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 내일 토요일에 뭐해?
몰라..
할일 없으면 나랑 쇼핑이나 가자.
그럴까..
동아리방 소파에 길게 엎드려 있는 승협의 종아리를 드럼 스틱으로 꾹꾹 누르며 꺼낸 말에 의외로 빨리 긍정의 답을 들은 재현이 바로 볼일은 다 봤다는 듯이 뒤돌아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야, 재현아.
왜.
너가 보기에도 내가 별로냐?
뜬금없는 물음에 소파를 흘깃 돌아본 재현이 엎드린 상태에서 얼굴만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승협을 보고 들고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다리 치워봐.
으어어어
아 인간 말을 하던가, 좀 찌그러져봐.
다리를 툭툭치며 하는 말에 찌릿하고 쳐다보더니 결국에는 재현이 앉을 만한 공간이 스믈스믈 만들어진다.
승협이 매번 우스갯소리로 나보다 늙었을 것이라고하는 낡은 소파는 자리가 다 내려앉았지만 안락하긴 했다. 등받이에 깊게 파묻히 듯 재현이 자리를 잡자 승협이 한껏 쭈그렸던 다리를 재현의 무릎 위로 얹었다.
무거워.
그렇냐.. 내
내 마음도 무겁다 같은 소리 좀 하지마. 그러니까 매번 차이지.
요새 애들은 감성이 없어요..
형은 요새 애들 아니야? 손목에 스마트워치나 빼고 말하던가..
승협의 발목 위에 폰을 올리고 게임을 시작한 재현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하자 승협이 게임 음악에 맞춰 다리를 들썩이며 자세를 바꿨다.
야!
야? 너 선배한테 야가 뭐야.
아 꼰대 진짜..
어어? 볼 부푸는 거 봐라.
그래도 차마 선배라 욕은 못하겠는지 불만 가득한 볼이 잔뜩 부풀어오르자 재현이 동방에 들어온지 1시간만에 승협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볼을 쿡쿡 찔렀다.
아, 만지지마.
삐졌어?
다시 누워서 한쪽 팔을 괸 채로 웃는 표정이 맘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자 승협이 다시 몸을 일으켜 여전히 툭 튀어나와있는 볼을 양 손으로 한번 꾹 누르며 사과했다.
미안미안.
사과 같지 않은 사과지만 기분이 대충 풀린 재현이 화면을 끄며 본론을 꺼냈다.
또 차였어?
이번엔 뭐라는 줄 아냐..
뭐라고 했는데.
나한테는 미안한데 자기가 날 좀 착각했대.
음?
아니 쿨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애정이 많이 필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자기가 여유가 없대.
형 애정결핍이라고 엄청 돌려말해줬네. 이번엔 그래도 착하다.
저번에는 너무 연락 안한다고 까여, 이번엔 너무 많이 한다고 까여.. 어쩌라고.. 아니 생각해보면 걔는 기숙사 살지, 나는 자취하는데 하루에 한번 정도는 같이 밥 먹어도 괜찮은 거 아니야? 그래, 내가 10분 동안 답장 없었다고 생과대 건물까지 간 건 좀 오바였어.. 좀 나는 나름 잘 해보려고 한 거였다니까? 그렇게 싫어할 지는 몰랐지..
열변을 토하는 형을 두고 새로 게임을 시작한 재현이 답을 하지않아도 주절주절 말하던 승협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 술 마시러 간다.
아, 내일 같이 가준다며.
엉, 12시에 북문에서 보자.
오키
긴 다리를 접어 바닥에 던져진 휴대폰의 액정을 살핀 승협이 필름 끝부분을 만지며 문을 열고 가버리자 게임을 꺼버린 재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게 내 말을 왜 듣냐..
*****
이승협!
야.. 크게 말하지마...
아 진짜 얼마나 마셨길래.
몰라..
용케도 나오긴 나왔네.
다 죽어가면서도 씻기는 했는지 깔끔한 가죽 자켓 차림의 승협이 정거장의 의자에 앉아 속을 부여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가 올 시간을 보느라 앞에 서있던 재현이 나아지지 않는 상태를 보다 승협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형 이대로 버스 타면 토해. 카페 가서 뭐라도 마시고 가자.
그럴까..
다 죽어가는 승협을 일으킨 재현이 평소라면 5분 정도 들어가야하는 카페가 아닌 정류장 바로 뒤의 카페에 들어갔다.
*****
형은..
바나나 스무디, 알아.
야.. 형은 진짜 우리 재현이 밖에 없다..
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눈이나 좀 뜨고 있어.
창가 자리에 엎드려 있다 고개를 돌린 승협이 주문하러 카운터로 가는 재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기요!
어느새 감긴 눈 앞에서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승협이 눈을 뜨자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음료가 있었다.
마셔.
이따 내가 밥 살게..
점심 먹게? 형 원래 술 마시고 점심 안 먹잖아.
너는 먹어야지.
나도 이거 스무디라 밥 안 먹어도 괜찮은데..
이걸로 배가 차냐?
아니 뭐..
이따 배고프면 말해. 점심 겸 저녁 먹던가 하자.
아직은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차가운 스무디를 쭉 들이키던 승협이 문득 깨달았다.
이거 사이즈업했네?
형 맨날 술 마시고 이거 라지 마시잖아.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냐?
뭐..
재현의 볼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열은 입안 가득 들이킨 차가운 음료로 해결했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기기가 어려웠다.
*****
너 근데 뭐 사러온거냐?
가을 옷이 생각보다 없더라고.
그래?
그리고 이거 니트 가디건 맘에 드는데 보풀 일어나서 새 거 사게.
너 이거 잘 어울리는데.
입고 나온 연보라색 니트 가디건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재현이 보풀을 보여주자 곁눈질로 확인한 승협이 던진 말에 재현이 한 발자국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
이건 어때?
괜찮기는 한데...
와 가디건이 이렇게 없어?
지금 여기 가게 4개째 둘러보고 있는데 너 맘에 드는게 없겠지.
행거에 다시 걸어두려 가는 뒷모습이 강아지가 풀죽은 모습 같아 승협이 웃자 어느새 돌아온 재현이 왜 웃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야 너는 내가 웃기만 해도 그러더라?
뭘.
봐봐 이거 강아지같이 생겨서 눈 세모꼴로 떠지지도 않는게 나한테만 꼭 이래.
아, 형이 바보같이 웃었잖아.
평소라면 그냥 지나갔을 이야기지만 컨디션이 안 좋았던 승협도 기분이 나빠져 표정이 굳었다.
너는 다른 형들한테는 잘만 웃고 애교도 잘 부리면서 왜 나한테만 박하냐? 매일매일 보는데도 가끔은 진짜 니 속을 모르겠다.
형이 뭘 가끔 몰라!
승협이 말하는 동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재현이 가게인걸 깜빡 했는지 큰 소리로 말을 내뱉고놀라 입을 막고 당황한 채로 굳었다.
아니 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너 울어?
따라오지마.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걸 보고 더 놀란 승협이 손을 뻗자 뒤로 물러선 재현이 그대로 뒤돌아 나가버렸고 일어난 일들이 너무 순식간이라 승협은 멍하니 열렸다 닫히는 문만 쳐다보았다.
*****
이거 잘 어울린다.
그래요?
응. 너는 아직 귀여워서 그런가 이런 거 잘 어울리네.
이거 살게요.
사게? 가을에 가디건 입으면 안 추워? 바람 통해서 추울 것 같은데.
따뜻해요.
그래?
‘그 때 샀던게 오늘 입은 그건가?’
승협이 나가버린 재현의 뒤를 쫓아 나왔을 때는 이미 인파에 동글동글한 머리가 사라진 뒤였다. 조용히 재현이 갔을 곳을 생각해보다 흘러가는 생각에 떠오른 기억은 작년에 재현이 막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지나가다 본 가디건을 같이 샀던 기억이었다. 슬슬 저녁이 되어 많아진 인파에 섞여 걸어가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많기는 했다.
매번 틱틱 대면서도 거의 매일을 마주보고 밥을 먹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이 옷을 사러가서 승협에게 꼭 어울리냐 묻는 것, 사소한 습관까지 기억해주는 것들까지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의문은 끝도 없었지만 결국은 하나로 모였다.
‘나 좋아하나?’
물어보고 싶기도하지만 그간 한 연애상담이 몇 번이며 차이고 징징댄 건 또 얼마나 많았나 생각한 승협이 뜨거워진 머리를 버스 창에 대고 식혔다.
*****
버스에서 내리고도 어떡할까 한참 생각하던 승협이 결국 학교 앞의 생활용품점에 들어가 보풀제거기를 샀다. 봉지를 들고도 한참을 고민하며 서성이다 재현의 원룸으로 익숙한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원룸 앞에 와서도 이걸 어떡하나 싶어 폰만 만지작거리자 쌀쌀해진 날씨에 승협의 손가락이 붉어졌다. 귀끝도 빨개질 무렵에야 불러야겠다 마음을 먹은 승협이 카톡을 키자, 자동문이 열렸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차림 그대로 눈만 부은 재현이 쓰레기봉투를 손에 쥔 채 얼빠진 얼굴로 승협을 보고 있었다.
어어..
야, 재현아! 잠시만!
재현이 통통하게 부은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다시 들어가려는 것을 급하게 손을 뻗어 붙잡자 차가운 손에 흠칫 놀라는걸 승협도 느꼈다. 손에 쥔 봉투를 넘겨받아 수거 장소에 던져두면서도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꾹 붙잡고 있자 재현의 볼이 빨개지는게 승협의 눈에도 보였다.
야 재현아.
왜..
어..
막상 말을 꺼내고서도 쉽게 잇지 못하겠는지 이상한 소리만 내고 다시 입을 닫았던 승협이 손에 든 걸 불쑥 내밀었다.
이거 보풀 제거하는 거 앞에 팔더라.
승협의 손에 걸린 봉투를 쳐다보기만 하고 받지 않은 재현이 승협의 다른 손에 붙잡힌 손을 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주러 왔어?
아니, 어.. 우선은 그거 너 맘에 든다니까 이걸로 제거하고 입고.. 어, 그리고 너 가디건 못 샀으니까 다시 사러나가자고.
어, 그래. 고마워.
횡설수설하는 승협의 손에서 고개를 푹 숙인 재현이 그제서야 봉투를 받아갔다. 그대로 들어가려는 재현을 다시 잡은 승협이 빨리 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들어가버리고 끝일 것 같아 결국 입을 열었다.
형이 미안해.
그런 소리 듣자고 한 말 아니야.
아니, 그냥 내가 눈치가 존나 없어서 미안하다는 거야.
응..
어 그리고.. 그 내가 막 너를 아직 좋아하는지 확신은 없고 그런데
그제서야 잡힌 손을 빼려던 재현의 움직임이 멎자, 다시 단단하게 고쳐잡은 승협이 말을 이었다.
오면서 많이 생각해봤는데 너랑 있는 건 좋아. 아직 솔직히 잘은 모르겠고 그런데 일단 형 한번만 더 봐주면 안 되냐. 나 눈치 없고 바보인건 너가 더 잘아는 것 같은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한 재현을 당겨 부드러운 니트에 쌓인 등을 한 가득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한참을 훌쩍거리던 재현이 고개를 들자 그제야 눈물로 엉망이 된 승협의 옷을 알아챘다.
티 갈아입고 가.
어어 고마워.
밥도 먹고 가.
응.
여전히 퉁퉁 부은 눈이지만 웃으면서 말하는 재현이 작년의 가을 지나가다 본 가게 앞에서의 수줍게 웃던 얼굴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승협이 다시 팔을 뻗어 안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