에서 빗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떨어졌다.
그냥 다 모르겠고 저게 계속 떨어지도록 보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정말..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 먼저 갈게.”
“훈아.. 난 진짜 모르겠어.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내가 왜 이러는지.”
“좋아해.”
“뭐라고?”
“진짜 짜증나고 화나는데.. 좋아한다고 김재현.”
“미안.”
“뭐?”
“미안, 나는.. 생각해 본 적 없어..”
“됐어. 나, 가볼게.”
“미안해.. 훈아.”
“너는..!”
“정말.. 나도 잘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이 이상한 느낌이 뭔지.”
“진짜 너무해, 김재현.”
“..미안.”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있던 너는 손에 힘이 풀렸는지
우산을 떨어트렸고 너는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맞고 있었다.
나는 네 옆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줄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 체
너에게서 뒤돌아 한걸음을 디뎠다.
그러자 너의 눈에서 무언가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지금 머리 위로 내리는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너는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가 나를 보고 섰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다.
장마는 너의 눈물이 보이지 않게 해주었다.
소리 없이 숨죽여 우는 너를 모를 수가 없었지만
빗속의 우리는 서로를 모른 척하기 좋았다.
이런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몸을 찬찬히 적시는 건 분명 빗방울들 이었지만
비를 핑계대어 점점 너에게 잠식되어 가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그랬으리라 믿는다.
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눈물에 잠겨 나를 부르지는 않았기에.
아 너는 비를 싫어한다 하였었는데.
그래서 우린 결국 우산도 쓰지 못한 체 비를 맞으며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건 절대 우리 둘에게 사랑일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증오이지도 않고, 그저 슬픔도 아니다.
그리고 이미 흠뻑 젖은 나에게는 너 외엔 보이지 않았고
빗줄기가 거센 탓인지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차가운 빗줄기에 차가워지는 너와 나는 온기가 너무나 필요했고
이런 생각들은 사치였다.
나는.
지금 너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다.
아무것도 생각 않고 네가 우는 게 너무 보기가 힘들어서.
그리고 곧바로 너에게 달려가 힘껏 껴안으며 생각했다.
이 이상한 느낌은 너무도 차갑고
모든 순간마다 너무나 아프기도 하지만 사랑인 것 같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