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엽들이 날아다니며 간들간들 훈의 옷자락과 투닥거렸다. 속삭이는 그 소리는 듣기 좋았고 훈은 그들을 그냥 두었다. 맑디맑은 하늘과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부볐다. 장난기 많은 바람 한 줄기는 마침 떨어지던 단풍잎 하나를 훈의 머리에 꽂았다. 훈은 우연이 만들어 낸 결과물, 그 단풍을 자세히 보고자 손바닥에 올렸다. 그저 단풍잎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버리려 했건만 이상하게도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제 마음 같아 자꾸 눈길이 갔다. 하강하던 그 잎이 꼭 작년 가을의 제 마음 같아서.
*
“훈아아아.”
익숙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말 위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훈은 솔직히 못마땅했다. 엄연히 대군이라는 어른께서 저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서야……. 훈은 그 못마땅한 마음이 단순히 그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인 줄로만 생각했지만 사실 그 뿐은 아닐 것이다. 재현대군은 봄꽃같이 누구에게나 만개하여 웃음 짓는 사람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훈으로서는 마냥 기분 좋지만은 않은 건 사실이니. 왜 그런 지야 모르겠지만. 게다가 굳이 비유하자면 훈은 겨울 같은 사람이다. 겨울은 봄을 끝없이 갈망하지만, 봄은 겨울의 버팀목 위에 태어나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다음 계절인 여름만을 쫓을 뿐.
“대궐은요. 역시 큰일은 없으셨던 게 맞잖습니까?”
“에잇, 내가 말을 놓으라 하지 않았어.”
“대군 나리께선 이 나라의 왕자이신데 어찌 제가 감히 그런 불경을 저지릅니까.”
“너랑 나는 둘도 없는 동무 사인데 뭘…….”
김학우가 또 떼를 쓰려 하자 훈은 하고 있지도 않았던 마당 청소를 이어서 하는 척을 했다. 일부러인지, 진정으로 모르는지 김학우는 훈이 대답을 하지 않으니 졸졸 따라오며 말을 계속 건다.
“…훈이 또 토라졌나?”
홱. 훈은 고개를 픽 돌린다.
언제나와 같이 김학우는 혹시나 진심으로 마음 상한 것일까 두려워 안절부절못하는 그 눈도 못 숨기면서 계집아이처럼 진정으로 토라지고야 말았다며 제 혼자서 낄낄대고 웃을 뿐이다. 항상 그래왔다. 김학우의 모친네 가문에서 대대로 일해왔던 훈네 가족이다. 훈의 어머니가 몇 년 전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이 넓은 궐에는 훈네 모자와 김학우, 이렇게 셋이서 단란히 지냈다. 김학우는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고 왕은 김학우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덕에 어릴 적에는 어머니 가문인 유 판서 댁에서 지냈으니 훈과는 며칠 차이로 태어나 형제처럼 지냈다. 유 판서 댁에서 대군으로 태어나 천성이 너무 좋은 김학우를 걱정하여 성숙하고 야무진 훈을 일부러 붙여 다닌 탓도 있지만.
“안 되겠다, 대인배인 내가 우리 훈이 감정 풀어야지. 우리 함께 단풍 구경이나 하러 가자. 뒷산에 단풍이 명경이라는데 우리가 그 바로 밑에 살면서 보지도 못하면 쓰겠는지 생각해 봐. 네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그러니 오늘은 체통 따위 다 버리고 어서 가자.”
김학우는 어느새 단단해진 손을 훈에게 내밀었다.
“그렇긴 하네.”
*
막상 산 입구로 왔지만 사실 훈은 아직도 마음이 복잡했다. 무슨 생각으로 학우는 저를 결국 데려와서 이렇게 싫어하는 운동까지 시키는 것일까. 참. 그러나 명경이라 말한 것과 같이 나무들의 붉은 손짓과 샛노란 환영은 보고 있으면 제법 괜찮았다. 아직도 왜인지 불편했지만.
학우는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산의 등산로에는 큰 나무가 지키는 갈림길이 있었는데 그 갈림길 앞이었다. 하나는 옆 고을로 이어지는 길, 하나는 산을 따라 오르는 길. 학우가 저렇게 손까지 흔들며 밝아진 얼굴로 회상할 만한 추억이 있는 길은 옆 고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미 말했지만 학우는 어린 시절을 유 판서 댁에서 지냈고 유 판서 댁은 후에 옮겨 지금까지도 지내는 학우의 자택에서 먼 거리는 아니다. 바로 옆 고을에 있었는데 위의 길이 바로 그 고을로 가는 길인 것이다. 학우가 열다섯이 되던 해, 성년이 되었다며 조정에서는 학우가 분가하여 나오는 것을 권했고 그 길로 학우와 훈은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유 판서 댁으로 갈 일이 생겼다. 학우와는 사촌인 유 도령의 생일이 다가와 그 길을 다시 훈과 학우는 걷게 된 것이다. 사실 본인과 동일한 어린아이인 훈 하나만을 하인이라며 거느리고 나오는 것이 엄연한 대군의 신분인 학우가 하기에는 분명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학우에게 그 사실은 중요치 않았고 훈의 어머니 몰래 훈을 꼬셔 회승에게 선물하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산 맛있는 떡을 훈의 손에 들리고 야심차게 집을 나온 것이다.
하지만 미숙하고 어린 탓에 산의 같은 곳을 빙빙 돌기만 했고 결국 이 둘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 저녁때가 되어서야 현재 학우가 서 있는 저 큰 나무 앞에 앉아 잠든 채 동네 어른들에게 발견되었다.
“기억나?”
“그럼 당연하지.”
“우리 생각해보니 참 오래 지냈는데 말이야.”
“오래가 뭐냐, 너에게는 평생인데.”
“그래봤자 나 없이 3일밖에 안 살았으면서…….”
학우가 말을 끌며 머뭇대는 모습이 훈의 눈에는 고스란히 읽혔다. 이제 느낌이 왔다. 유난히 불편했던 마음도, 학우가 궁에 불려갔던 이유도, 학우가 오늘따라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것까지. 아아.
“훈아. 나, 혼인한다.”
섭섭한 눈을 가지고서도 마음은 설레는 듯, 이 세상의 모든 빛깔을 흡수한 마냥 그렇게나 색채가 풍부한 미소를 짓는 학우 앞에서, 훈의 표정은 도저히 둥근 곡선을 그리며 함께 웃어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얼굴의 주인의 마음은 두 갈래로 완전히 찢어지는데, 어느 미친 안면 근육이 그 마음을 거스르고 미소 짓겠는가.
“그래. 축하한다.”
“…원체 표현이 없는 건 알았지만 나 혼인하는 데두 이리 덤덤해? 흐흐, 아니다. 오히려 너답네. 어느 집 여식인지는 안 궁금하고?”
“어느 집 여식인데.”
“이조정랑 이 씨의 누이라더라. 정랑에게 듣기론 성품도 적당하고 외모도 뛰어나진 않지만 고운 편이래.”
“그래, 이조정랑 누이라면 참한 사람이겠네. 너 분위기 잡으려고 이렇게 밖까지 데려온 거지. 이제 가자.”
“피이, 그래.”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학우의 발걸음은 부러울 만큼 참 가볍기도 했다. 최대한 숨기려 노력했지만 추를 주렁주렁 달고 발을 질질 끄는 느낌의 훈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김학우를 좋아하는구나. 그저 우정과 친애 사이의 감정이겠지, 싶었던 게 사실 크나큰 그림자를 뒤쪽에 숨기고 커다란 바위처럼 데굴데굴 굴러올 줄이야.
*
훈은 그날 밤 통 잠이 오지 않았다.
마루로 나가 달을 볼까 하다 오후에 구름이 많았던 것이 기억났고 달은 못 보고 달을 가린 구름만 본다면 오히려 기분만 상할까 싶어 망설였다. 그러나 구름이나 훈이나 둘 다 이미 기분이 상한 건 마찬가지인데 설마 상처 입은 서로의 모습을 본다고 더 기분이 나빠질 건 아니겠다는 생각에 이르러 훈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드륵하고 열린 문은 놀랍게도 마루에 앉은 그림자를 숨기고 있었다.
“훈아? 더 자지.”
충동적이었다.
달빛 아래 어색한 분위기에 낯섬을 느꼈고 익숙하지 않은 느낌은 순간 심장의 두근거림으로 이어졌다. 훈은 바로 김학우에게로 다가가 정직한 입맞춤을 건넸고 그를 김학우는 받아들였다. 너도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구나. 미숙하고 서투른 입맞춤은 그렇기에 아름다웠다. 오직 진심만을 담았기에. 분명 함께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두 사람도 그들 중 하나였다. 투명한 눈동자는 숨기는 생각 따윈 없었고 맑기만 하여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전했다. 단풍만이 밤바람에 간들간들 움직이며 두 사람을 구경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그만큼 완벽한 풍경은 없었을 것이다.
*
“훈아, 손에는 웬 잎?”
학우는 눈을 반짝이며 단풍잎에 관심을 보였다. 유난히 동그랗게 말린 잎은 학우의 시선을 금세 사로잡았다.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 시선이 훈으로 향하긴 하였지만.
“왔네? 이건 머리에 떨어지길래 뭔가 해서.”
“벌써 단풍이 드는구나. 처음 한 날도- 아야!”
방정맞은 학우의 입놀림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훈은 학우를 가볍게 타일렀다. 물론 언제나 등짝을 어루만져 주지는 않았지만. 학우는 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볼에 가벼운 입맞춤으로 등짝의 사랑을 되돌려주었다. 찬 기운이 남은 손에는 낙엽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가을의 향이 가득했다.
“너는 대낮에 그런 말을 하냐.”
“흐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학우야.”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인지, 항상 학우가 부르짖던 낭만이라는 것을 위해서인지 훈은 학우의 이름을 부르고선 한 박자 정도 쉬었다.
“왜에?”
“사랑해.”
돌이켜보면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나 둘은 항상 이래왔다. 항상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고 서로가 선물이었다. 결국 들꽃이 피어나듯, 나중엔 단풍이 내려와 들꽃을 만나듯. 그리고 햇살이 그들을 감싸듯 사랑은 자연스러웠고 학우와 훈이 타협한 중간 지점. 그는 가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