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푸르른 하루였다. 저렇게까지 투명하게 파랗기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까까지는 너무나도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하늘이었다. 겨울인지라 하늘에서 솜 같은 눈이 나폴나폴 날리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겨울답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성실한 달이 검정의 이불을 들고서 고 재빠른 발로 냅다 달려왔지만이다. 솜 같은 눈이라. 훈은 앉아있던 벤치 위로 소복소복 쌓이는 차갑디 차가운 눈을 만져보았다. 솜 치고는 차가웠다. 마치 훈이 예상하는 제 마음에 대한 대답처럼.
훈은 오병원에 사는, 보육원 아이였고 세상 사람들이 고아라 부르는 집단의 일원이다. 그런 훈은 안타깝게도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았다. 부모 없이 자란 이에 대한 차별과 색안경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뼈저리게 느꼈고, 이번 겨울이 오병원에서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생각하자 눈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샛노란 병아리 원피스를 입은 어여쁜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서 가는 빨간색 코트를 입은 다정한 어머니가 공원 저만치서 지나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자신의 가족이 연상이 되는 탓에 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도 희미한 여섯 살의 크리스마스가 가족과의 마지막이 될 것임도 몰랐지만, 그 조차 뚜렷하지 않음이 원망스럽고, 싫었다. 그래서 이 시기만 되면 항상 우울에 침식되고는 했다. 훈은 우울이 무서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한도 끝도 없이 바다에 빠진 것처럼 다시 지상, 즉 평소의 상태로 돌아오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이의 환한 웃음은 딱 그 맑음만큼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평상시에는 생채기는커녕 긁히지도 않았을 만한 상황인데 쓰라린 것은 지금이 함박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변수는 훈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현실로 이끌어냈다.
훈은 교회 관련 시설에 살고 있음에도 신이란 없다고 믿었다. 존재한다면 우선 순수한 소년에 불과했던 자신을 이런 처지로 만들지는 않았을 터. 또 있다고 믿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말 그대로의 ‘수라’였다. 그런데 오늘은 저 하늘에게 나름의 요청을 해보리라.
“나도 아무런 조건 없이 아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제 소망을 고백하고서야 뒤늦게 주위에 사람이 있었는지 확인을 하고, 없었다는 사실에 안심한 후 훈은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진실로, 그 소원을 이뤄줄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마 꿈에도 몰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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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훈의 예상과는 다르게 신이란 존재했다. 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지만 비슷한 역할의 영혼들이 존재했다. 각자 사정은 달랐고 사람들을 돕게 된 과정도 모두 달랐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직감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있었다. 이렇게 선택 받았으니 자신들이 선한 사람을 도와 그 사람이 일생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면 그들의 환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일정한 수 이상의 사람을 도우면 환생 시 유리한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들은 본래 사람일 적부터 천성이 좋아 타인을 잘 도왔으나, 더욱 열성적으로 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집단에는 살아있었을 시절, 이승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이 있었다.
이승협은 이런 식의 삶을 이어나간 지 이제 겨우 20년 다 되어가는, 초짜 중에서도 초짜, 신입 중에서도 신입인 이였다. 그런 그가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차훈 하나였다. 이승협에게 훈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였고 몇 년 동안 이승협의 관심과 애정, 사랑 모두를 독차지한 사람이었다. 다른 혼들이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할 만큼 훈은 이승협의 보물이었고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훈을 보는 모습 때문에 이승협은 폐인이라 불리었다.
“야, 회승아. 우리 훈이가 또 백점을 맞았네. 우리 훈이 참 대단하다 그렇지?”
“동성아, 동성아, 우리 훈이가 그린 그림 좀 봐. 화가가 되려나 봐. 너무 잘 그렸는데. 역시 우리 훈이야.”
“재현아, 이것 좀 봐라. 아이들이 우리 훈이를 반장으로 추천했대. 요샌 아이들이라도 보는 눈이 있나 봐.“
“…어차피 안 했을 거 아니야, 걔 성격에.”
“그렇긴 하지만 우리 훈이가 리더십 있고 똘똘하단 소리잖아.”
“보통 애들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아무나 추천하지 않아?”
“야.”
그래서 이승협이 훈의 소원을 들었을 때에는 눈이 뒤집어진 상태였다. 아무런 조건 없이 훈이를 아껴주는 사람이라.
안 그래도 차훈은 평소에 욕심도 없어서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나 보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바라는 게 있어야 승협이 힘을 써서 뭐라도 변수를 만들어 줄 텐데. 승협은 늘 아쉽게 여겼다. 그런데 20년이 다 되어 가는 세월 동안 처음 차훈이 원한 것, 이를 보는 순간 승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 주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승협이 가진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직 역부족이고, 승협이 할 수 있는 것은…….
훈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이. 바로 내가 아닌가! 훈이가 내가 필요하다는데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동성아, 형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상으로 간다. 주위에 잘 설명해 주렴. 형은 동성이 믿는다.]
이리하여 이것이 서동성이 으악 소리를 지르고 주위를 뛰어 다니며 ‘승협이 형이 지상으로 튀었습니다!’를 외치게 된 것과, 이승협이 사라진 사건의 경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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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승협이 형이네? 여기는 왜 왔어요?”
지상으로 오면서 영적인 힘은 버리고 온 승협의 몸은 이제 불투명한 모습이었다. 그런 승협의 뒤에는 호동그란 눈을 하고서 그를 쳐다보는 말간 얼굴의 청년이 서 있었다. 이제 막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그는 청년보다는 소년이란 말이, 소년보다는 순진한 아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한 사람이었다. 하여튼 그 청년은 승협과는 구면인 듯 친근한 어투로 말을 붙였다.
“어허, 신기하다. 형은 사랑 찾으러 지상으로 내려오는 타입 아닌 줄 알았는데. 형 훈이 바라기잖아요. 지금도 어화둥둥 내 새끼하면서 훈이만 이십사 시간, 투웬티 포 아워를 하루종일 보고 있…….”
청년은 무엇인지 불길한 생각을 한 듯, 말을 멈추었다. 온화한 표정이 굳었다.
“…아니죠?”
그의 생각을 단번에 짐작한 승협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훈이요.”
두려움을 동공에 고스란히 드러내는 순진한 청년은 불쌍하게도 승협이 놀려먹기 너무 좋았다.
“형 설마 훈이 죽었다고… 머리 깎고 스님 되려는 거면 전 반대에요.”
청년은 승협의 헤어라인을 눈으로 훑더니 민머리 모습을 상상하는 듯 했다. 영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표정이 요상했다. 순진하고 솔직한 눈동자는 이번에도 마음을 까발렸다. 형 그건 아닌 것 같아. 훈이는 훈이고 형은 형이지. 집도 절도 없고 가진 게 풍성한 머리카락 밖에 없는 사람이……. 회승의 생각이 길어질 때쯤, 승협이 말을 꺼냈다.
“흐큭, 사실 장난이고 훈이는 멀쩡해.”
“아이 뭐에요! 나도 옆에서 이야기 들으면서 붙인 정이 있는데, 놀랐잖아요! 아, 그럼 형은 훈이 보러 오겠다고 지금까지 쌓은 선행을 다 날려 먹은 거네요. 아이고, 이 한심한 형. 그래서 갈 데 없으니까 절에서 재워 달라고 온 거에요?”
“응.”
“쫓아낼 수도 없고 하니까, 이리 와요. 형도 여기 와서 저랑 쑥 좀 뜯어요.”
“고맙다. 회승아.”
승협은 회승이라 불린 청년 옆에 착하게 앉아 곱게 쑥을 뜯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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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날이 지났다. 사실 올해가 지나기 전 훈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승협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회승의 협조를 얻기 위해 승협은 절에서 청소를 도맡아 해야 했다. 이렇게 임금이 후한 알바가 어딨냐며 미소와 함께 들려온 회승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아는 것에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큰 절이 어딨니, 회승아. 역시 세상은 편하지 않구나. 하여튼 딱 크리스마스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승협은 훈과 만나고자 했다.
“형 오늘 간댔죠? 잘 갔다 와요. 애 앞에서 울지 말고.”
따뜻한 회승의 응원과 더 소중한 주급 봉투를 손에 들고 승협은 거리를 나섰다. 적어도 30년 전 쯤에 타 보고 타지 않았던 버스의 덜컹거리는 느낌과 함꼐 승협의 심장도 덜컹거렸다. 그 덜컹거림을 승협도 알고는 있었다. 나는 훈이를 사랑하는 거겠지.
처음 알아차린 것은 훈이가 열일곱을 먹은 해의 여름방학이었을 것이다.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던 친구인 옆 반의 재진이와 함께 보충수업 후, 학교를 나설 때 한 말이 화근이었다.
‘내가 너랑 사귀어도 이렇게 붙어있진 못 하겠다.’
물론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들어가 해가 높은 중천에 있는 더운 날씨에 나오는 상황, 단순히 시간이 오랜 것을 불평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훈이의 입에서 ‘사귀다’라는 말이 나온 건 정녕, 처음이었기에 승협은 그를 이질적으로 느꼈다. 훈의 아이 시절부터 봐 온 내가 과연 훈이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나는 훈이의 보호자가 아니었나. 그런데도 이성적으로 사랑한다고? 훈이가 말하던 부분은 승협의 머리에서 무한으로 재생이 되었다. 학교의 담장에 붙어있던 파란 잎사귀들과 배경의 나무, 청명한 하늘. 그리고 빛나는 훈이. 승협은 눈을 감고 가만히 이 일이 있기 전, 평소의 차훈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아침 조례 때의 시원한 눈빛
수업 시간 때의 진지한 분위기
4교시에는 나른한 손 끝
야자 때는 생각에 잠긴 표정
고양이를 닮은 차분한 눈가
미칠 듯 했다. 부정이 모여 하루라는 시간을 옮긴 뒤에야, 승협은 자신이 훈에게 설렌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느 새 버스는 승협이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멈추어 문을 열었다. 버스의 투명한 창문 사이로 오병원이 보였다. 내려와서 있던 일주일 동안 훈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여기 안에 있으리라.
“안녕하세요, 누구를 찾으시죠?”
“아, 안녕하세요. 차훈을 찾고 있는데요. 할 말이 있어서요.”
“훈이 친구에요?”
“아주 친하죠.”
“훈이라면 졸업하기 전에 학교에 짐 가지러 간다고 아마 지금 학교에 있을 거에요.”
“네, 감사합니다.”
승협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훈이네 학교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승협의 설레이는 발걸음은 즐거운 박자로 이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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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훈은 첫 눈에 반하는 사랑 따윈 믿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 사람을 보자마자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자고로 훈이 믿는 사랑이란, 그 사람을 천천히 알아가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물함의 물건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어느새 교명이 적힌 현판을 지나게 된 훈은 머리 위로 하나 둘 떨어지는 차가운 솜눈을 느꼈다. 눈인지 비인지 애매해하며 걸어가는 동안 날리던 솜눈은 솜줄기로 변해갔고 훈은 아침에 눈이 왔을 때 이후, 가방 속에 고이 모셔 두었던 투명한 비닐 우산을 꺼냈다. 우산의 덮개를 빼고서, 훈은 아침의 물방울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우산을 보며 생각했다. 혹시 이 오후의 눈이 아침의 눈과 같은 물이었다면 기적적인 만남일 텐데.
미처 교문을 나서지 못한 시점이었으나 눈은 하늘에서 쏟아지듯 내렸고 훈은 가방에 쌓이지 않게 우산을 어깨에 기대고서 땅을 보며 걸었다. 훈은 무심코 돌을 차는 일을 싫어했고 그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땅을 보며 걷기였던 것이다.
한 두 걸음을 더 걷다 슬쩍 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훈은 한 남자가 이 세찬 눈 속에서 우산도 없이 혼자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처 자신에게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으나, 남자는 자신 앞에서 멈추었다.
“드디어 만났어.”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 훈은 그제서야 한 눈에 반한다는 것의 뜻을 깨달았다. 아, 이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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