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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겨울 놀이터 (Winter Playground), 글래디스 (Gladys)

 

 

 

 

  동성이 재현을 처음 만난 건 5살의 어느 놀이터였다. 눈이 적당히, 아니 많이 내렸다. 어린아이가 보기엔 많이 내렸다. 동성이 기억하는 인생에서의 첫눈이었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면, 분명 파란색이었던 하늘까지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톡, 톡. 떨어지는 눈송이가 옷에 닿으면 그런 소리가 났다. 재현은 너도 같이하자며 우두커니 서 있는 동성의 손을 끌었다.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다. 놀이터 한구석에 커다란 눈사람. 부모님과 아이들이 만든 그 눈사람은 눈이 모두 녹으면서 같이 사라졌다.

 

  그때 눈 진짜 많이 내렸는데, 지금처럼. 동성은 그네에 앉아서 쌓인 눈에 발을 굴렀다. 어릴 적 놀이터의 다 낡은 그네는 움직일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것과 다르게 현재 동성이 앉아있는 그네는 최신식이었다. 아는 형의 표현을 빌려, 그네가 사람 손을 물지도 않았고, 쇳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안전하고, 편안한 그네. 동성은 흔들리던 그네의 속도를 줄였다. 멈춘 그네 줄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이 펑펑, 말 그대로 펑펑 내렸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으면 몸 위에 눈이 쌓여서 눈사람이 되지 않을까. 아마 재현이 들었으면 그게 뭐냐며 킥킥 웃었을 생각. 눈을 털어내려고 그네를 조금 타다가 다시 멈추고를 반복했다. 손이 얼어서 빨개지도록 그네에 앉아 있었다. 하얗던 하늘은 착실하게 어두워졌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은 훌쩍 넘어 있었다. 동성은 일어서서 콩콩 제자리 뜀을 했다. 등에 멘 가방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학교에는 나른함이 가득했다. 선생님들은 진도를 나가지 않으셨고, 학생들은 학교에 나와서 자거나, 영화를 틀어놓고 자거나, 문제집을 펴놓고 잤다. 동성은 그중에서 유일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손에 턱을 받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쉬는 시간이었다. 드르륵, 쾅. 서동성! 뒷문 열리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동성이 눈을 떴다. 재현이었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달려왔을 것이다. 종소리가 끝나고 바로 문이 열렸으니까. 뭐가 그렇게 급해서. 동성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재현을 맞았다. 재현은 뛰어온 여운이 남은 모양이었다. 엉망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하고는 가져온 분홍색 담요도 어깨에 둘렀다. 복도에서 담요 걸치면 선생님께 잔소리 들을 텐데, 하고 동성은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따가 같이 가자.”

 

 

 

  그냥 문자나 톡을 하지. 폰 안 낸 거 다 아는데. 재현은 같이 하교하자는 한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동성이 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참 한결같았다.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기.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물론 그러지 않을 거지만. 김재현 없는, 입김 나오게 시린 복도에서 동성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김재현의 주변엔 사람이 넘쳤다. 이렇게 둘이서만 하교하는 날은 드물었다는 뜻이다. 김재현의 아는 친한 동생. 그게 서동성의 역할이었고, 동성은 그 역할을 착실히 십몇 년째 수행 중이었다. 척 보면 척. 오늘의 김재현은 드물게 시무룩해 보였고,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이 텐션은, 고민 상담? 생각하기가 무섭게 재현이 입을 뗐다.

 

  오늘 반에서 있었던 웃긴 일, 담임 선생님이 다음 주에 생일이시래, 등 본론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일상의 이야기. 재현은 고민을 말하기 전에 서론은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동성은 그게 좋았다. 김재현의 하루, 생각. 내가 모르는 시간들.

 

  나 고백할까? 동성은 재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고백? 갑자기? 너무 갑작스럽잖아. 동성은 그 주어가 누군지도 몰랐다. 당연했다. 김재현은 그런 얘기한 적 없었다. 일상 이야기에 섞인 갑작스러운 본론. 이런 적은 없었는데… 동성은 놀란 눈으로 재현에게 되물었다. 무슨 고백?

 

 

 

  “아냐 됐어. 너한테 무슨 이런 얘기를 하냐.”

 

 

 

  왜 나는 안 되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대답은 속으로 삼켰다. 그냥 삐진 표정을 지었다.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재현은 그런 동성을 보고 또 귀엽게 군다고 웃기나 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도착한 아파트 단지에서 재현은 잘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재현은 동성의 옆옆 아파트에 살았다. 가까웠지만, 멀었다. 동성은 그게 꼭 자기랑 김재현의 거리 같다고 생각했다.

 

  치기 어렸던 날에 재현이 형 이사 간다고 펑펑 울었던 것도 기억났다. 별게 다 울 거리였다. 고작 옆옆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이었는데도. 자기도 같이 눈물 콧물 다 빼면서 새끼손가락 약속, 앞으로도 같이 놀자고 해주던 김재현. 재현이 먼저 울어서 따라 울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동성은 차가운 그네 위에 앉아서 재현을 생각했다. 놀이터의 주인인 어린아이들은 늦은 시간이고, 날씨가 추워서 이미 다 가고 없었다. 빈 그네, 그 자리는 동성의 차지였다. 가끔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 그네에 앉아 시간을 죽이다가 집에 들어가고는 했다.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시지 않을 정도로만.

 

  새하얀 눈, 아무것도 묻지 않은 흰색을 보면서 재현이 말했던 것을 곱씹었다. 나 고백할까? 그 목소리가 떨림을 갖고 있었다. 누구에게, 무슨 고백을. 양심 고백 같은 건 아닐 거 아냐. 그래서 더 심란했다. 미간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어쩔 수 없었다. 서동성은 김재현을 좋아한다. 이미 가슴에 새겨진 오래된 문장에 확신을 더했다.

 

  그러니까… 좋아하기 시작한 건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함께했던 세월 속 어느 순간부터 재현을 좋아하고 있었다. 동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재현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재현을 안 좋아하게 될 수는 없었다. 불가항력이라고 표현하면 딱 알맞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정했고, 바른 사람이었으며… 동성은 재현의 장점을 나열하다가 그만두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동성은 그네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슬슬 들어갈 시간이었다. 겨울에는 해가 일찍 졌다. 아파트 단지의 유리창들이 지는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손발이 무척 시리기도 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돌았지만, 동성은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그네에 앉아서 재현을 생각하는 날에는 늘 그랬다. 결말은 항상 같았다. 김재현 진짜 엄청 좋아하네. 사실 확인만 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성은 눈을 한 움큼 집어서 뭉쳤다. 그걸 내려놓고 다시 또 다른 눈뭉치를 만들었다. 나란히 쌓아 올리면, 짜잔. 눈사람. 아담한 몸집이 꽤 귀여웠다. 흰 얼굴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로 눈과 입도 붙여주었다. 눈이라도 만지면 좀 마음이 가라앉을까 싶어서 그랬는데 영 아니었다. 김재현 생각하다가 만들어서 그런가, 눈사람이 김재현을 닮았다. 동성은 만든 눈사람을 놀이터 구석에 쌓인 눈더미 위에 올려두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형, 너 닮았다고 재현에게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범하고 언제나 그랬던, 같은 일상. 짝사랑의 흔한 형태. 동성은 겉으로 티를 내지도 못했다. 마음은 곪아 들어갔다. 김재현이 나를 안 볼 확률은? 김재현 성격상 그러지 못할 걸 잘 알았다. 어영부영 내 마음을 거절하고 다시 친하게 지내자고 하지 않을까. 오히려 내가 그 곁에서 멀어져야 편해질걸. 수백 번도 더 생각해본 여러 상황들. 고백이란 말이 형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얼마나 놀랐더라. 김재현에게 답장이 오기 전까지, 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또 김재현 생각이나 했다. 구구절절, 김재현, 김재현, 김재현.

 

 

 

  형은 내년에 고3이었다. 입시하느라 자주 못 볼 가능성이 컸다. 재현은 겨울방학부터 특강도 잔뜩 듣는다면서 울상을 지었다. 가방과 등 사이에 들어간 패딩 모자 꺼내준다고 잠시 들어본 가방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형 그러다 키 멎어. 여기서 더 클 키도 있냐. 재현은 충분히 컸다. 퍽, 소리 나게 재현의 가방을 때린 동성은 재현보다 앞서 걸었다. 그러면 삐졌냐며 재현이 졸졸 따라왔다. 동성은 그게 못내 좋았다. 그러는 동성도 집중해야 하는 시기의 고등학생이었으면서 머릿속에 김재현밖에 없었다.

 

 

 

  방학식이었다. 재현은 오늘 하교는 같이 못 하겠다고 먼저 가라고 일러줬다. 같이 못 가는 날이나, 같이 가자는 날이나. 맨날 먼저 이렇게 알려줬다. 소중한 동생. 재현의 입에서 그렇게 나온 말을 듣고서는 얼마나 그네에 앉아 있었더라. 동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하굣길을 걸었다. 혼자 걷는 하굣길은 생각보다 추웠고 시렸다.

 

  춥다고 하면 얼른 목도리를 벗으며 같이 할래, 물어봐 줄 재현도 없었고, 핫팩 챙기라고 잔소리해줄 재현도 없었고, 하여튼 김재현이 없었다. 동성은 뚝, 멈추어 서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미쳤나, 왜 이래. 저번에 고백 소리를 듣고 더 심해졌다. 오갈 때 없는 마음이 공중을 빙빙 맴도는 거 생각보다 별로였다. 재현은 나를 철석같이 좋은 동생, 친한 동생, 소중한 동생. 그놈의 동생. 모난 마음이었다. 재현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성은 이미 불어난 눈덩이 같은 마음을 굴렸다. 더 커지게, 더더 커져서 그냥 고백해버리게. 그 고백이라는 거 한 번만이라도 해보게.

 

 

  동성은 또 그네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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