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은 비가 내리는 창문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깜빡깜빡, 느릿하게 꿈뻑이는 큰 눈이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담았다. 유리창 겉면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교실 안,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가 예민한 빗소리에 묻혔다.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도 빗소리에 먹혔다. 하얗게 김 서린 창문. 밖의 온도와 안의 온도가 달라서 그랬다. 끝을 모르고 올라간 습기는 피부를 끈적이게 만들었다.
내리쬐던 햇빛이 구름 뒤로 숨으면 장마가 시작되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도 공기의 꿉꿉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장마로 인한 피해를 알리는 안전 문자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다. 그 바람에 훈의 친구들은 담임 선생님께 걸려서 혼이 났다. 핸드폰을 내지 않은 건 훈도 마찬가지였지만, 걸리지 않은 건 훈의 무리들 중 훈뿐이었다. 훈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놈들은 의리가 아주 끝내주는 녀석들이었단 거다.
누가 일러바친 것인지, 같이 불려가지 않았던 훈은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훈은 친구들보다 훨씬 무거운 벌칙을 받았다. 훈은 혼자서 학교 구관에 위치한, 멀리 떨어진 영어교실을 청소해야 했다. 핸드폰을 내지 않은 건 잘못했다. 잘못한 일이지. 체념한 훈은 머쓱해 하는 친구들을 매섭게 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진짜 끝내주는 의리네. 다 끝내주네. 친구들은 훈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딴소리를 했다. 다음 교시 뭐냐? 체육. 아, 하필 비 오는 날에!
운동장에서 비 맞으며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훈의 학교에는 체육관이 있었다. 교실이 있는 학교 신관과 체육관은 서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옷을 비가림막으로 쓰고 뛰면 30초면 닿을 거리. 우산을 챙겨가기도 싫고, 비를 맞기도 싫었던 훈은 우산을 챙기는 친구 놈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우산 밑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같이 좀 쓰자.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습한 공기까지. 훈은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놓은 체육관은 교실보다 쾌적했다. 한숨 돌린 훈은 오늘 수업 계획을 말씀하시는 체육 선생님께 귀를 기울였다. 원래 운동장에서 수업을 진행했었기에, 목적을 잃어버린 체육 수업은 자유 시간이 되었다. 훈의 끝내주는 의리를 가진 친구들은 농구공 하나를 잡고 스탠드를 힘껏 뛰어 내려갔다. 훈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앉아서 체육관을 주욱 둘러봤다.
넓은 체육관에는 훈의 반 말고도 다른 반, 다른 학년 학생들이 동시에 수업을 진행했다. 시작된 장마로 수업의 길을 잃은 허탈한 체육 선생님들의 한탄이 멀리서 보였다. 훈의 친구들이 재빨리 뛰어 내려간 것은 농구 코트를 먼저 차지하기 위함이었음을. 시선을 돌려 농구 코트 쪽을 보니 의기양양하게 농구공을 튕기는 뒷모습들이 익숙했다. 사이좋게 반쪽은 훈의 반이, 다른 반쪽은 같은 학년 다른 반이 쓰기로 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왁자지껄 팀을 짜더니, 친구들 중 하나가 뒤를 돌았다. 야, 차훈! 인원수 모자라! 너도 껴! 훈은 마지못해 터덜터덜 내려왔다. 축축 처지는 걸음이 훈의 마음을 대변했다. 구기 종목을 잘하지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훈은 제 딴에는 열심히 움직였다. 공을 잡은 친구는 훈을 쉽게 제치고 골대 밑으로 향했다. 슛, 골. 점수를 내주었다. 훈은 입을 꾹 다물고 손때를 많이 탄 농구공을 노려봤다. 같은 팀이 된 친구들에게 미안해지는 건 싫었다. 훈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매점 아이스크림이 걸린 농구 점수 내기. 한 골당 1점으로 치고 내기를 했다. 훈이 막 공을 잡았을 때였다. 훈을 바라보고 있던 친구들의 눈이 훈을 넘어 한곳에 모였다. 훈은 드리블을 그만두고 뒤를 돌았다. 반대쪽 코트에서 농구를 하던 애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친구들의 눈이 모인 바로 그곳. 훈은 바로 앞, 훈의 경로를 막으려던 친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저쪽에 쟤, 농구공에 얼굴 맞았어. 훈은 미간을 찡그리고는 손에 든 농구공을 꾹꾹 눌러보았다. 바람이 빵빵해 눌러지기는커녕 손가락만 아팠다. 으, 어떡하냐. 많이 아프겠네.
농구공을 다시 퉁퉁 튕기고 있는데, 농구공을 맞은 것으로 추측되는 친구와 그를 부축하는 다른 한 명이 체육관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헐, 코피 나나 봐. 훈은 친구의 말에 화들짝 놀라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급히 걸어가는 발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훈은 멍하니 체육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손에 있던 농구공이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가는 것도 모르고. 훈은 농구 하는 내내 그 전만큼 집중하지 못했다. 몸을 잔뜩 수그리고 체육관을 나가던 그 애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농구가 끝나고, 다 같이 에어컨 앞에서 땀을 말렸다. 종이 치기 5분 전. 체육관에서 교실까지 돌아가는 시간도 포함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체육 수업이 일찍 끝났다. 친구들은 좋다구나, 하고 빛의 속도로 인사를 하고 매점으로 달렸다. 내기 결과는 8대 7. 아슬아슬한 훈 팀의 승리였다. 내기에 참여한 친구들 중 훈만 천천히 문을 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훈은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바깥문을 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챘다. 올 때 같이 우산을 썼던 친구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훈은 체육복 안에 티셔츠를 입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서둘러 체육복 상의를 벗어 머리에 덮고는, 초를 셌다. 셋과 동시에 빗속으로 뛰어들 심산이었다. 하나, 둘, 셋-
비 오는 날의 이끼가 잔뜩 낀 학교 벽돌 바닥은 매우 미끄럽다.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면 더더욱. 체육관은 실내화만 출입 가능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발이 주르륵 미끄러진 건 절대로 훈의 의도가 아니었다.
우당탕, 철퍽!
훈은 넘어진 후 그대로 보건실로 직행했다. 매점으로 갈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무릎에서 피가 줄줄 새고 있었으니까. 정신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넘어졌고, 피가 난다는 생각이 훈의 머리를 온통 매웠다. 이상하게도 무릎에서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는 도중 화장실에 들러 상처에 묻은 흙을 씻어 내렸다. 흙이 묻은 그대로 보건실에 가면 어차피 다시 가서 씻어야 했다. 핏물이 다리를 타고 흘렀다. 양말은 넘어졌을 때부터 젖어있었다.
문을 연 보건실은 만원이었다. 다들 훈의 무릎을 보고 경악해서 앞으로 순서를 물려주었다. 보건실 선생님도 훈을 먼저 의자에 앉혔다. 식염수와 거즈로 피를 흘려보내고, 상처가 드러났다. 이때부터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따끔거리고 화끈거리는 감각이 무릎에서 허벅지를 타고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손끝이 달달 떨리고, 저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치료 중에 손에 난 상처도 발견했다. 넘어지다가 바닥을 짚으며 생긴 상처인 것 같았다. 무릎보다 손바닥이 배는 아팠다.
치료가 끝나고, 보건실 침대 쪽에서 그 애를 만났다. 아까 체육관에서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코피를 흘렸던, 그 애. 훈이 서 있는 바로 옆쪽 침대에 걸터앉아서 훈을 올려다봤다. 참 별난 만남이었다. 한 놈은 코피, 한 놈은 무릎을 깨트려 보건실에서 만났으니. 그 애는 훈의 무릎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훈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쩌다가 이랬어? 거즈로 흐르는 코피를 막아서, 웅얼대는 비음이 잔뜩 낀 목소리로.
체육 끝나고 교실 가려고 뛰었는데 비 때문에 미끄러졌어. 너는? 훈은 알고 있었음에도 물었다. 난 체육 하다가 농구공에 얼굴 맞았어. 그 애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친구 할래? 이름이 뭐야? 나는 김재현!
화끈거리는 것이 무릎인지 얼굴인지. 재현의 웃는 얼굴을 보고, 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가슴이 콩콩 울렸다. 그냥, 보건실이 더워서 그랬겠거니 치부해버리고. 훈은 재현의 손을 맞잡았다. 뜨끈한 체온. 그 애의 손은 훈의 손보다 따뜻했다. 여름인데도 따스하고, 기분 좋은 온기가 잡은 두 손안을 맴돌았다. 차, 훈. 차훈이야. 훈은 대답하며 재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행복해지는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을.
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울리는 바람에 둘은 손을 놓았다. 짧은 대화를 통해 서로 알게 된 건 서로의 반, 다음 수업이 무엇인지 정도였다. 다음에 또 봐! 재현은 훈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훈은 절뚝이며 보건실을 나갔고, 재현은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갔다. 훈은 반으로 돌아가면서 어지러운 머리를 식혔다. 다쳐서 머리가 복잡했을 때와는 달랐다. 심장이 요란했다. 너무 놀라서 그런가? 김재현, 때문인가. 괜히 헛기침을 하고 조용히 수업 중인 교실 뒷문을 열었다.
재현은 거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보건실에 비치된 물티슈로 뒷정리를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얼굴은 아직도 얼얼했지만 좋은 친구를 만났기에 기분은 괜찮았다.
종례가 끝나고, 훈은 학교 구관으로 향했다. 벌 청소를 해야 했다. 청소만 끝내면 바로 집으로 가도 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훈은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서 교실을 나섰다. 여전히 다리는 절뚝였다. 통증은 많이 나아졌으나, 화끈거리고, 따끔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불편한 자세로 계단을 오르고, 먼지 풀풀 나는 영어교실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김재현? 어? 훈이?
재현은 원래 담당 청소구역이 영어교실이라고 했다. 담당 선생님이 따로 검사하러 오시지 않아서 청소 시간 끝날 때까지 놀아도 된다며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먼지가 많구나, 라고 훈은 생각했다. 재현은 훈에게 왜 여기를 청소하냐고 물었다. 핸드폰 안 낸 것을 걸렸다고 굳이 그대로 얘기하기엔 부끄러웠다. 훈은 벌 청소라고 둘러댔다.
바닥을 쓰는 시늉이라도 하는 훈과 다르게 재현은 의자를 빼놓고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재현은 킥킥 웃으며 옆자리 의자를 빼 훈을 끌어 앉혔다. 고생하지 말고, 그냥 앉아 있다가 가.
청소 시간이 끝나고 둘은 같이 하교를 했다. 같이 가려고 했다기보다 청소 다 했다고 담당 선생님께 말하러 가는 재현을 훈이 따라갔다. 담임 선생님께 벌 청소를 끝냈다고 말하러 가는 훈을 또 재현이 따라갔다. 그리고 같이 학교를 나왔다. 둘 다 손에 우산을 들지 않은 채였다.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훈은 데자뷔를 느꼈다. 이번엔 빗속을 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친 무릎이 아려왔다. 재현은 가방에서 휴대용 우산을 꺼내 펼쳤다. 뭐해? 우산 없으면 같이 쓰고 가자. 어? 어어.
오늘 만난 사이에, 훈은 자꾸만 닿는 어깨가 불편했다. 불편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제 쪽으로 우산이 기울어 재현의 반대쪽 어깨가 다 젖는 것도,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재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훈은 재현의 손에서 자연스레 우산을 가져와 재현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얼굴이 가까웠다. 훈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요란한 머릿속을 진정시키려면 재현과 떨어져야 할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학교 앞 골목을 빠져나가는 우산 아래. 둘은 바짝 붙어 걸어갔다. 훈은 재현과 같이 계속 우산을 쓰고 걸어갔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재현을 향한 제 마음을 눈치챈 훈의 귀가 붉게 타들어 갔다. 조금만, 더 재현과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