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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힘들어..."

 

 

  바스라질 것 같은 얕은 한숨. 힘이 거의 빠진 훈의 손으로 도어락은 잘 열렸고 버튼도 잘 눌렸다. 요란하지도 정적이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평소와 다르게 집 안의 온 불이 꺼져있었다. 훈이 들어가며 거실의 불을 켜고,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가자 누런 빛 무드등만이 안을 밝히고 저 혼자 잠에 든 승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롭게 꿈 속 세계에 빠져든 것 같은 얼굴에 훈은 괜시리 울컥해서는 왼쪽 팔목에 채워진 은빛 팔찌를 뺐다. 그리고는 냅다 승협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팔찌가 너무 가벼워서인지, 훈의 오른팔에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간 건지 승협은 제 얼굴에 팔찌가 부딪혀 흘러내리는데도 뒤척임 조차 없었다. 훈의 붉은 손이 살짝 떨리며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조차 무드등 옆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러고 찾은 것은 둘이 함께 여행을 다니려고 산 작은 캐리어였다.

 

 

  지금 담고 있는 것이 겨울옷인지, 여름옷인지는 알 바가 아니었고, 그냥 무작정 집히는 옷들을 모두 쑤셔 넣었다. 두서없이 너무 막 넣었는지 캐리어는 금방 빈 공간이 없다며 옷을 쿨럭쿨럭 토해냈고 훈은 에이씨, 하며 옷가지를 몇 개 빼고 다시 닫았다. 훈이 캐리어를 세우고 나가려고 다시 돌아볼 때까지도 승협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였다.

 

 

  다시 요란하지도 정적이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닫혔다.

 

 

 

  *

 

 

 

  쨍그랑- 소리를 내며 동그란 접시가 신명나게 깨져버렸다. 이번 주에만 해도 세 접시 째였다. 아무리 사장님이 아는 형이라 해도 월급에서 제할 것이 분명했다. 훈은 또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지독히도 억울했다.

 

 

  "형, 괜찮아요?"

 

 

  자기 가슴께까지 오는 대걸레를 휘적거리며 카페를 배회하던 동성이 훈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을 리가. 진심은 알량한 자존심에게 지고 억눌러져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대신 당연하지, 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내뱉어졌다. 동성은 다시 대걸레를 휘적거리며 안 괜찮아 보이는데, 하고 중얼거렸고, 훈은 그런 동성의 입술과 눈빛을 보며 아는 형에 대한 친한 동생의 걱정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했다.

 

 

  마감 정리가 끝나고 검은 앞치마를 벗어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는데, 옆에서 같이 앞치마를 꼼지락거리던 동성이 훈을 보았다, 앞치마를 보았다 하더니 먼저 말을 꺼냈다.

 

 

  "술 마실래요?"

 

 

  훈은 순간 술이나 마시고 뻗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번에도 맥주 한 잔 마시고 뻗어버린 동성을 부축해 집까지 데려다놓는다고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그랬다가는 뻗는 게 술 때문이 아니라 동성 때문이 될 것이었다.

 

 

  "한두 잔 마시고 뻗을 거면서. 너랑은 안 마셔."

  "치이."

  "먼저 들어간다."

 

 

  입술을 내밀며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던 동성은 훈의 간다는 말 한 마디에 다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내일 봐요, 형."

 

 

 

  *

 

 

 

  그러니까, 훈이 승협의 얼굴에 팔찌를 던진 다음날 아침, 승협은 영문도 모른 채 제 어깨에 흘러내리는 팔찌를 느꼈다. 제 팔찌는 왼쪽 손목에 아주 잘 채워져 있었으니 필히 훈의 것이었고, 협탁 위에 놓인 반지까지 눈에 들어온 순간 승협은 잠이 달아났다. 훈이 집을 나갔다.

 

 

  '훈아, 어디야?'

  '이거 보면 연락해줘.'

 

 

  답장이 안 올 게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 승협은 마른세수를 하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방금 깨어난 뇌는 탄내만 풍기며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했고, 분명한 건 전날 아침 저는 훈과 싸웠고, 퇴근하고 돌아와 자고 일어났더니 훈이 없다. 훈은 별 것 아닌 걸로 싸웠다 해서 에라 모르겠다 짐 싸고 나갈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출근은 해야 했고, 승협은 없는 정신머리를 부여잡고 씻었다. 승협이 셔츠를 찾아 입을 즈음이면 항상 게슴츠레 눈을 뜬 훈이 다가와 안아달라며 팔을 벌리곤 했는데 그날의 승협은 그저 급하게 양말을 신고 집을 뛰쳐나갔다. 이상하게 재수가 없는 날이 있는데, 그 기분 나쁜 뉘앙스까지 겹쳐 승협의 감정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1층에 멈춰있고, 버스도 간발의 차로 놓쳤고, 첨부파일을 깜빡하고 업무 메일을 보내는 바람에 안 그래도 재수 쫌생이였던 팀장에게 약간의 꾸중도 듣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몇 시간동안 디지털시계가 굴러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훈에게서 연락은 죽어도 오지 않았고,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보아도 1분 정도 연결음 소리만 듣고 끝났다. 훈은 작정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연락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협은 훈이 자신을 차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사실 훈이 화난 이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왜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건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날 아침 왜 싸웠더라.

 

 

 

  *

 

 

 

  "어, 형... 저기..."

 

 

  동성이 엉거주춤 손바닥을 펴서 가리킨 곳에는 승협이 서 있었다. 훈의 표정은 한 순간에 굳어지며 다시 제 시선을 싱크대로 돌렸다.

 

 

  "무시해."

  "네?"

  "무시하라고."

 

 

  동성은 난감하다는 걸 표정으로 다 티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훈이 형 말대로 해야겠지. 하고 다시 대걸레를 힘차게 휘적거렸다. 자신을 틀림없이 본 훈이 모른 척하고 설거지만 하자, 승협은 안 되겠다 싶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종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던 훈은 어서 오세요, 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동성의 목소리만이 승협에게 전해졌다.

 

 

  "훈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줄 수 있어?"

 

  "잠깐이면 되니까,"

  "형."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승협을 끊고 훈이 치고 들어왔다. 눈은 뽀득거리는 접시들을 향해 있었지만 온 정신은 승협에게 집중되고 있는 듯. 앞치마로 야무지게 마무리된 뒷모습만을 쳐다보던 승협이 말을 멈추었고, 훈은 가만히 정적을 흘려보내다가 고무장갑을 집게로 집어놓고 나서야 승협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뭐 더 할 얘기가 있다고."

  "못 한 얘기 많잖아, 훈아."

  "난 더 할 얘기 없어. 있어도 더 이상 형이랑 하고 싶지 않아."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시간 내 줄 수 있어?"

 

 

  저 멀리서 둘의 대화를 듣던 동성은 둘이 카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후다닥 캐셔로 돌아와 마감을 시작했다. 원래 훈이 항상 하던 거라 동성은 조금 서툴렀지만, 왠지 저 대화가 끝나고 나면 훈이 마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확 와 닿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먼저 이 버튼을 누르고...

 

 

  "많이 화났어?"

  "..."

 

 

  승협은 훈을 보았고, 훈은 테이블을 보았다. 아마 승협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면 제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 판단했을지도.

 

 

  "훈아 내가 그때..."

  "형은 지금 우리가 어제 아침에 싸운 걸로 내가 짐 챙겨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

  "그럴 거면 그냥 돌아가. 형이랑 할 얘기 없으니까."

  "훈아, 너 집은..."

  "상관하지 마. 나 알아서 할 테니까. 가 줬으면 좋겠어."

 

 

  야속하게도 훈은 마지막 말만은 승협을 제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훈의 태도는 더 이상 승협의 손길로 따뜻하게 데울 수조차 없어 보였다. 훈이 뾰족해지면 승협의 손길로 동글해지곤 했던 기억들이 승협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의 훈은 승협의 손길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대로 드르륵 의자가 끌리며 물러났고 훈은 그 자리에 승협을 남긴 채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쾅 소리를 내면서. 카페에는 승협과 동성, 둘만이 남았고 승협은 차가워진 손에 얼굴을 묻다가 한숨을 뱉고는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제야 동성은 창고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고 반대편에 주저앉아 숨죽여 흐느끼는 훈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문에 귀를 마주해야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동성에게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 마냥 커다랗게 다가왔다.

 

 

  눈물에 짓물려 벌게진 훈의 두 눈을 못 본 척하고 평소처럼 대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괜히 말을 더듬고 훈의 눈치를 한 번은 더 보는 동성의 변화를 훈이 눈치 채지 못할 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왜 눈치를 봐, 신경 쓰지 마, 라고 말할 철판 깔린 얼굴은 없었고. 다 자신을 걱정해서 나오는 행동일 텐데.

 

 

  그 얼굴을 그대로 들고 재현의 집으로 들어가자 재현은 바로 맛있는 거나 시켜먹자며 배달 앱을 켜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굳이 그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던 훈은 나 그럼 볼케이노 시켜줘, 라며 재현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지만 재현은 그래! 까짓것! 볼케이노 그딴 거 먹어 치워주지! 하고 배달 앱을 뒤적거렸다. 혀를 삐죽 내밀고 배달시키기에 집중한 재현을 구경하고 있는데, 무음이 되어있는 폰 화면이 문득 켜졌다. 무엇 때문에 켜졌나 했더니 메시지 알림이었고, 잠금을 열어보니 동성이었다.

 

 

  '형 내일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우리 카페 주변에 되게 달달한 거 파는 데 많던데'

  '넌 카페에서 일하는 게 다른 카페 돈 벌어주러 가냐'

  '그게 아니라'

  '농담이야. 가자.'

  '네 형! 내일 봐요'

 

 

  "뭔데 그렇게 히죽 웃어?"

  "그냥, 아는 동생."

  "치킨 취소한다."

  "어허,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는데."

  "또, 또 얕고 넓은 유식함 뽐내신다."

  "이걸 모르는 니가 바보인 거야."

  "누가 모른다고 했냐?"

  "치킨 시켰어?"

  "또 말 돌리지. 40분 안에 온대."

  "어엉."

 

 

 

  *

 

 

 

  “아 맞다. 훈이 형 애인 생겼다던데.”

  “에?”

 

 

  열심히 샤프를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땡그래진 동성의 눈이 회승을 향했고, 회승은 휴대폰 화면을 보다가 동성에게 한 번 눈길을 준 후, 다시 휴대폰을 보며 입에 물었던 헛개수 빨대를 떼었다.

 

 

  "그, 학교 부회장인가 보던데? 이 사람."

 

 

  회승이 내민 화면은 밝기가 낮게 조정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동성이 눈살을 찌푸려가며 유심히 본 얼굴은 꽤나 호감이 가는 상이었다. 밑에 적힌 이름, 이승협. 아니, 이름도 잘생겼잖아. 형, 연애엔 관심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훈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신나 있었던 열여섯 동성은 급격히 어깨가 쳐졌다.

 

 

  "훈이 형 17년 모솔 인생 아니었나?"

  "맞지..."

 

 

  눈에 띠게 내려간 동성의 입 꼬리를 본 회승은 에잇, 하며 일어나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하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

 

 

 

  잡쳤던 기분은 치킨 한 마리와 맥주 한 캔으로 조금 평균이라도 상회할 수 있게 되었고 하룻밤 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훈을 보며 동성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훈의 머릿속에는 긍정적인 것들로 차 있었다.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검정이 물들면 금세 솜사탕들이 모두 까맣게 변해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그리고 그걸 많이 겪어봤으니 훈은 더 필사적으로 좋은 생각만 했다. 어제 치맥을 했고, 오늘 지각 안 했고, 일도 수월하고, 이따 동성이랑 달달한 디저트도 먹기로 했으니 꽤나 만족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하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뜻한 카페 분위기는 훈의 기분을 유지시켜 주기에 손색이 없었고, 훈은 그렇게 괜찮은 기분을 억지로, 억지로 유지해나갔다. 오늘 날 좋네, 라고.

 

 

  이미 승협과는 끝난 사이다. 집에 옷가지를 조금 남겨두긴 했지만 자주 입고 많이 입는 옷은 다 챙겨 나왔으니 굳이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그것 외에 제 흔적은 집에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승협의 자취방에 자신이 같이 살고 있던 것이니까. 승협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훈은 이미 승협에 대한 마음을 버리려고 노력 중이었다. 더 이상 더 나아갈 수 없을 사이에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낭비이니.

 

 

  어서 오세요! 손님을 맞이하는 소리는 평소보다 활기찼고, 동성은 그를 따라 활기차게 손님을 맞았다. 훈의 괜찮은 척은 동성까지 속일 수 없었다. 동성은 그를 몇 년이나 봐왔고, 또 몇 년이나 좋아했으니 그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쯤은 훈의 눈만 봐도 가능했다. 어쩌면 동성에게 기회가 될지 모르는 이 사건을 동성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갈까요?"

 

 

  일주일에 한 번 문을 일찍 닫는 날. 카페 문까지 착실히 잠그고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빌딩들 사이를 지나가며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야?"

"그럼요. 진짜 얼마 안 걸어도 돼요."

"그럼 우리 카페 경쟁 상대인데..."

"에이, 그런 생각은 일단 오늘은 버리는 걸로."

"그래, 얼른 가자."

 

 

동성이 살짝 앞장 서 길을 안내하는 동안 훈은 애써 제 카페가 승협의 회사와 가깝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어차피 퇴근도 안 했을 테고, 제가 가자고 해야 겨우 갔던 달다구리들 파는 곳에 저 혼자 올 리도 없었다.

 

 

인생은 엔딩이 없는 드라마인지라 그곳 주변을 배회하다 우연히 승협을 마주치는 상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혹시나 계기가 되어 승협과의 사이를 회복하는 망상도 조금 해보았으나, 그럴 일이 없다 가슴에 묻으며 승협에 대한 감정을 비웠다. 더 이상은 안 될 사이야. 안 될 사이라고. 그저 가만히 살다가도 승협이 생각나면, 자연히 저를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가 생각나니 그보다 더 괴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러니...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었다.

 

 

"완전 맛있게 달다. 마음에 들어요?"

"그러게. 맛있네."

 

 

승협이 형 생각하고 있구나. 단박에 알아차린 동성은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으나 제가 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같이 달다구리들을 먹어줄 수밖에, 그의 슬픔을 감춰주고 행복을 만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훈은 단색의 솜사탕을 휘젓고 있었고, 동성은 그의 옆에서 같은 설탕을 넣어주거나, 그가 잘 휘젓고 있는지 말동무나 되어주며 쳐다보았다.

 

 

"형, 이거요."

"어, 뭐야?"

"이제 10월인데, 계속 얇은 티만 입고 다니길래."

"...아."

 

 

하얀 쇼핑백을 슬쩍 열어보니 아까 잠깐 들렀던 가게에서 본 가디건이었다. 얼레벌레 싸들고 나온 캐리어에는 여름옷 투성이라, 재현에게서 가을 옷을 빌리려 했더니 재현의 옷들은 젠장 모두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손을 넣어 만져보니 두께도 조금 되어 보이니, 딱 적당했다.

 

 

  "고마워, 동성아."

  "헤헤, 뭘요."

  "너 몇 번 타고 가지?"

  "저 49번이요."

  "좀 남았네. 나 먼저 가겠다."

 

 

  "형."

  "어?"

  "저..."

  "빨리 말해. 버스 와."

 

 

  동성의 혀가 메말라가는 아랫입술을 한 번 축이고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도 다시 메말라가는 것이 동성의 심정이었다. 눈만 껌벅거리고 혀 밑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말을 뱉을지 말지 고민을 하다, 역시 아니라는 결정만 내린 채 눈을 다시 깜박였다.

 

 

  "잘 들어가라구요."

  "뭐야, 싱겁게. 나 간다."

  "잘 가요, 형."

  "그래, 내일 봐."

 

 

  버스에 자리가 널찍한 것을 보고 훈은 맨 뒷자리에 앉아 쇼핑백을 끌어안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촉감이 꽤나 마음에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안 그래도 서늘했는데, 받은 김에 가디건을 꺼내어 입어보니 사이즈도 딱 들어맞는 게 참 기특한 것.

 

 

  우웅-. 우우웅-.

 

 

  속으로 웅웅 울리는 게 뭔가 했더니 아까 진동으로 맞춰놓은 폰이었다. 꼼지락거리며 들어보니 이승협, 세 글자였다. 한 순간에 굳어버린 훈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고,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전화는 끊어졌다. 우웅-. 짧게 울리는 몇 번의 진동.

 

 

  '훈아.'

  '한 번만 만나줄 수 있어?'

  '부탁할게.'

 

 

 

  *

 

 

 

  1이 사라진지 한참이 지나도록 생기지 않는 하얀색 박스를 생각하며 승협은 화면이 뚫리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만나주지 않는 훈이 미워지려는 게 싫었다. 그날을 몇 십 번을 머릿속에서 되감았다. 훈과의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하는 하루에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우웅-.

 

 

  '지금 시간 돼?'

 

 

  이 다섯 글자에 승협은 얼른 계산을 하고 재킷을 의자에서 채어 뛰쳐나왔다. 일단 뛰쳐나오긴 했는데, 훈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어디야?'

  '나 재현이 집 앞.'

 

 

  지금까지 재현이 집에서 지냈구나. 승협의 회사 근처에서 재현의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로 두어 정거장 정도 거리이니, 뛰어서도 갈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릴 여유 따위 없었다. 숨이 차는 것은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알코올이 든 머리가 조금 띵해지는 듯 했으나 찬 공기를 계속 들이마시다 보니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고.

 

 

  해가 점점 짧아져 어둑어둑해졌고 가로등 몇 개가 골목길 안을 비추었다. 가로등이 비추지도 않는 길 구석에 땅이나 차며 서 있는 훈이 있었다.

 

 

  "훈아."

  "어."

  "고마워. 만나줘서."

 

 

  훈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저 아까보다는 살짝 풀어진 눈으로 승협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말해줄 수 있어? 난, 도무지 모르겠어."

  "형. 이거 진짜, 식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형은 형이 변한 걸 알아?"

  "...내가?"

 

 

  훈은 슬슬 올려오려는 눈물에게 다시 들어가라며 고개를 올렸다. 왜 승협의 얼굴을 보니 울컥하려 하는지. 기왕 마주 섰으니,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혼자 잠들어버린 형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아니, 집에 들어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내가 이건 사과해야지, 이렇게 잘 풀어야지. 근데 형은, 그냥, 그냥 자버렸잖아. 전엔 그렇게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서 오해도 다 풀고, 사과도 주고받고, 서로 풀 거 있으면 다 풀었으면서. 왜, 그런 거냔 말이야. 전엔 그게 당연한 거라면서. 내가 피곤할 텐데 먼저 자지, 해도 당연히 다 풀고 지나가야하는 거라면서. 형이 그렇게 말했잖아. 형이 그렇게 말해놓고.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그날 아침에도 그렇게 날 귀찮은 사람처럼 대해놓고, 그렇게 자 버리면 난 뭐가 돼? 그냥 귀찮은 사람이야?"

 

 

  쉼도 없는 훈의 말을 꼬박꼬박 듣고 있던 승협은 할 말을 정리하느라 얼마간 훈의 눈을 마주치고만 있었다.

 

 

  "훈아, 내가 널 귀찮은 사람처럼 대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절대 아니야. 우리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 있어도 네가 나에게 귀찮은 사람이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어."

  "형이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도, 형의 태도는 그랬어. 형의 표정이, 말투가 다 그랬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어. 그걸 표현하니까, 표현하니까..."

 

 

  훈의 눈에서 눈물이 한 가닥 흘러내리자, 훈은 그것이 마저 흐르기도 전에 얼른 닦아 올렸다. 절대 울지 않을 거라는 결심에.

 

 

  "훈아, 안아도 돼?"

  "형은 지금까지 내 말을..."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싫어.”

  “미안해. 잘못했어. 내 기분이 너를 대하는 태도에 드러난 것도, 그날 그렇게 자 버린 것도 다 미안해. 그러니까 훈아, 집에 가자.”

  “안 가. 난 그만 할 거야.”

 

 

  “훈아.”

 

 

  승협의 목소리가 뒤돌아 가려는 훈의 발길을 멈췄다. 훈이 꽉 그러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랫입술이 꽉 깨물렸다. 형 앞에선 절대 울기 싫은데. 왜 내 몸인데 내 맘대로 안 돼. 이대로 발걸음을 떼 성큼성큼 걸어가고 싶은데.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은데. 기껏 먹은 결심 버리고 싶지 않은데. 왜 이렇게 발이 무거울까. 왜 또 난 형을 더 믿고 싶을까. 왜 저 손을 잡고 싶을까.

 

 

  “나랑 같이 가자, 응?”

 

 

 

  *

 

 

 

  "형, 왔어요?"

  "일찍 왔네? 오늘은 늦잠 안 잤나봐."

  "에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맨날 잠만 자는 줄 알겠어요."

  "넌 딱 두 가지로 나뉜다니까. 로그인과, 로그아웃."

  "그럼 알람이 비밀번호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라며 훈이 환하게 웃었다. 동성도 그 얼굴을 보며 함께 웃다, 그의 뒤에 보이는 승협을 보고 웃음이 멎었다. 승협의 웃는 낯을 보니 무언가 달라진 게 분명했다.

 

 

  "아, 형 아직도 안 갔네."

 

 

  동성의 시선을 따라 승협을 본 훈이 손을 흔들었다.

 

 

  "승협이 형이랑 잘 풀렸어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잘 됐네요, 형 기운 없는 거 보기도 좀 그랬는데."

  "그랬어? 나 되게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요."

 

 

  훈의 인사를 받고 머리 위로 하트까지 날리고 나서야 승협은 가방을 고쳐 매고 제 회사로 향했다. 승협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테이블을 마저 닦았다. 그리고 동성은 가슴께까지 오는 대걸레를 휘적거리며 바닥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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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계간 끌페스: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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